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여행자의 필요>
(이 글에는 영화 <여행자의 필요>의 내용 중 일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행자의 필요> 포스터에는 독특하게도, (위 포스터에는 이자벨 위페르가 앉아 있는 바위에, 메인 포스터에는 전면에 걸쳐) 영화의 시놉시스가 빠짐없이 적혀 있다. 먼저 그 글을 가져와본다.
"어디서 온지 모르는 이 사람(이리스-필자 주)은 불란서에서 왔다고 하고, 어린애 피리를 근린공원에서 열심히 불고 있었습니다. 돈도 없고 어떻게 살지 몰라해 불어를 가르쳐보라 권했고, 그렇게 두 명의 한국여자들에게 선생이 되었습니다. 땅에 맨발로 걷는 것을 좋아하고, 돌에 누워있는 걸 좋아하고, 힘이 되는 때 순간순간을 비언어적으로 바라보려 하고, 최대한 사실에 근거한 삶을 살려고 애씁니다. 그래도 사는 건 변함없이 고되고, 매일 막걸리에 의존하며 조금의 편안함을 얻습니다.”
이게 영화의 전부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꾸밈없는 모습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홍상수의 영화에는 여러 특성이 있겠지만 그중 하나가 대화를 통해 리듬을 만들어간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몇 가지 대화들에 주목하는 방식으로 이 글을 구성해 보았다. 그를 통해 나만의 리듬으로 재구성되는 <여행자의 필요>를 기대했다.
대화 #1
이리스(이자벨 위페르)는 한국인 남자 인국(하성국)과 함께 살고 있다. 그런데 갑작스레 그의 집에 엄마가 찾아오면서 이리스는 잠시 집을 나가게 된다. 이후 집에 아들과 엄마가 대화를 나눈다.
인국: 저거, 가져온 거 저거 뭐예요?
엄마: 아 저거, 김치하고 진미채 하고 장조림 좀 내가 해왔지. 김치 새로 담근 거니까 며칠 밖에 내놨다가 냉장고에 넣어. 꼭 며칠 익혀야 된다 밖에서? 어? 김치는 있어?
인국: 어, 없어요
엄마: 없어?
인국: 난 요샌 잘 안 먹어요 김치.
엄마: 어. 그럼 넌 요새 뭐 먹고살아?
인국: 음 그냥 빵이랑 뭐 샐러드랑 그런 것 좀 많이 먹고..
엄마: 아니. 그런 것만 먹고살아?
"너 뭐 먹고살아?"
이 질문. 나도 참 여러 번 받아봤다. (우리 엄마의 최대 미스터리이기도 하다) 그 속뜻은 십중팔구 '대체 돈은 어떻게 벌고 있냐'는 것일 테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의 대화도 자연스럽게 돈 얘기로 이어진다.
엄마: 그래서... 여기는 얼마야?
인국: 여기.. 오십만 원. 보증금 천에.
엄마: 그럼 전세로는 1억 5천에서 2억쯤 되겠구나?
인국: 그쵸?
엄마: 전기세랑 가스비는 얼마 나와?
인국: 가스비는 한 5만 원? 그렇게 나오는 거 같고. 전기세는 또 얼마 안 나와요. 만원?
엄마: 먹는 거는 그럼? 외식 같은 것도 많이 하고 그래?
인국: 외식은 한.. 매주 한두 번? 그런 식으로? 그리고 식당 이 근처에서 다 사먹고.. 그렇게 막 비싼 것도 안 사먹어요
엄마: 아이고 그럼 나머지는 네가 다 해먹고 그러는 거야?
인국: 네. 집에서 많이 먹죠.
엄마: 식재료비하고 외식비는 다해서 얼마나 나와?
인국: 식재료비? 12만 원. 전에 제가 계산을 했었는데 그 정도 나왔고. 15만 원 그렇게 나올 때도 있고..
엄마: 그러면은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다섯 번이라고 치고 한 번 먹는 데 만원 잡고.. 15만 원.. 그럼 먹는 데만 한 20만 원 나오는 거네?
인국: 그쵸.
엄마: 그럼 십에 이십에 십... 통신비는? 통신비는 얼마 나와?
인국: 3만 원? 이렇게 나오고.. 인터넷도 해야 돼서 다 합치면 5만 원? 이런 식으로..
엄마: 5만 원... 오십에 칠십에 팔십오.. 그러니까는.. 백만 원이면 되겠네! 백만 원이면 살겠다. 딱 필요한 것만 하고 살면.
인국: 최소한으로 하고 살면 그걸로 살죠? 근데 한 백이십? 그 정도는 쓰는 거 같아요.
