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YFM Apr 20. 2017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짐 자무쉬,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글_ 허성완




*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어요.


 이 영화, 일단 보기에 아주 멋지다. 고풍스런 침대와 빈티지한 소파, 정성껏 짜인 카펫, LP판들, 복잡하게 맞물린 톱니들이 절로 떠오르는 시계와 전구를 끼워야 하는 오래된 스탠드, 액자와 액자 속 흑백 사진들, 다양한 언어로 쓰인 너덜해진 고서더미, 장인이 만들었음이 분명한 악기와 자동차가 만들어내는 음악, 금실로 수놓은 나이트 가운 등이 화면을 그야말로 가득 메우고, 카메라는 탕헤르의 낡은 거리와 디트로이트의 쇠락한 풍경을 서운함과 그리움 속에서 천천히 훑는다. 회칠이 벗겨진 석벽과 모로코의 전통 타일(zellij), 버려지고 녹슨 공장과 옛 건물의 아치와 둥근 천장… 기타 등등.

 더 늘어놓을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면 됐다. 내가 관심있는 건 영화의 서사니까 말이다.

 

 그러니 우선 터놓고 말하자.


 이 영화의 플롯은 느슨하다. 별다른 사건 없이 단지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나아가는(변화하는) 아담(톰 히들스턴)과 이브(틸다 스윈튼)를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거기엔 이유가 있다. 아담과 이브 사이에는 시작도 끝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에는 영원히 지속되는 관계(사랑)라는 운동이 있을 뿐이고, 영화는 그것의 일시적인 목격자일 뿐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태생적으로 빈틈없고 단단한 구조를 가질 수 없다. 그저 우울증이 (또다시) 도진 아담을 사랑으로 (다시금) 감싸는 이브와 그 사랑 안에서 또 한 번 살아 남는 두 사람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어쨌든 영화는 시작하고 또 끝나야 한다. 이 모순을 영화는 어떻게 돌파할까? 이것이 내가 영화의 시작과 끝에 주목한 이유다.



그들 사이에는 영원히 지속되는 관계(사랑)라는 운동이 있을 뿐이고,
영화는 그것의 일시적인 목격자일 뿐이다.



영화의 시작: 회전 이미지-반복-정지


 이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운동은 회전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린 회전에서 반복과 움직임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이 두 가지가 영화를 이해하는 키워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론부터 말해, 영화는 아담과 이브 사이에서 반복되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런 반복들의 축적을 통해 또 한 번 나아가는(제목에 따르면 "살아남는") 두 사람을 그린다. 그러한 주제는 영화가 시작부터 활용하는 회전 이미지를 통해 관객들에게 각인된다.1) 물론 관객이 그 주제를 깨닫게 되는 건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러서이다. 거기엔 회전이 나선운동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의 초반에 볼 수 있는 회전 이미지는 반복의 인상이 강하다. 영화가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수없이 반복되어 온 것이라고 주장하는(이러한 주장은 영화가 스스로 그 주제가 진부한(여기에는 어떤 악의도 담겨 있지 않다) 것임을 고백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영리한 오프닝은 시작이 없는 영화에 걸맞는 시작이라고 할 만하다. 그럼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해보자.

영화의 오프닝. 별이 박힌 밤하늘이 시계방향으로 천천히 회전한다(a1). 그 위로 오프닝 크레딧이 모두 지나가자 별들이 길게 잔상을 남기기 시작한다(장노출의 효과, a2). 그러더니 LP판 위에 바늘이 닿는 소리가 들리고 밤하늘이 LP판으로 디졸브되면서 음악이 시작된다(a3, a4). 그리고 이번에는 디졸브가 아닌 컷으로 연결되면서 두 주인공 이브와 아담이 차례로 등장한다(a5, a6).

a1
a2
a3
a4
a5
a6


 이때 화면은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한다(a5, a6). 종전까지 보여주었던 운동방향과는 정반대. 두 인물을 비추는 화면이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 것은 그들이 세계의 운동방향(시계방향)과는 얼마 간 떨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난 방금 "얼마 간"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거기엔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회전하는 화면으로 돌아가면, 그건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같고 달리 보면 두 인물들이 있는 공간 전체가 시계방향으로 도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착시 현상으로 인한 이 애매모호함이 내게는 아담과 이브가 처해 있는 역설에 대한 시각적 은유로 보인다.

