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작가는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 소개가 필요 없을 것 같지만, 나만의 언어로 감히 저자를 소개하자면 ‘과학하는 철학자, 철학하는 과학자’로 소개하고 싶다. 얼마전 신경철학연구소장이신 박제윤 교수님께서 출간하신 책의 제목이기도 하고, 교수님께 개인적으로 부탁드린 강의의 제목에서 따왔다.
저자는 이 책을 과학을 소재로 한 인문학의 잡담이라고 표현한다. 매우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책 속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과학이론에 대해 유시만 작가 특유의 명쾌한 설명 이후 이를 인문학적 언어로 번역하여 문과생들도 이해하기 쉽게 들려주고 있다. 아마도 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소위 ‘운명적 문과’인 사람들은 저자의 이러한 인문학적 번역이 더 친근하게 들릴 것이다. 나도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을 때 이해한 것 같았던 내용을 막상 누군가에 설명하려고 하니 말문이 막힌다. 과학이 어려운 건지, 내가 과학적 상식이 부족한 건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공감과 울림의 잔잔함이 여전히 남아 있는 몇 개의 장면을 문과 남자의 시선에서 한번 소개해볼까 한다. 대부분 유시민 작가의 언어를 빌린 표현이다. 저자가 가진 통섭의 사유를 뛰어넘을 만한 나만의 언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1장 ⌜그럴법한 이야기와 확실한 진리(인문학과 과학)⌟에서 ‘인문학과 과학의 비대칭’은 인문학의 위기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는 인문학의 위기가 인문학자가 과학을 공부하지 않고 과학자들이 찾아낸 사실을 활용하지 않는 데서 싹텄다고 지적하면서 요즘은 인문학책이 재미없다고 덧붙인다. 요즘 내가 느끼고 경험한 것과 너무 흡사해서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문학책을 엄청나게 많이 읽었다고 자부할 순 없지만, 나름 인문학적 소양의 깊이를 넓히기 위해 독서와 사색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 말이 그 말 같다는 허무한 느낌이 자주 들기 시작했다. ‘무엇인가를 새로 아는 즐거움을 주거나 오래된 생각을 교정하도록 격려한 것은 과학책이었다’라고 한 것처럼 나도 그랬던 것 같다. 대표적인 책이 최재천 교수님의 <다윈 지능>이었다. 그전에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읽으며 “자연 앞에서 겸손하지 못한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걸 깨닫고 서평을 작성하기도 했다. 성균관대 김범준 교수님의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김상욱 교수님의 <떨림과 울림>, 이순칠 교수님의 <퀀텀의 세계>를 읽으며 내 과학상식의 반경이 조금씩 넓어지는 뿌듯함을 경험했다. 물론, 방금 언급한 책들은 전문 과학서적은 아니다. 그러나, 이책들을 통해 단순히 과학지식의 확장뿐 아니라, 과학적 사고와 추론 또는 탐구의 방법, 무엇보다 과학자의 삶과 사상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어쩔 수 없는 운명적 문과생은 아무리 과학으로 시작해도 결국 인문학과 철학으로 귀결되나 보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철학 또는 인문학적 귀결이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 아닐까 싶다.
#2장. ⌜나는 무엇인가(뇌과학)⌟에서 ‘측은지심과 거울신경세포’부분은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은 이야기로 가슴과 머리가 기억하는 장면이다. 새로운 철학적 지식과 과학적 상식을 알게 되었다는 기쁨보다, 연관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두 분야가 절묘하게 연결되었을 때 확장되는 상상의 희열 때문이었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은 맹자가 주장한 성선설의 근거가 되는 사상으로 다른 사람의 불행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뜻한다. 그런데, 저자는 이를 거울신경세포라는 뇌과학적 이론과 지식을 동원하여 입증하고 있다. 우리는 가끔 사회적 약자를 아무런 계산 없이 그냥 도와주는 사람들을 보곤 한다. 인문학적 관점에서 그런 행동을 관찰하면 ‘아! 맹자의 성선설이 맞구나. 우리에게 측은지심이라는 게 존재하는구나. 아직 이 사회는 살만하구나.’ 등등의 인문학적 사유를 한다. 그런데, 정작 ‘왜 그런 행동이 나왔을까?’라는 과학적 의문을 잘 갖지는 않는다.