엄마: (생각하다가) 백에서 백이십이 면 되는 거구나~ 괜찮네 그 정도면~
그러나 난 '뭐 먹고 사냐'는 그 질문에 영리한 답을 할 수가 없다. 난 돈에 관해선 특히나 아는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도 영화 속 아들처럼 정직하게 말하고 최소한의 안심을 시켜드리는 것뿐일 테지만 그마저도 불편해서 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돈은 내가 끈질기게 고민하는 주제이기는 하다. 아무래도 영화를 찍으려면 약간이나마 그것(돈)이 필요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생존(?)해 있어야 영화도 찍을 수 있으니 말이다. 말하자면 내가 그 주제를 즐긴다기보다는 그것이 나에게 들러붙어 있다는 느낌에 더 가깝다. 그렇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이상 누구에게나 돈은 중요하다. <여행자의 필요>도 주인공 '이리스'가 돈을 버는 과정으로 시작한다.
대화 #2
이리스는 돈을 벌기 위해 프랑스어 강습을 한다. 한 강습생(김승윤)은 수업 도중 피아노 연주를 하고, 이후 두 사람은 테라스에 앉아 대화를 나눈다.
이리스: 연주하는 동안 뭘 느꼈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여자: 아, 이게 그 질문하시는 건가요?
이리스: 네.
여자:(생각에 잠기며) 저는.. 제가 뭘 느꼈을까요? 제가 느낀 건 행복감이었어요. 피아노를 치면은 정말 행복해져요.
이리스: 그렇군요. 다른 건 또 뭘 느꼈나요?
여자: 음... 전 행복한 느낌이었고요.. 멜로디? 멜로디가 정말 아름다워요.
이리스: 알아요. 그런데 자기 안에서는 뭘 느꼈어요? 더 깊은 곳에서는? 정말로 뭘 느낀 거예요?
여자: 음. 모르겠네요.. 제가 뭘 느꼈을까요..? 전 행복했었고요. 아름답다고 느꼈었고요. 멜로디가요. (당황한 듯 웃으며) 제가 뭘 느꼈을까요?
이리스: 자기가 연주를 잘했다고 생각해요?
여자: 그냥 괜찮게 한 거 같아요. 실수도 많이 하지 않았고 점점 실력이 나아지는 거 같아요. 아마도.
이리스: 그래서 자랑스러웠어요?
여자: 네. 조금은요. 하지만 정말 조금요.
이리스: 자랑스러웠던 거예요, 아니에요?
여자: 제 생각엔.. 저는 사실은.. 좀 짜증이 났었어요.
이리스: 정말요? 왜요?
여자: 제 실력이 충분치 않았으니깐요.
"정말로 뭘 느낀 거예요?"
이리스가 언어를 가르치는 방식은 좀 독특하다. 그녀의 강습에는 교재도 없고 정해진 커리큘럼도 없다. 그저 강습생과 일정한 시간을 함께 보내고, 강습생이 피아노를 치거나 윤동주의 시가 새겨진 비석에 절하는 남편을 볼 때 어떠한 느낌을 느꼈는지를 묻는다. 그런 다음 그가 말해준 '느낌'을 프랑스어로 적어 건네준다. 그렇게 건네진 '글카드(영화에서는 이것을 인덱스카드라 부른다)'가 교재가 된다. 즉 이리스가 강습생과 어떤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 커리큘럼이 생성되고, 강습생 스스로 표현하는 자신의 '느낌'에 따라 교재가 탄생하는 구조다. 그런 점에서 이 '글카드'는 남이 대신 써준 짤막한 일기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다.
- 일기,
인간의 의식에 대해 합의된 이론은 없다. 아직 인간의 의식은 완전히 해명할 수 없는 미지의 것이다. 물론 그것을 해석해 보려는 여러 시도들이 있는데, 그중에는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이론이 있다. 그는 의식이 뇌에서뿐만 아니라 신체 전반을 통해 이루어지는 여러 작용들에 기반한다고 본다. 특히 그는 정서(Emotion)와 느낌(Feeling)을 구분하고, 그를 통해 의식과 자아에 대해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정서(Emotion)는 신체에서 일어나는 생물학적 변화이고, 느낌(Feeling)은 그 변화를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내가 절벽 끝에 매달려 있을 때 "심장이 두근대고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는 신체적 변화"가 정서라면, 그 변화를 "지금 내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땀이 비 오듯 흐른다."라고 알아채는 것이 느낌이다. 그리고 바로 그 느낌을 자각하는 순간마다 핵심자아(Core Self)가 형성되고 갱신된다. 나아가 자신의 느낌을 거리를 두고 해석하며 기억과 서사로 통합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나’라는 정체성이 구체적으로 만들어진다. 즉, 지금의 느낌을 자신의 과거 경험과 연결하고 자신만의 이야기로 만들어가면서 ‘나’는 형성되고, 끊임없이 갱신되면서, 지속된다. 이것을 자서전적 자아(Autobiographical Self)라고 부른다.