 아담과 이브는 인간과 다르지만(반시계 방향) 그럼에도 그들이 인간과 같은 세계(시-공간)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다르다고 할 수는 없다(시계 방향). 그리고 더 엄밀히 말해 뱀파이어인 그들은 소수자다. 수적으로 볼 때 그들이 세상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능력으로 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우월한 소수자. 그들에게는 세계를 바꿀 능력이 있는 동시에 없다. 그렇다고 세계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왜냐하면 "세계 밖"이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아담과 이브에게 시간은 거의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그들 역시 시간의 영향 아래 놓여 있고 망가져 가는 세계로부터 위협받고 있다. 가령, 그들은 망가진 세계로 인해 오염되지 않은 피를 구하는 것에 점점 더 애를 먹으면서 생사의 위협을 받고 있다.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의 실존 역시 세계에 끈적하게 들러붙어 있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의 세계에 대한 동시성과 비동시성. 이것이 그들이 처한 해결 불가능한 역설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뱀파이어 영화인 동시에 세계와 갈등하는 우월한 소수자들(위대한 과학자, 예술가… 하지만 이것을 엘리트주의로 오역하지 않길 바란다. 그들이 위대한 것은 자신의 일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 겪는 번민에 관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일까. 영화에는 수많은 고서와 빈티지 악기들, 예술가들의 초상, 세익스피어의 시구 등이 등장한다.

 아무튼 이 역설적 상황에 대한 대응에서 아담과 이브가 갈라진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 우린 다시 한 번 회전하는 화면으로 돌아가야 한다(이 글의 운동성 또한 회전이다). 시계 방향과 반시계 방향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회전이 끝나는 순간 아담과 이브가 각자의 집에서 눈을 뜬다. 이후 두 사람의 행동은 비슷하지만 명백한 차이를 보인다. 우선 둘 다 일어나 밖(세계)을 내다본다. 하지만 그 방식이 다르다. 아담은 CCTV화면을 확인한 다음 창을 가리고 있는 커튼을 살짝 들추고 밖을 본다. 그의 시선은 방어적이다. 반면 이브는 보다 적극적이다. 그녀는 테라스에 올라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거리를 내려다본다. 이러한 차이는 그 다음 두 사람의 행동에서 보다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브는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세계로 나가지만 아담은 집을 떠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과 거래하는 인간인 이안을 집 안으로 들여서 그가 가져온 낡은 악기들을 만져보면서 세상을 떠난 음악가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브는 거리를 걸으면서, 그리고 카페에 앉아서 사람들의 행동을 흥미롭게 쳐다본다.  (아래의 사진을 참고하라)


아담과 이브는 각자의 공간에서 동시에 눈을 뜬다.
아담의 집에 있는CCTV.
인기척을 느낀 아담이 일어난다.
이브도 일어난다.
커튼 사이로 경계하듯 밖을 내다보는 아담.
반면, 이브는 옥상으로 올라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세상을 내려다본다.
아담의 시선.  그가 유일하게 신뢰하는 인간인 이안(안톤 옐친)이 손을 흔들고 있다.
이브의 시선. 아담이 보는 세상과 달리 차분한 활력이 느껴진다.
아담은 이안만을 자신의 공간으로 들일 뿐이지만,
이브는 문 밖의 세상으로 나아간다.
아담은 이안이 새로 가져온 기타에 윌리엄 로스라는, 하필이면 장송곡 작곡가의 이름을 붙여준다.
그 사이 거리를 걷고 있는 이브.
아담은 자살을 하기 위해 나무로 만든 총알을 구해달라고 이안에게 부탁한다.
그러면서 그는 화장실을 쓰고 싶어하는 이안을 내쫓다시피 한다.
그때 이브는 카페에 앉아 사람들을 관찰하는 중이다.
담배 피우는 남자를 보는 이브.
그녀가 고개를 돌리면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두 남자.


 위의 스틸컷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두 사람의 차이점이란, 그들이 처한 역설적 상황에 우울해하면서 고독하게 과거에 갇혀 사느냐 혹은 여전히 희망을 품고 현재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느냐이다. 전자는 물론 아담이고 후자는 이브다. 아담은 과거에 갇혀 있음은 물론 죽음 충동에도 사로잡혀 있다. 그는 새로 얻은 기타(1959년식 수프라)에 윌리엄 로스라는 장송곡 작곡가의 이름을 붙여주고, 그가 쓰는 음악은 철저히 음울하다. 심지어 그는 자살을 하려고 나무로 만든 총알을 구하기도 한다. (물론 그는 죽지 못할 것이다. 이브가 살아 있는 한은 말이다.)

