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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래몽상가 Oct 03. 2023

군주론

(마키아벨리 저 / 김운찬 역)

 <군주론>행 열차에 탑승하다. 얼마 전 내가 속한 조직에서 필독 고전서 12권을 선정해서 월 1회 독서 토론회를 진행하기로 했다. 오랜 고심과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통해 어렵게 12권을 선정했다. 당연히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순위에 들어가 있었다.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책들이 상당히 많아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고민되었다. 영어 또는 일본어판을 번역한 서적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이탈리아어 원전을 직접 옮긴 완역본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저자인 김운찬 교수가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셨고 그동안 이탈리아 고전을 꾸준히 번역해 왔던 분이라는 것도 책 선정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다행히 분량도 256쪽으로 많지 않아서 금방 읽을 줄 알았다. 그런데, 책을 읽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가 너무 오만했다는 생각에 깊이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김운찬 교수의 <군주론>은 마키아벨리의 사상과 의도 그리고 원전의 의미에 충실하면서 최대한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자세한 해설이 첨부되어 있다. 이탈리아어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이탈리아의 당시 역사적 배경과 정치적 상황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내가 번역의 잘잘못을 따지거나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평가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내가 오만했다는 생각이 든 이유는 다 읽고 나서 <군주론>이 왜 필독 고전서로 여전히 읽히고 있는지를 균형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 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동안 ‘권력’이라는 단어에 지나치게 예민할 정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어설프게 이 책을 완독하고 처음 든 생각은 ‘이 책은 위험하다. 악마의 책이 맞구나! 나의 세계관이나 가치관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책이구나..’였다. 그렇다면, 그동안 이 책을 읽었던 수만 명의 학자들, 필독 고전서로 선정했던 세계적인 대학들은 모두 불온서적을 읽고 가르치고 있다는 말인가?라는 극단적인 생각도 들었다.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역기서 멈춰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제대로 공부해서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래서, 시오노 나나미의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신동주 교수의 <마키아벨리 군주론>, 폴커 라인하르트의 <마키아벨리>, 김상근 교수의 <마키아벨리>, 김경준의 <지금 마흔이라면 군주론>, 삼성출판사에서 초중고 학생들을 위한 주니어 필독선 시리즈 중 <이것이 권력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를 읽었다. 물론, 유튜브 영상도 찾아보고 인터넷을 통해 중세 유럽과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역사, 군주론 관련 논문들도 검색하며 다양한 배경지식을 편견 없이 축적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난 몇 개월 동안의 이런 노력 덕분에 이제는 조금씩 마키아벨리와 <군주론>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도 만족스럽지 않은 수준이고 부족함이 많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회전 교차로를 돌고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와 읽어본 소감과 깨달은 점을 주제넘지만 공유해보고자 한다.



