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초월하는 큰 가르침을 받고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넘나드는 이번 여정은 뉴욕타임스 기자 및 NPR 해외특파원으로 활동한 에릭 와이너(Eric Weiner, 1963~)와 함께 떠나는 기차 여행을 선택했다. 같이 일하는 동료가 읽고 나서 내가 좋아할 내용이라며 추천해 주었다. 때로는 나만큼이나 나를 잘 아는 동료라 망설이지 않고 바로 탑승길에 올랐다.
죽은 철학자의 살아있는 인생 수업이 스며드는 철학적 쾌감
일단 책의 제목이 신선했다. 소크라테스랑 같이 떠나는 기차 여행 느낌이 좋았다. 특히, 철학이 우리 인생에 스며드는 순간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작년부터 스며든다는 표현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내가 하는 일들은 첫술에 배부를 수 없는 일들이 많고, 조급함을 내려놓고 서서히 물들이는 전략이 더 오래 지속된다는 것을 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짧지 않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예측보다 합의를 얻어내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영혼이 담긴 메시지를 주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누군가를 평가하기 전에 나를 먼저 성찰하고 반성하며,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을 버리고 나의 본분에 충실히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그 효과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 사이에 미래 비전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기 시작했고, 이제는 우리 조직이 뭔가 달라져야 한다는 인식들이 서서히 스며들고 있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책의 목차와 구성도 철학적 사유가 서서히 스며들게 구성되어 있다. 새벽-정오-황혼으로 구분하여 각각의 시간대별로 14명의 철학자와 함께 떠나는 여정은 다음과 같이 짜여 있다.
1부. 새벽 ①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침대에서 나오는 법 ②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하는 법
③루소처럼 걷는 법 ④소로처럼 보는 법 ⑤쇼펜하우어처럼 듣는 법
2부. 정오 ⑥에피쿠로스처럼 즐기는 법 ⑦시몬 베유처럼 관심을 기울이는 법 ⑧간디처럼 싸우는 법
⑨공자처럼 친절을 베푸는 법 ⑩세이 쇼나곤처럼 작은 것에 감사하는 법
3부. 황혼 ⑪니체처럼 후회하지 않는 법 ⑫에픽테토스처럼 역경에 대처하는 법
⑬보부아르처럼 늙어가는 법 ⑭몽테뉴처럼 죽는 법
소크라테스는 저서를 남기지 않았지만, 소크라테스만큼 긴 세월의 스며듦으로 세상을 그의 사상으로 물들어 버린 인물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마치 죽은 사람으로부터 살아있는 철학 수업을 인류가 받는 것 같다. 그래서 원서(The Socrates Express)의 부제도 ‘In Search of Life Lessons from Dead Philosophers’로 정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닫는 순간 함께 탑승했던 14명의 철학자와 나눈 이야기들이 내 안에 스며들고 있다는 쾌감을 맛보았다. 내가 맛본 그 쾌감과 철학적 짜릿함을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1. 1부 : 새벽 기차를 타며 만난 사람들
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전 세계 인구의 약 5분의 1을 지배하던 대제국의 황제였지만, 아침형 인간은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를 침대에서 일어나게 했던 동기는 의무가 아닌 사명 때문이었다. 사명감은 자신과 타인을 드높이기 위한 자발적 행동인 반면, 의무감에서 나온 행동은 부정적인 결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행동이다. 과연 나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게 하는 사명은 무엇일까? 솔직히 나는 그동안 어떻게 하면 계획된 시간에 잘 일어날 수 있을까 생각을 더 많이 했었다. 그런데, 무엇이 나를 일찍 일어나게 하는지는 고민해보지 않았다. 저자의 딸인 소냐가 이 질문에 아주 명쾌하게 대답했다. “우릴 침대 밖으로 끌어내는 건 활동이지 알람시계가 아니야!”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우연히 태어난 존재들이다. 그리고 그 세상은 우리에게 어떠한 사명감도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니, 인생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하지 말고, 내가 나의 인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고민하다 보면 나의 사명감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지 않을까?