 반면, 이브는 현재에 산다. 그녀는 아담이 가진 세계에 대한 암울한 비전을 부정하진 않지만 그럴수록 행복을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녀가 아담에게 말한다. "아직도 모르겠어? 세상 문제에 집착하면 자기만 고달프잖아. 그럴 시간에 건설적인 걸 해봐. 자연과 교감하면서… 즐겁게 친구도 사귀고 춤도 추면서." 그녀는 알고 있다. 오직 명랑한 정신, 춤추는 영혼만이 이 희망없는 세계를 견뎌낼 수 있다. 아담이 그걸 깨달을 때까지 그녀는 그를 지킬 것이다.

 이렇게 다른 듯 닮은 두 뱀파이어는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각각 아담은 디트로이트에, 이브는 모로코 탕헤르에서 서로를 떠올리며 공전한다.2) 지구가 앞으로 수만 년을 더 회전해도 둘은 결코 만날 수 없다.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으로 건너가지 않는 한 말이다. 그리고 언제나 행동에 나서는 건 이브다. 그녀가 아담에게 전화를 한다. 그렇게 해서 영화가 시작된 지 이십오 분이 지나서야 비로소 두 인물의 대화가 시작된다. 이 대화를 통해 우린 두 뱀파이어가 따로 떨어져 지낸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며, 그 이유가 아담의 우울증 때문이란 걸 알게 된다. 그 무수한 반복.

 

아담  인간 좀비들이 이 세상을 망치는 게 싫어.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내려온 느낌이랄까.


이브  그럼 뒤집으면 되지. 미쳐버리겠다! 전에도 이런 얘기 했잖아? 그냥 재밌게 생각하고 살아. 중세시대, 칭기즈칸, 종교재판! 대홍수, 흑사병 때도 마찬가지였어.


침묵

(그리고 이 침묵을 깨는 것도 이브의 역할이다)


이브  음악은 잘 돼가?


아담  그냥 하고 있어… 장례식 음악 작곡 중이야.


이브  자기야 나한테 와서 키스해주면 안 돼? 모로코 좋아했잖아. 여기 음악도 좋아했고.


다시 침묵

(이번에도 침묵을 깨는 것은...)

 

이브  그래. 아쉬운 내가 간다. 당신이 우울한 거 싫단 말이야. 나 비힝기 타는 거 질색인데.


아담  이브… 당산을 정말 사랑해


이브  그 사랑 찾으러 날아간다.


 영화가 시작할 때 아담(디트로이트)과 이브(모로코 탕헤르) 사이에는 다섯 시간의 시차(時差)가 있었다. 이제 그 시차(視差)를 없애기 위해 그녀가 디트로이트로 향한다. 이때 재미있는 것은 그녀가 비행기표를 예약할 때 사용하는 이름이다. 그녀는 이름을 묻는 항공사 직원에게 자신이 피보나치라고 말한다. 그녀의 이름에서 즉각적으로 연상되는 것이 있다. 피보나치 수열. 그건 축적을 의미한다. 디트로이트로 향하는 그녀의 가방에는 고서들만 가득하다. 그것들 하나하나가 인류의 지혜와 상상력이 축적된 것이다. 영화는 그것들에서 여전히 희망을 찾고자 한다.


 한편, 그녀가 사용하는 이름을 통해 아담과 이브 사이에 계속되어 온 상황(아담의 우울증-죽음충동, 둘의 별거, 이브의 노력…)이 무의미한 반복이 아님을 암시한다. 축적은 필연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근거로 한다는 점에서, 이브가 고서들을 가지고 아담에게로 향하는 것은 곧 그의 정지되고 폐쇄된 세계에 시간의 흐름을 부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담을 앞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것은 그녀 뿐이다. 오직 그녀만이 제자리를 맴돌 수도 있는 회전을 앞으로 나아가는 나선운동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


피보나치 수열. 축적을 통해 그려지는 이 나선형 회전의 중심에 시간의 축을 가로놓으면...
이렇게 앞으로 나아가는 나선운동이 아닐까.



 실제로 이브를 만남으로써 아담은 다소나마 진짜 삶을 살게 된다. 그의 시간은 비로소 흐르기 시작하고 그의 공간은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한다. 둘은 함께 드라이브하고, 체스를 두고, 음악을 듣고, 춤을 추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가 어느 날 등장한 이브의 동생 에바의 철부지 같은 행동으로 인해 둘은 디트로이트를 떠나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다. 둘은 최소한의 짐만 챙겨서 모로코로 떠난다. (이때 재미있는 상황이 연출된다. 아담은 많은 악기들을 두고가는 것에 불평하는데 그러자 이브가 말한다. "자기야. 세상에 악기는 널렸거든. 모로코에 가서 더 멋진 악기 찾아줄게." 그런데 정작 그녀는 자신이 가져온 책은 모두 모로코로 가져온다. 이건 그녀의 이기심인가?)



