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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Aug 15. 2021

마르그리트 뒤라스 『여름밤 열 시 반』

#26_오늘 밤, 이 마을에는 사랑을 위한 장소는 없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여름밤 열 시 반여름밤만의 정취, 선선한 바람이나 아름다운 풍광은 없다. 오직 끈적이는 불쾌지수와 멈추지 않고 몰아치는 거센 비, 하룻밤 머물 곳 없는 막막함, 그리고 끝없는 불면과 망상이 차례로 이어진다. 차가운 술 없이는 견딜 수 없는 밤이 이 소설의 서늘한 배경이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비는 멈출 것 같지 않고, 다음날 해는 떠오를 것 같지 않다. 영원히 끝도 없이 늘어질 것 같은 새벽하늘 아래, 마리아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술을 마시는 것뿐. 취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밤이 여름밤 열 시 반에 펼쳐진다.




마리아와 남편 피에르와 딸, 쥐디트, 그리고 친구 클레르는 마드리드를 향해 가던 도중, 퍼붓는 비를 피해 하룻밤 묵기로 결정한다. 소설은 마리아가 카페에서 나눈 대화로 시작한다. "로드리고 파에스트라" 그는 자신의 아내를 죽이고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애인마저 죽이고는 사라졌다. 경찰은 그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됐으나, 비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마리아는 만사니야를 거푸 주문하며 생각에 빠져든다. 로드리고 파에스트라는 어디에 있을까. 누구라도 그와 같다면 아내와 그의 정부를 죽였을까. 누구라도. 그가 무죄여도, 잘못은 모두가 그의 아내에게 있을까. 아니라면. 소용돌이치는 상념 속에서 마리아는 뜨거운 가슴을 진전시키기 위해 또 한 잔의 만사니야를 들이켠다. 만약, 피에르와 클레르가 사랑에 빠졌다면...... 필시 그들은 남몰래 사랑을 속삭이고 있거나,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을 것이다. 휘몰아치는 의심 속에서 피에르와 클레르는 이미 각별한 사이로 발전해 있다. 더욱 끈끈하게, 더욱 친밀하게, 더욱 은밀하게...



(17) 촛불 빛으로 보니 그녀의 미모가 더욱 두드러진다. 사랑의 고백을 이미 받았을까? 다가올 밤에 대비하여 미소를 띠고 있지만, 그 밤은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입술, 눈, 부스스한 머리카락, 또 손가락을 펼쳐 크게 벌린, 행복을 눈앞에 두고 기쁜 나머지 느슨해진 손, 이 가운데 어떤 것도 그들이 다가오는 행복의 약속을 조용히 이행하기 위해 오늘 밤을 따로 챙겨두었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한다.

(24) "폭풍우는 갈 때도 올 때와 마찬가지요. 갑자기 시작되었다가 갑자기 그치니까. 무서워할 필요 없어요, 클레르." 그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녀의 공포로부터, 공포에 빠진 그녀의 젊음으로부터 발산되는 저항하기 어려운 향기, 그것은 마리아에게서는 아직껏 느낄 수 없던 것이었다.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났다. 지붕 위는 텅 비어 있다. 거기서 사람들이 서로 붙잡고 실랑이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아무리 안달해봤자, 지붕 위는 영원히 텅 빈 그대로일 것이다. 빗줄기는 가벼워졌지만, 빈 지붕이 비에 젖어 있는 모습만 보일 뿐 마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남아 있는 것은 꿈에 그리던 고독의 추억일 뿐이다.