②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통해 철학적 깨달음을 준 철학자로 유명하다. 특히, “무지(無知)의 지(知)” 는 그를 대표하는 키워드다. 카이레폰이라는 젊은 남성이 델포이 신전을 찾아가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한 명도 없다는 대답을 듣고, 그는 이 소식을 소크라테스에게 전했다. 소크라테스는 그럴 리가 없다며 아테네에서 존경받는 모든 사람을 만나보았지만, 그들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장군은 용기가 무엇인지 몰랐고, 시인은 시를 정의하지 못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처럼 본질과 목적이 중요했다. 그런데, 어설프게 소크라테스를 흉내 내 질문하다 보면 꼰대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질문하려거든 먼저 나에게 해보고 그 답을 끊임없이 고민해 보고, 그래도 궁금하다면 그때 주변에 물어보는 것이 현명한 방법인 것 같다. 물론, 이렇게 하다 보면 문제를 해결하거나 궁금증을 해소하는 데 시간은 걸리겠지만 나중에 더 성장한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은 “모든 질문은 세상을 이해하려는 외침”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모든 철학적 질문은 나를 이해하려는 외침이 아닐까? 소크라테스도 이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③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는 철학자, 소설가, 작곡가, 정치이론가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인물이었지만, 무엇보다 그는 산책자였다. 루소는 “혼자서 두 발로 여행할 때만큼 이렇게 나 자신이었던 적이 없었다 ‘고 말할 정도로 많이 걸었다고 한다.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가르친다. 가장 느린 이동 형태인 걷기는 더 진정한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했는데, 어쩌면 자연에서 찾을 수 있는 자유의 본질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질을 찾기 위한 소크라테스식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루소처럼 자유롭게 걷는 산책의 즐거움을 독자들과 공유하는 작가의 탁월함이 돋보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나도 오늘도 그냥 걸어볼까? 그냥 걷다 보면 루소처럼 진정한 자유를 느끼지 않을까?
④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1862)는 미국의 철학자로 그의 주요 저서인 <월든>(Walden, 1854년)과 <시민 불복종>(Resistance to Civil Government, 1849년)은 지금도 고등학교 교과서에 등장한다. 소로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을 더 중시하는 초월주의자로 알려졌지만, 실제로 보이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면 눈에 보이는 실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를 더욱 중시했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것을 바로 규정하거나 정의하지 않고 기다리다 보면 더 많은 게 보일 것이라고 말한다. 무엇이든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소로처럼 우리도 눈앞에 보이는 현상과 실체를 어떤 렌즈와 프레임으로 내가 보고 있는지를 보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⑤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는 독일의 철학자로 여성 비하적 말을 자주 했는데, 소설가였던 그의 어머니의 영향 때문이라고 한다. 성공한 기업가였던 그의 아버지는 쇼펜하우어를 기업의 후계자로 키우고 싶었지만, 사회성이 부족한 아들에게 실망한 어머니는 경멸의 말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쇼펜하우어는 평생 독신으로 살며 진정한 친구 한 명 없이 쓸쓸한 인생을 보냈다. 그래서인지, 쇼펜하우어는 내면의 소리를 듣고자 음악에 심취했던 것 같다. 쇼펜하우어는 듣기란 연민과 사랑의 행위이고, 귀를 빌려주는 것은 곧 내 마음을 빌려주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 쇼펜하우어처럼 사람과의 관계를 극도로 피할 필요는 없지만, 내면의 소리를 듣고자 귀를 항상 열어두고 사는 삶의 지혜는 필요하지 않을까?
#2. 2부 : 정오에 만난 철학자들
⑥ 에피쿠로스(기원전 341년 ~ 기원전 271년)는 쾌락주의 철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그는 철학의 목적이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영위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행복과 쾌락이 어울리지 않는 단어 같지만,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쾌락은 방탕하고 무절제한 삶이 아니라 고통과 결핍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에피쿠로스는 어떤 것에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평안한 상태를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불렀다. 아타락시아는 ‘없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a’와 분쟁을 뜻하는 ‘타라소(ταράσσω)’를 합성한 말로 고통, 분쟁, 근심, 걱정 등이 없는 평온한 상태를 의미한다.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인간은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쫓아가며 삶을 보내게 되는데, 그것들을 소유하는 순간 과도한 기쁨에 사로잡혀 그 좋은 것들을 언젠가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이를 지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함으로써 결국 스스로 고통에 빠지게 된다고 보았다.
사람들은 해롭지 않은 것을 두려워하고 필요하지 않은 것을 욕망한다. (p.195)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꼭 필요한 욕망만 추구한다면 고통 없는 아타락시아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꼭 필요한 욕망이란 음식, 의복, 집 등 기본적인 욕구를 의미하고, 그 외 나머지 욕망은 필수적이지 않은 욕망이다. 물질문명과 과학기술의 발달로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지만, 요즘 들어 ‘소확행’이나 ‘미니멀리즘’이라는 말들이 유행하고 있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를 통해 소유의 관념이 때로는 우리를 눈멀게 한다는 가르침을 주기도 했다. 어쩌면, 진정한 부자는 재산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지 않을까?