보다 단순하게 말하면, 느낌은 중요하며 그 느낌을 자신만의 이야기로 엮는 과정이 곧 나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느낌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고 서사화하는 일기는 자기 이해의 교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리스의 질문("정말로 뭘 느낀 거예요?")은 일종의 일기 쓰기를 유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두 강습생의 첫마디는 '모르겠다'지만, 이들은 곧 자신이 무엇을 느꼈는지 들여다보고 그것을 자신만의 이야기로 말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둘의 이야기는 닮아 있다.)
- 남이 대신 (낯선 언어로) 써준
영화에서 이리스에게 프랑스어를 배우는 강습생은 두 명(김승윤, 이혜영)이다. 이들은 이리스를 통해 자신의 느낌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프랑스어)를 갖게 된다. 재미있는 건 두 강습생이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하는 단어와 문장들이 평이하고 유사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둘의 언어가 같다 해도 둘의 느낌은 각자만의 것이며 비슷할 수는 있어도 완전히 같기는 어렵다. 당연히 이리스도 그들의 느낌을 온전히 알아챌 수 없다. 따라서 그녀는 그들의 느낌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하고 글로 써준다. 역시나 반복적이지만 미묘하게 다른 표현을 동원해서. 그리고 그렇게 이리스의 자아를 통과해 번역된 두 강습생의 '느낌'은 다시 그들에게 전달되면서 자아감각을 자극한다. 이때, 두 강습생이 자신의 느낌을 대면할 때 이중의 거리두기가 발생한다. 하나는 낯선 언어(프랑스어)이고 다른 하나는 타자(이리스)다. 이를 통해 두 사람은 추측컨대 더 나은 자기 인식과 그를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될 가능성을 얻는다.
가끔 우리는 누가 내 느낌을 대신 표현해 둔 듯한 영화(혹은 다른 그 무언가)를 만날 때가 있다. 마치 남이 대신 써준 일기와 같은 그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새롭게 갱신할 기회를 얻게 된다고 말해볼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좋은 타자와 내 느낌을 나누는 것도. 그래서 <여행자의 필요>를 보고 나면,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 쉼 없는 대화를 나누고 싶어진다. 그에게 내 느낌을 솔직하게 말하고 난 후, 그가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번역해 주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고 싶다. 선선하고 다정한 일기 쓰기 같을 것이다.
대화 #3
이리스는 또 다른 강습생 원주(이혜영)의 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그녀와 대화를 나눈다.
원주: 프랑스어는 오래 가르쳤어요?
이리스: 아뇨. 한국에 오기 전에는 아무 데서도 가르친 적이 없어요. 전 프랑스어 교습을 위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요. 이런 식의 생각하는 방식을, 가르치는 방식을 겨우 몇 개월 전에 고안했어요.
원주: 겨우 몇 달 전에요?
이리스: 네. 이게 누군가에게 맞다면 저도 돈을 벌 수 있는 거고요. 잘되기를 바라는 거죠.
원주: 그럼 제가 기니피그가 되는 건가요?
이리스: 아뇨. 저는 이미 말씀드린 것들 외에 다른 목적은 없어요.
원주: 무슨 뜻이죠?
이리스: 제 말은 당신에게서 무슨 장기 같은 걸 떼어가진 않을 거란 거예요.
원주: 하지만 저에게서 돈을 받아갈 거잖아요.
이리스: 네. 하지만 돈이 장기는 아니죠.
원주: 돈이 장기보다 중요해질 수도 있잖아요?
이리스: 당신이 그렇게 되게 놔둔다면, 네.
"돈이 장기보다 중요해질 수도 있잖아요?"