 한 번 읽고, 혼자서 읽고, 다 읽었다는 오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같이 읽어야 한다. 가능하다면, 권위 있는 전문가의 안내를 받으며 읽을 것을 추천한다. 여러 권의 책을 읽고 긴 여정을 마친 지금 <군주론>을 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꼭 누군가와 같이 읽으라고 조언해주고 싶다. 특히, 자신의 세계관이 다소 한쪽으로 쏠려있다고 한 번이라도 느꼈거나 주변으로부터 비슷한 충고를 받았다면 더더욱 혼자 고독하게 읽는 것은 피하기를 바란다. 물론, 어디까지나 본인의 선택이기에 강요는 할 수 없는 문제다. 하지만,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근대정치사상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데 혁명적 기여를 한 고전서로 평가받고 있는 <군주론>을 통해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독자라면 혼자보다 여럿이 읽는 것이 균형감을 유지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나처럼 관련분야를 전공하지 않았고 배경지식이 부족한 일반 독자라면 반드시 원문의 의미를 올바로 해석하고 역사적 배경을 잘 알고 있는 사람과 함께 읽을 것을 권유해 드린다. 군주론의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마키아벨리가 그만큼 인간의 본성과 정치권력의 속성에 대해 냉철한 분석을 하고 있어서 권위 있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만약, 난 혼자서도 누구의 도움 없이 이 책을 잘 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감히 오만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마키아벨리를 제대로 만나려면 자신과 주변의 현실에 솔직해져야 한다. 심리적으로 사람들은 어떤 일이 주변에서 일어지면 난 그런 일과 상관없다고 생각하거나 우리 조직에는 그럴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며 무관심하게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정말 다행이지만, 어쩌면 그런 일이 나와 우리 조직에 생긴다면 어쩌지? 하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무의식적으로 회피하고 외면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자기방어적 기질이 극한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게 생존을 위한 우리의 이기적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주론을 대할 때는 다 내려놓고 극도의 솔직함으로 무장해야 깨달음과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군주론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던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기억에 남기도 하고 직장생활을 해본 독자라면 한 번쯤 경험해 봤을 상황과 연계하여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군주론 23장은 아첨꾼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에 대해 논하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아첨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즉, 군주)에게 진실을 말해도 당신이 불쾌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시키는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마키아벨리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사람이 진실을 말하게 하면 당신은 존경심을 잃게 된다. 그러니, 나라에서 현명한 사람을 뽑고 그들에게만 자유롭게 진실을 말할 권리를 줘야 한다.” 처음에는 이 말이 충격적이었으나, 생각해 보면 직장생활을 하면서 이와 비슷한 말을 많이 들었던 것 같다. “회의에 사람들 많이 불러봤자 쓸데없는 소리만 하고, 배가 산으로 갈 수 있으니 참석자는 최소한으로 하고 발언 시간도 몇 분 내로 짧게 하라 그래….”  마키아벨리다운 충고를 보고 나니 마치 <군주론>을 읽지 않았어도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마키아벨리가 말한 대로 행동하는 사람들도 가득 찬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섬뜩했다. “군주는 언제나 조언을 들어야 하지만,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조언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입을 막아야 한다. 하지만, 군주는 폭넓게 질문해야 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진실을 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어떤 필요에 따라 착해지지 않는 한 언제든지 당신에게 사악하게 굴 수 있기 때문이다.” <군주론>이 나온 지 511년이 지난 미래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의 본성을 꿰뚫어 본 마키아벨리의 무서운 통찰력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군주론>도 미래학의 인식론과 연관시킬 수 있는 반가운 대목이 있다는 다소 억지스러운 위안을 느꼈다. 마키아벨리는 나라를 잃은 이유는 평온한 시기에 상황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 나태함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행운(Fortuna)과 역량(Virtu)을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가장 훌륭하고 확실하게 군주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나라를 지키는 일은 바로 자신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라고 충고한다. 그러면서, 제25장에서 이와 비슷한 논조를 이어가는데, 이 대목이 변화를 바라보는 미래학적 관점과 상당히 일치한다는 생각이 들어 전율을 느꼈던 부분이다.

 “행운이 우리 행동의 절반을 결정하더라도, 우리의 자유 의지가 꺼지지 않도록 나머지 절반 정도는 우리 스스로 지배하도록 놔둔다는 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마키아벨리는 행운을 물살이 거센 강에 비유하며 설명을 이어간다. “물살이 거센 강이 범람하면 모두가 달아나거나 그 기세에 굴복하고 마는데, 평온한 시기에 미리 둑과 제방을 쌓는 등의 조치를 한다면 커다란 피해를 보지 않을 수도 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행운은 역량이 자신에게 저항할 만큼 조직되지 않은 곳에서 힘을 과시하며, 둑과 제방이 준비되지 않은 지점을 알아채고 그곳에 공격을 집중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바로 이 부분이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지만 우리가 미래에 다가올 다양한 위험에 대비해야 한다는 미래예측의 목적과 일치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지만,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었던 사람은 아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마키아벨리는 이상주의에 과감하게 도전한 용기 있는 정치적 현실주의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플라톤은 철인(哲人)이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헤겔은 국가를 이념으로 구성된 하나의 절대정신으로 이해하려 했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모순에서 인간을 해방하기 위한 이상적 국가를 제시했다. 이들 모두 이상주의자들이다. 반면, 마키아벨리는 철저한 정치적 현실주의자다. 특히, 인간의 본성과 민중의 심리를 냉철한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본 마키아벨리는 15장과 17장에서 다음과 같은 직설적인 어조로 충고를 이어간다.                     

“(생략) 이론과 추론보다는 현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중략)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는 인간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라는 문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므로 현실 문제를 소홀히 하는 군주는 권력을 잃고 말 것이다.” “모든 부분에서 착한 일을 하려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다수 사이에서 파멸하기 마련이다. (15장)” “사람들은 대체로 감사할 줄 모르고, 변덕스러우며, 위선적인 데다 위험을 피하려 하고, 탐욕스럽게 이익을 얻으려고 한다. (17장)”