⑦ 시몬 베유(Simone Adolphine Weil, 1909 ~ 1943)는 34세에 굶주림으로 인한 건강 악화에서 비롯된 심부전이라는 사망 원인 진단을 받고 불꽃같았던 짧은 삶을 살았던 프랑스의 여성 철학자다. 베유에 의하면 순수한 관심에는 남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내가 출세하고 싶어 하는 외적 동기가 묻어 있지 않고, 진정한 관심은 일종의 기다림과 같다고 주장한다. 조급함을 버리고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관심을 기울이기 위해서는 부족한 나 자신에게 관용을 베푸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⑧ 간디(1869~1948)는 우리에게 너무 친숙한 인물이다. 그의 생일인 10월 2일은 인도의 국경일이고, 국제 비폭력의 날로 지정될 정도로 간디는 비폭력주의자로 너무 잘 아려져 있다. 그런데, 저자는 간디처럼 싸우는 법을 배우라고 하니 도대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은 나를 죽일 듯이 달려들 텐데 난 폭력을 쓰지 말라고 하면 누가 간디처럼 행동할까? 간디는 일단 한 발짝 물러서라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비폭력 저항의 목표는 비난이 아니라 변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간디는 투사였다. 그는 영국과 싸웠고, 편협한 외국인 및 인도인과 싸웠지만, 그중 가장 큰 싸움은 싸우는 방식을 바꾸기 위한 싸움이었다. 현실에서 간디의 가르침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싸우는 방식을 바꾸기 위한 싸움은 꼭 필요한 싸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좀 더 확장해서 해석해 보면, 싸우는 방식의 변화는 작게는 내가 생각하는 방식일 수 있고, 직장에서 우리가 일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가 에너지를 많이 써야 하는 부분은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먼저 변화시키는 곳이 아닐까?
⑨ 공자는 소크라테스와 거의 동시대를 살기도 했지만 비슷한 점도 많은 인물이다. 두 사람 다 위치가 불안정했고, 제자들에게는 존경을 받았지만, 엘리트들과 기득권 세력에게는 불신의 대상이었다. 공자도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름으로 저서를 남기지 않았지만, 제자들에 의해 시대를 초월하는 가르침을 지금도 전해주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공자는 인(仁)과 예(禮)를 매우 중시했던 인물이다. 저자는 이를 친절로 해석한 것 같다. 공자는 친절을 훌륭한 통치의 근간으로 승격시켰고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격언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친절과 같은 가치 있는 일은 언제나 실천하기가 매우 힘들다. 그래서, 예행연습이 필요하다고 한다. 가장 좋은 예행연습 상대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들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건 내가 하는 행동이 과연 상대방에게 친절함으로 전달이 되고 있는지 항상 생각해 보고 상대방의 반응을 관찰해 보는 것이다. 어쩌면, 친절의 진정한 예행연습 상대는 나 자신이 아닐까? 그리고 나는 나에게 친절을 베풀고 있는가?
⑩ 셰이 쇼나곤은 일본 헤이안 시대에 궁녀로 살았던 여성 작가로 일본 최초의 에세이집인 ‘마쿠라노소시(베갯머리 서책)’을 지은 인물로 유명하다. 쇼나곤은 자신이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알고 자기만의 솔직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삶이 수만 가지 작은 기쁨의 총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말이 있다. 행복지수가 높은 사람은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많은 사람이라고 한다. 어쩌면 우리는 생각보다 기쁨과 행복의 순간을 많이 경험하고 있지만, 쉽게 잊어버리거나 감사해하지 않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을 수 있다. 행복은 생각보다 내 가까운 곳에 있는데 힘들게 노력해서 얻어야 하는 먼 곳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셰이 쇼나곤처럼 작은 것에 감사하다 보면 기쁨과 행복의 빈도가 높은 삶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3. 3부 : 황혼에 찾아온 철학자들
⑪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처럼 후회하지 않는 법에서 참 많은 상념이 떠올랐다. 니체는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했지만, 안정적인 종신 교수직을 그만둘 정도로 때로는 용기 있는 선택을 하기도 했다. 그러한 용기 있는 선택이 어쩌면 니체의 철학사상 중 가장 유명한 ‘영원회귀’ 때문 아닐까 싶다. 영원회귀 사상은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개념이지만, 존재하는 것이 곧 실체이고 기존의 플라톤적이고 기독교적인 서구 세계관을 거부하는 사상적 도전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영원회귀 사상에 담겨있는 깊은 철학적 의미를 나의 아주 얕은 지적 수준에서 이해하고 나니 왜 니체처럼 후회하지 않는 법으로 제목을 정했는지 알게 되었다. 어차피 우리가 똑같은 삶을 영원히 반복해서 살아야 한다면, 누가 뭐라 하든, 어떤 일이 닥쳐오든 웃고 춤추며 즐기면 그만이다. 그리고 시간이 다 되면 ‘다카포!(da capo, 처음부터 다시 한번!)’이라고 그냥 외치면 된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운명론 또는 허무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춤춰야 할 이유를 기다리지 말고 그냥 이 순간을 즐기고 기뻐하는 삶이 후회 없이 사는 방법이 아닐까?