어떤 점에서 이리스는 실용적이지 않은 걸 팔고 있는 셈이다.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문장들, 예를 들어 물건의 가격을 묻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 아니라 지금의 느낌을 표현하는 문장을 가르쳐주니까 말이다. 그런데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리스가 돈 버는 방식은 신선하다. 느낌을 묻고 자아감각을 북돋는 것과 동시에 언어라는 도구를 가르쳐주는 것이니 말이다. 이리스는 사용하기 위해서라기보단 표현하기 위한 언어를 가르쳐준다. 새로운 언어 안에서 새롭게 자신을 인식하고 그것에 기초에 살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느낌'은 비생산적인 것으로 치부되며 억압되거나 자본의 필요에 따라 기형적인 방식으로 자극해 소비로 이어지도록 조작되기 일쑤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느낌을 느끼고, 그 사실을 인식하고 그 두 가지 현상을 통합해냄으로서 자아감각을 확장하는 기회를 자주 상실한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이리스의 질문은 단순하지만 심오하며,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질문에 함부로 답했다가 우리는 충동적으로 일을 그만두고 경제난에 처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내 느낌을 들여보는 일이 내 존재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우린 이 자본주의라는 게임에서 자신만의 균형을 찾아나가야 한다. 살아남아야 느낌도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다마지오의 이론에서 존재의 항상성은 모든 것의 기초적인 토대다.) 이쯤에서 영화의 다른 장면들을 더해보자. 이리스의 동거인, 인국에게는 두 명의 여자가 있다. 한 명은 이리스고 다른 한 명은 엄마다. 이리스는 값싸고 실용적인 모나미* 볼펜에 자신이 좋아하는 색을 입히고, 돈이 '장기'보다 더 중요해지지는 않게 해주는 사람이다. 그녀는 인국의 시가 훌륭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시 쓰기를 포기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사람이다. 반면 엄마는 아들이 밥도 제대로 못 먹을까 걱정돼 반찬을 가져오고, 생활비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으며 아들의 별 탈 없이 살아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다. 한 젊은 시인이 윤동주처럼 불운한 일로 죽거나 시를 쓰지 못하게 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두 사람은 협력하고 있는 셈이다.
대화 #4
아들의 생활상태를 확인한 엄마는 이제 아들과 동거 중인 이리스에 대해 캐묻기 시작한다.
인국: 그 사람은요. 한 마디로 말하자면 속세에 살면서 도를 닦는 사람이에요.
엄마: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그래?
인국: 진짜 진지해요. 그니까 사는 거를 죽는다는 그 사실을 잊지 않고 매일 사는 사람이에요.
엄마: 그건 그냥 그 사람이 나이가 많아서 그런 거 아닌가.
인국: 아니 아니 그런 거는 나이 많고 이런 거랑은 상관없지. 나이 많다고 진지해지는 게 아니라니까. 어차피 다 똑같이 살다가 죽지 다.
엄마: 어. 엄마도 나이 많은데. 그럼 엄마도 진지해?
인국: 아니 뭐. 엄마는 나랑 같이 오래 살지 못했으니까 같이..
엄마: 응, 그래그래. 그래도 엄마도 진지해?
인국: 열심히 살죠.. 엄마.
(중략)
인국: 열심히 사는 거랑 진지한 거는 완전 다른 거야. 그니까 진지하다는 거는 가짜에 미치지 않고 진짜 사실에 근거에서 사는 거야. 진짜 진짜 사실.
이리스 왓 이리스
영화의 주인공 이름은 이리스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아이리스'라고 잘못 발음한 강습생 원주에게 다시 한 번 이름을 가르쳐준다.
"아이리스?"
"네. 그런데 이리스예요. 사람들이 많이 헷갈려해요."
이 대화를 들으며 문득 '이리스'가 It is와 발음이 유사하다는 걸 떠올렸다. 더군다나 그녀의 동거인(인국)은 그녀를 두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It is what it is.)에 근거하여 사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영화는 그러한 그녀의 성향을 꽤나 직접적으로 묘사하기까지 한다. 강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이리스가 측정기를 가져와 그녀와 인국의 몸의 접지 상태를 확인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그녀는 인국의 접지상태가 '0'로 나오지 않자 그의 발을 억지로 눌러가면서까지 발을 땅에 딱 붙이라고 명령하듯 말한다. 마치 내가 살아가는 삶의 무대에 명확히 발을 딛고 살아 있어야 의식도 있고, 의식이 있어야 좋은 시도 쓸 수 있다고 다그치듯 말이다. 그 주장에 동의하면서 덧붙이고 싶다. 이 '삶의 무대'에는 '돈'만 있는 것도 아니고, '느낌'만 있는 것도 아니다. 둘 다 있다. 아, 그리고 '장기'도. (그러니 우리 모두 잘 살아있자고요.)
글_허성완
저는 선발투수보다 구원투수를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목표는 구원승'입니다. (한화 이글스 화이팅)
<목표는 구원승>은 제가 좋아하는 영화들을 향해 쓰는 연서이자 누군가 읽어주길 바라는 일기입니다.
비평 아닙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주세요!
* 영화에서도 잠시 언급되는데 모나미(monami)는 내 친구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Mon Ami에서 왔다고 합니다. 이리스는 거기에 초록을 입힙니다. 그리고 그녀는 인국을 '내 친구'라고 부릅니다.
* 글에서 언급한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이론은 <느낌의 발견> 등 그의 책들과 TED 강연(하단 링크) 등을 두루 참고했습니다. (당연하게도) 다마지오의 이론은 글에 묘사된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정교하다는 점 참고해 주세요.
https://youtu.be/LMrzdk_YnYY?si=l2UKp0we41uIcu6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