 두 번째 소감처럼, 솔직함이 없다면 지금 소개한 17장의 문구는 불쾌하고 경멸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을 마키아벨리처럼 냉철하고 솔직하게 들여다보면 무작정 부정만 할 수 없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17장의 내용을 보면서 한 가지 의문점이 떠나지 않았다. 엉뚱하다고 여겨질 수 있지만,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것 같아서 화두를 던져본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인간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라는 관점이 과연 근본적으로 다른가?라는 것이다. 아마도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시민들이 당시의 현실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들여다보면서 그들의 삶이 참으로 비참해 보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마키아벨리에게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데요?’라고 물어보고 싶다. 즉,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의 문제와 독립적이거나 개별적 사안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의문은 과연 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는 근본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하는 문제이다. 어디에 가치를 더 우선시하는지에 대한 차이만 존재할 뿐, 결국 현실을 대상으로 고민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점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러한 의문은 사실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관련 논문에서 제기된 질문들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군주론>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함께 읽고 입체적으로 들여다봐야만 균형감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목민심서와 군주론을 읽으며 정약용과 마키아벨리의 사상적 차이점을 비교 분석해 보는 무모한 도전을 해보고 싶어졌다. 무척 게으른 내 성격상 언제 시작할지 모르겠으나, 분명 흥미로운 주제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다행히, 이번에 선정한 12권의 필독 고전서 중 유일한 동양사상가 책으로 <목민심서>가 있어서 반강제적인 압박 때문이라도 조만간 시도할 것 같기는 하다. 아직 목민심서와 군주론을 비교한 연구 논문을 찾지는 못했다. 다만, 마키아벨리를 동양사상과 비교할 경우 대개 한비자와 많이 견주어왔기 때문에(안외순, 2013), 검색의 검색을 이어가다 보면 분명 비슷한 맥락과 논점으로 연구한 논문이 있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왜냐하면, 생각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없기 때문이다. 분명 <군주론>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대한민국의 학자나, 일반 독자 중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해보고 어딘가에 그 흔적을 기록으로 남겨두었을 것이다. 만약, 목민심서와 군주론을 직접 비교한 연구 논문이 없다 하더라도 동양사상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맹자와의 비교 연구가 있으므로, 이를 근거로 목민심서와 정약용에 대한 탐구 내용을 확장시켜 보면 흥미로운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다.



 일본의 식민통치 사상에 미친 군주론의 역할에 대해서 고민해 보고 연구해 보면 흥미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키아벨리는 제4장에서 절대 군주가 통치하던 나라를 정복하는 일은 매우 어렵지만, 일단 정복하고 나면 통치하기는 수월하다고 밝히고 있다. 반면, 국가의 권력을 군주와 군주 아래에 있는 영주들이 나누어 가진 국가는 정복하기 쉽지만, 많은 영주 세력을 통합시켜야 하므로 다스리기는 매우 어렵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로 합병하여 36년간의 식민통치를 했던 역사를 과연 마키아벨리는 어떻게 해석할까? 과연 마키아벨리는 한일합방의 수모를 당한 대한제국을 어떤 나라로 보았을까? 그리고, 당시 일본의 권력집단에게는 과연 어떤 충고를 해주었을까?라는 의문이 계속 맴돌았다.

 <군주론> 5장에서 정복한 지역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사는 것에 익숙하다면, 그들의 정치 제도를 파괴하고, 그곳에 가서 직접 통치하며, 그들의 법에 따라 살도록 내버려 두면서 세금을 거두어들이고 우호적 세력이 될 수 있도록 과두정을 구성하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마키아벨리가 제안하는 과두정이 일제 식민지 시절의 조선총독부이지 않았을까? 만약, 일본의 식민통치 사상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영향을 끼쳤다면, 마키아벨리즘의 어원을 사뭇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일본의 식민지배를 정당화시키는데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사용한 역사상 가장 잘못된 사례가 될 것이다. 이런 의문점에 대한 명쾌한 답변은 아직 찾지 못했지만, 다행히 임해성의 <말과 칼 : 시대의 질문에 답하는 두 가지 방식>이라는 책이 마키아벨리와 오다 노부나가를 비교 서술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나의 궁금증을 해소해 줄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이제는 흔들리지 않고 <군주론>행 열차에 탑승할 수 있을 것 같다. <군주론>을 처음 읽었을 때 상당한 거부감과 가치관의 혼란에 내가 이 책을 왜 읽어야 하지? 라며 몇 번이고 책을 덮고 싶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건 나의 오만함 때문이었다는 걸 깨달았고 그 순간 나는 잠시 멈추기로 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혜민 스님의 책 제목처럼, <군주론>이라는 출발지에서 잠시 멈추어 보니 내가 지나쳐 왔어야 할 여러 정거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록 오래 걸리는 긴 여정일지라도 걸음을 잠시 늦추기로 했다. <군주론>이라는 출발역에 조금이나마 준비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싶어서였다. 아직 준비되었다고 자신할 수 없지만, <군주론>이라는 열차에 탑승해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내가 흔들릴 때 잡아줄 수 있는 동지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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