⑫ 에픽테토스(Epictetus, 55년경 ~ 135년경)는 내면세계를 지배하면 천하무적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해야 할 일을 하되,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두라고 말한다. 이는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고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라는 스토아철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내면세계는 우리의 생각, 욕망, 감정 등을 의미한다. 이 내면세계는 우리의 의지로 지배할 수 있지만, 그 외에 많은 것은 우리의 통제 밖에 있다. 생각해 보면 내 뜻대로 이루어진 일이 지금까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간혹 내 주변에 보면 자기 뜻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어야 안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의 판단이 언제나 옳고 합리적이라는 오만한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로 바꿀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면 그 상황을 자기 뜻대로 바꾸기 위해 무리하면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런 사람들에게 에픽테토스를 소개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에픽테토스는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스스로를 바꾸는 것이 훨씬 쉽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픽테토스처럼 상황 자체에 대한 통제보다 발생한 상황에 대해 더 유연하게 대처하고 판단하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⑬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는 노화가 일어나는 이유는 타인이 내리는 문화적, 사회적 결핍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나이 듦의 문화는 없고, 오로지 나이 든 사람들이 절박하게 매달리는 젊음의 문화만 있다고 지적한다. 대한민국은 저출산 고령화 사회다. 앞으로 나이 많은 사람이 젊은 사람보다 더 많은 시대가 올 것이다. 그리고 나이 많은 세대는 예전보다 건강하게 더 오래 살 것이다. 즉, ‘well aging’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잘 늙어갈 수 있는지 가르쳐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쩌면, 잘 늙어가는 법을 이미 다양한 경로를 통해 배웠지만 이를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일 것이다. 배우고 경험해서 잘 알고 있는 깨달음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가장 잘 늙어가는 방법이 아닐까?
⑭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1592)는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이 세상 모든 지혜와 이론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이번 기차 여행의 마지막 동승자는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 미셸 에켐 드 몽테뉴 선생이다. 앞 장에서 보부아르처럼 늙는 법을 배웠다면 이제는 몽테뉴처럼 죽는 법을 배울 차례라 생각하니 무척 설렜다. 그런데 몽테뉴의 가르침은 너무 단순했다. 다른 모든 철학자의 가르침 또한 곱씹어보면 전혀 새롭지 않다. 그동안 우리가 살면서 한 번쯤 들어봤거나 배웠거나 경험을 통해 깨달았던 지혜들이다. 몽테뉴의 가르침도 마찬가지다. 죽음의 해결책은 더 긴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바로 수용이라고 말한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게 죽는 법이라는 몽테뉴의 가르침이 나에게는 사실 잔인하게 들려왔다. 얼마 전 아내가 꽤 큰 사고를 당해 재활 치료를 오래 받고 있는데, 자기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을 가까이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내가 자신의 현실을 인정한 순간부터 긍정의 에너지가 발산되는 것 또한 관찰할 수 있었다. 이처럼,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인정하고 수용하는 진정한 용기가 우리를 행복으로 안내해 주는 이정표가 아닐까?
충분히 스며들었던 철학 여행
14명의 철학자와 함께한 긴 여행을 마치고 이제 일상으로 복귀한다. 오랜만에 가져본 긴 휴가의 첫날에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사실 책 속 내용을 다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읽다 보니 2일 동안 쉬지 않고 달린 기차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느낀 점과 깨달은 점을 상기하며 기록으로 정리하는 시간은 꽤 오래 걸렸다. 14명의 위대한 사상가들과 짧은 만남만으로 그들이 들려주는 살아있는 가르침을 정리하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강렬한 느낌을 받은 몇몇 분들만 영글지 않은 나의 단편적인 생각으로 소개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소개하지 못한 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기자 다시 한 분 한 분을 찾아뵐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여러 책을 읽고 되도록 짧게 서평을 작성해 왔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비록 나의 해석이 그들의 사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누군가 이 글을 읽을 사람들에게 14명 모두를 소개하는 것이 우리 인생에 철학이 스며들게 하는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제 일상으로 복귀하면 아마 이분들과 함께했던 짧지만 울림이 있었던 여행은 잘 기억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 어느 상황에서 14명의 철학자가 던진 위대한 질문들과 현명한 답변들이 마치 좋은 사람과 함께한 여행을 추억하듯 선명하게 떠오를 때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충분히 스며들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