소설은 시종 마리아의 시선으로 피에르와 클레르의 관계를 세세하게 관찰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마리아 혼자만의 상상인지 불분명하지만, 마리아는 끝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과 서로의 몸을 터치하는 손길, 주고받는 말과 어조, 보이지 않는 행동과 표정까지, 면밀히 살피며 두 사람의 심리과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상상과 의심을 멈추지 않는다. 흡사 마리아는 남편과 친구가 보통 이상의 관계이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남편 피에르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면서도 괜한 심통을 부리는 것처럼 보인다. 로드리고 파에스트라가 저지른 살인 사건은 일견, 사랑의 파국을 암시하는 장치였을까. 그토록 마리아가 로드리고 파에스트라가 어디 있는지 궁금해했던 것도 같은 이유였을까. 그녀는 번번이 "그는 지붕 위에 있어."라고 혼자 읊조리며 확신한다. 우연히 그를 만나 도망칠 수 있게 도와주려 했으나, 바로 그다음 날, 로드리고 파에스트라는 변사체로 발견된다.  



(43) 밤 열 시 반, 그리고 여름.
그리고 나서 약간의 시간이 흐른다. 드디어 밤이 찾아온다. 그러나 오늘 밤 이 마을에는 사랑을 위한 장소는 없다. 마리아는 이 명백한 사실 앞에 눈을 내리깔고, 그들은 채워지지 않은 갈증을 그대로 간직한 채 남겨질 것이다. 그들의 사랑을 위해 마련된 이 여름밤, 마을이 온통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번개가 그들의 욕망의 모습을 계속해서 비추어준다. 그들은 여전히 원래의 위치에서 서로 껴안은 채 가만히 서 있다. 그의 손은 지금 그녀의 허리를 두른 채 화석처럼 굳어 있다. 한편 그녀, 저기 있는 저 여자는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붙잡고 달라붙은 채, 제 입을 그의 입에 대고 열심히 탐하고 있다.   






소설에서 살인 사건이나 범인을 잡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마리아의 심리 변화를 문장으로 따라 읽는 맛이 탁월할 뿐. 문장의 온도는 절대 높지 않다. 더없이 차가운 문장들이 짤막하게 치고 빠지며, 긴박함과 긴장감을 조성한다. 무엇보다 제목에서 보여주는 '여름밤'과 '열 시 반'이라는 계절과 시간을 시각적으로 묘사한 부분들은 감각적이다. 소설은 땀으로 찐득한 촉각과 코를 찌르는 술 냄새, 폭풍우가 퍼붓는 비릿한 물 내음과 눈을 찌를듯한 햇살과 더위로 채워진다. 또한, 정처 없는 불안과 피부에 달라붙을 것 같은 죽음의 예감이 사방에서 감돈다. 헤밍웨이의 하드보일 문체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나, 여성작가로서 뒤라스의 필력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각 장면마다 눈앞에서 펼쳐지며, 소설의 현장감이 생생하게 살아나 마치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무엇보다 불확실한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고전적이면서 진부한 주제를 낯선 사건과 문장으로 그려낸 점 또한 놀랍다. 마리아의 알코올 중독과 솜뭉치처럼 젖어든 몽롱함과 나른함, 더디게 흘러가지만 기어코 오고야 마는 내일은 아무리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인생의 권태와 허무를 보여준다.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욕망을 채우려는 인물의 집착과 피할 수 없는 사랑의 파국이 이 여름밤, 열 시 반에 예고처럼 펼쳐진다.


(157) 로드리고 파에스트라가 밀밭 속에서 새벽에 자살한 것은 예상할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있기 불편한 곳에서, 짐마차 소리가 들리고, 햇볕은 시시각각 자꾸만 더워지고, 호주머니에는 누워서 자는 데 방해가 되는 권총이 들어 있다. 그런 것들이, 그때까지 방심 상태에 빠져 잊고 있던 죽음이라는 신의 선물을 그에게 생각나게 해 주었을 것이다. 마리아는 자고 있다. 그녀는 그렇게 믿고 있다. 만약 그녀가 끝까지 자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녀는 우겨대지 않는다. 그녀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깨어 있다는 걸 깨달은 뒤 뜻밖에도 이렇게 냉정한 기분이 드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자고 있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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