거울신경세포는 타인의 행동이나 의도, 감정을 추측하여 모방하는 등 공감 능력을 담당하는 신경세포이다. 1990년대 이탈리아의 신경심리학자 지아코모 리촐라티(Giacomo Rizzolatti)교수가 이끄는 연구진이 원숭이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신경세포의 존재를발견했다고 한다. 다른 원숭이의 행동을 지켜만 보고 있는 원숭이의 뇌에서 그 행동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반응하는 신경세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맹자의 측은지심이라는 도덕적 본성의 존재와 작동 원리가 신경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놀라움에 머물지 않고 조금 더 과감한 상상을 해보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속담과 격언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고 하는데, 진짜 배가 아플까? 그래서 챗 GPT에 한 번 물어봤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해줘’라고 했더니, 아래와 같은 놀라운 답변이 돌아왔다.
“질투는 스트레스를 유발하는데, 스트레스가 증가하면 ‘싸움-도피 반응(fight-or-flight response)’이 활성화되고, 이 반응은 소화불량과 복통을 유발하는 호르몬의 분비를 촉진시킨다. 따라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은 질투라는 감정이 신체적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이로 인해 복통이나 소화불량 같은 신체적 증상이 나타날 수 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는 과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칸트와 양자역학에 관한 내용도 매우 흥미로웠다. 얼마전야심차게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라는 책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전에 김상욱 교수님의 책과 양자역학에 관한 강연 영상을 재밌게 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어설픈 과학적 지식 때문에 철학과 과학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면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집필한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칸트는 철학이라는 무대 위에 개인을 주인공으로 등단시켰고, 철학을 종교로부터 해방시킨 인물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현대 물리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는 양자역학이 왜 나오는걸까?
칸트에 의하면 우리는 어떤 사물을 감각기관을 통해 인식하게 되는데, 그 사물은 우리의 감각기관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결국 사물을 인식하는 인간의 감각으로는 그 본질을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이성과 인식 구조가 가지는 한계에 관한 칸트의 이러한 주장은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중첩의 개념과 불확정성의 원리와 매우 흡사해 보인다.
이외에도 다윈주의를 좌파와 우파라는 정치 이념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논쟁이 이루어졌던 장면들, 화학은 분명 인류의 역사를 발전시킨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부정적 느낌이 먼저 드는 억울함이 있음을 호소하고 있는 내용도 무척 신선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이렇듯 다양한 학문이 무질서하게 공존하고 있는 것 같지만, 서로가 질서를 유지하며 사이좋게 어울리고 있는 놀이공원에 놀러 온 기분이 든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처음 밝히지만, 사실 난 대학교 때 토목공학을 전공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아버지가 물리학과 교수였고, 친형은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했다. 누가 봐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과학자 집안이다. 아버지는 평생 천재들의 언어인 수학을 가지고 물질세계를 탐구하셨고, 형은 전공을 살려 대기업에 취직해 IT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나는 대학원에 진학해 ‘미래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직업군인으로 살고 있다. 하지만, 과학자의 집안에서 나 홀로 인문학의 길을 걷고 있다는게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 왜냐하면, 인문학적 상상력이 요구되고 과학적 소양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 미래학을 재밌게 공부했고, 그래서 예전보다 조금 더 성장했기 때문이다.
과학이 국가의 아젠다를 발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틀림없다.그러나, 모두가 과학자가 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우리 아이들에게 과학자가 되라고 강요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인문학적 상상력과 과학적 소양을 키우기 위한 사회적 노력과 국가적 지원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유시민 작가의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가 그런 노력과 지원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앞으로 학교에서 이러한 과학 교양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시간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정답을 맞춰서 실력보다 점수를 올리기 위한 문제 풀이 위주의 입시교육에서 아이들이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