영화의 끝: 나선 운동-움직임-삶


 그렇게 하여 모로코에 도착한 두 뱀파이어는 위기를 맞는다. 그들에게 오염되지 않은 피를 구해주리라 믿었던 나이든 뱀파이어 말로우(존 허트)가 정작 그 자신이 오염된 피를 마셨다가 죽음을 맞게 된 것이다. 그는 임종 직전 아담과 이브에게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피를 건네준다. 아담과 이브는 그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으로 멍하니 벽에 기대어 서 있다. 두 뱀파이어는 막막하다. 이제 어떻게 오염되지 않은 피를 구해야 하지? 그런데 그 때 이브가 좋은 생각이 났다면서 아담이 가진 돈을 모두 받아서 사라진다. 그녀에게 피를 구해올 다른 방법이 있는 걸까. 그런데 아담이 여가수의 노래를 감상하고 있는 사이 그녀가 사온 것은 엉뚱하게도 류트다(b1). 게다가 그 류트는 아담이 총알을 만들었던 것과 같은 소재로 만들어진 것이다. 같은 소재로 만들어진 전혀 다른 두 개의 상징적인 사물, 총알과 류트. 그녀는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아담을 독려한다. 아직 희망이 있다. 분명히! (내가 그녀를 이기적이라고 말했던 걸 서둘러 취소해야 겠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아담을 행복하게 해주려 노력한다!)


b1. 이브가 사온 류트를 살펴보는 아담. 그는 이 악기에는 어떤 이름을 붙여줄까? 적어도 '윌리엄 로스'는 아닐 것이다.
b2


 둘은 이제 이국적 문양으로 장식된 벽 앞에 앉아 마지막으로 피를 나눠 마신다(b2). 잠시 침묵이 흐르고 참을성을 잃은 아담이 묻는다. "우리 이제 끝난 거지?" 그런데 그 순간 그들 앞에 정열적으로 키스를 나누는 연인이 나타난다. 기적적으로, 마치 최초의 연인인 아담과 이브를 구하려는 듯. 원거리 유령작용. 아담과 이브는 그들의 피를 조금만 마시기로 한다. 이건 아마도 두 가지 의미일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의 피는 오염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영화상으로는 아담과 이브에게 물림으로써)사랑을 통해 일종의 영생을 얻게될 것이다. 이때의 영생은 영원히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삶이 영원할 것처럼 매순간을 살아낸다는 의미이다. 희망없는 세계에서 끝없이 서로를 부축하면서 매순간 견뎌내는 반복과 그걸 통한 전진 말이다.

 영화는 아담과 이브를 바라보는 두 연인의 맞댄 얼굴과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그들에게 다가가는 아담과 이브의 얼굴을 차례로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이와 같은 결말은 아담과 이브가 또 한 번 살아남았으며 그로써 그들의 사랑이 더 강해졌음을(축적. 또한, 두 명이었던 뱀파이어 연인이 넷이 될 것이다. 피보나치 수열)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나선운동에서 하나의 원을 돈 셈이다. 그들에게는 또 다른 원을 돌아야 할 때가 찾아올 것이다. 아담은 다시 우울해질 것이고 그러면 이브는 그를 지켜보며 때를 기다릴 것이다. 다시금 그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반복되는 회전을 나선운동으로 전환해내는 사랑의 힘. 그것이 영화가 보여주는 주된 운동성이 의미하고자 하는 바다.   



미주

1) 내가 이 영화의 운동성이 회전이라고 말하는 건 단순히 영화의 초반에 보이는 회전하는 별들과 화면 때문이 아니다. 난 그 회전 이미지가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영화 자체의 운동으로서의 회전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은 아담과 이브의 관계, 영화의 주제와 형식, 역사와 문화의 반복성 등 다양한 차원에서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들뢰즈의 운동-이미지는 이와 같은 논의를 보다 풍성하게 해줄 것이다. 그러나 그건 다음으로 미루려 한다.

2) 영화에서는 아인슈타인이 말했던 원거리 유령작용(spooky action-at-a-distance)가 여러 차례 언급된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입자가 한 가지 속성을 공유할 수 있고, 한쪽에 교란이 일어나면 다른쪽에도 그 영향이 즉각 미친다는 게 내용의 골자라고 한다. 한편, 아담과 이브가 살고 있는 디트로이트와 탕헤르는 둘 다 과거 한때 번영과 영광을 누렸으나 현재는 쇠락한 곳이다. 디트로이트의 경우는 미국 최대의 자동차산업도시였으나 현재는 양극화가 극심하고 미국 내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로 꼽힌다. 또한 탕헤르는 오랜 기간 무역과 외교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던 도시다.



                                                                                                                                                                2017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