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첫 독서모임 감상평
얼마 만에 써보는 감상평일까?
우선은 조르바라는 인물에 대해 처음엔 적대적이었다가, 나중엔 조르바라는 캐릭터 안에서 나를 발견하였고, 모든 인간은 내면에 모두 조르바를 품고 있다로 까지 생각하며 책을 읽는 나를 발견하였다.
P49. 맨 처음 조르바와 두목이 만나 함께 떠나기 전 카페에서.. 조르바가 두목에게 제안한다.
분명히 해둡시다. 나한테 강요하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이런 문제에서만큼은,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이 장면에서 나는 인간은 어딘가에 얽매임 없이 자유로울 권리가 있어야 함은 맞지만 조르바의 입장에서 그 자유는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의 의문점이 마구 생기며 앞으로의 전개 상황이 너무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던 것 같다.
p.109.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여 표현하는 조르바
우리는 영혼이라는 이름의 짐을 지고 다니는 육체라는 이름의 짐승을 실컷 먹이고 마른 목은 포도주로 축여 주었다. 음식은 곧 피로 변했고, 세상은 더 아름다워졌고, 우리 옆에 앉은 여자는 시시각각으로 젊어져, 얼굴의 주름살도 사라져 가고 있었다.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여 표현하고 있는 글들이 참 재미있다? 새롭다?라고 생각했다. 생각이랑 몸이 따로 논다는 표현은 종종 하긴 하는데 영혼과 육체라고 하니 조금 더 심오했고 육체의 욕구가 채워짐으로써 실제 육체가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혼이 아름답게 변해간다는 말을 표현한 말이 참 재미있는 하지만 매우 와닿는 구절이었던 것 같다.
p.197. 처음엔 조르바가 여자에 대해 표현하는 방식이 매우 거북하고 저급해 보여서 불편했었다.
여자에게 뭘 기대할 수 있겠어요? 한다는 짓이, 처음 만난 사내와 붙어 새끼를 까놓는 게 고작이오. 사내에게서 뭘 기대할 수 있겠어요? 사내들이란 그 덫에 걸리고 맙니다. 내 말 명심해 둬요, 두목!
그래서 읽을 당시의 해당 구절에 대한 메모도 이랬었다. -> 조르바는 왜 여자와 남자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천하게 하는 걸까? 어떠한 삶을 살아왔길래? 아니면 그냥 옛날 늙은이라서? 하지만 이 생각은 뒤로 갈수록 조르바의 다이내믹하고 자유분방하게 살았던 삶을 확인할수록 점점 이 거북함은 사라졌던 것 같다.
P.240. 조르바가 다시 광산으로 떠나려고 할 때 당시 함께 살고 있었던 쿨한 소핑카
한 달을 기다리죠. 한 달이 지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나는 자유의 몸이 됩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하느님이 축복해 주시기를!
조르바는 인생의 다양한 경험 중 조르바의 자유성을 인정하고 품을 수 있는 여자도 만나봤었고. 진짜 안 해본 게 없는 사람~
P.269. 비 오는 날 산책길의 모습을 슬픔으로 보는 두목과 그런 두목을 보고 조르바가 비를 원망하지 말라며, 이 불쌍한 비에도 영혼은 있다며 산책 중 하는 대화중.
두목, 돌과 비와 꽃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어쩌면 우리를 부르고 있는데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일지도 몰라요. 두목, 언제면 우리 귀가 뚫릴까요? 언제면 눈을 떠서 볼 수 있을까요? 언제면 우리가 팔을 벌리고 만물- 돌, 비, 꽃 그리고 사람들- 을 안을 수 있을까요? 두목, 어떻게 생각해요? 당신이 읽은 책에는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조르바의 자유분방함 그리고 울타리가 없는 생각과 어찌 보면 모든 것에 영혼을 부여하는 순수함까지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P.293 과부에게 맘을 품고 있지만, 감정을 억누르는 두목 그리고 그런 그의 앞에서 산투르를 연주하는 조르바.
내가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고, 그리고 과부와 나는 태양 아래 겨우 한순간을 살다 영원히 사라져 갈 두 마리 벌레일 뿐이라고. 한 번뿐인 인생! 한 번뿐인 인생!
조르바의 산투르의 연주 속에서 두목은 혼자서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억누르는 욕망에 대한 후회를 듣고 있다. 산투르도 조르바도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두목이 두목 자신의 한심함을 느끼고 있는 것뿐. 자신의 속마음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두목이지만 모두가 조르바처럼 행동할 수는 없다. 살아온 인생과 경험 그리고 욕망에 대한 절제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이다.
P.341. 새해를 맞아 얼굴이 똥색인 두목과 밝은 조르바
조르바는 말한다 -> 요맘때면 나는 다시 어린애가 됩니다. 나는 그리스도처럼 다시 태어납니다. 예수님은 해마다 새로 태어나지 않소? 나도 그렇지!
이 말을 듣고 두목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미적지근하고 모순과 주저로 점철된 몽롱한 반생이었다. 라며 허망한 기분을 갖는다. 조르바와 두목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P.362.
나는 모든 게 거꾸로 흘러가요. 어릴 때 나는 꼭 조그만 늙은이 같았대요. 애가 좀 아둔한 데다 말이 없었대요. 하지만 말을 했다 하면 목소리가 어른 뺨쳤다는군요. 사람들이 날더러 우리 할아버지 같다고 했죠. 그런데 나이를 먹고 몸집이 커지고부터는 앞뒤를 안 재고 날뛰게 되었지요. ~~~~ 그렇지 예순을 넘겼지만, 이걸 어떻게 설명한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내겐 이놈의 세상이 너무 작아진 것 같아요.
철이 들어서일까? 아니면 인생의 경험이 많아지면서 새롭게 경험할 것들이 작아지고 그래서 세상이 작아졌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자유롭게 살면서 자신을 보통의 사람들 보다는 억누르지 않고 살아왔기에 후회도 없고 뒤돌아 보지도 않고 계속하고 싶은 것들을 남의 눈치 안 보고 해 오면서 살아온 조르바이기에 하루하루 삶을 살아갈수록 세상이 더 작아 보이는 게 아닐까? 이 부분은 억누르고 살아온 사람들도 크기만 다르지 점점 세상이 작아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 일 것 같다.
P.411.
두목, 내 속에도 악마 같은 게 들어 있어요. 나는 그 악마를 조르바라고 부릅니다. 속에 있는 조르바는 나이 먹는 걸 싫어해요. 나이를 먹은 것도 아니고 먹어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먹지 않을 거예요.
아무리 자유로운 조르바라도 나이를 먹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인간이 억누르는 욕망이나 참는 정도나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많은 다양성과 차이를 가지고 각기각색 살아가지만 그 와중에도 늙는다는 것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고 같은 속도인 것 같다. 이 부분은 읽는데 뭔가 슬프면서 공감 가는 구절이었다.. ㅠ 새해가 돼서 인가..?
두목은 조르바와의 생활을 통해, 본인이 억누르고 살아왔던 삶을 후회하고 결국은 조르바와 같이 진행했던 프로젝트가 다 망하고 깡그리 다 날아가 버린 후에 뜻밖의 해방감을 맛보게 된다.
P.801.
외적으로는 참패했을지라도 내적으로 승리자일 때 우리 인간은 말할 수 없는 긍지와 환희를 느낀다. 외적인 재앙이 지고의 행복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런 참패 속에서 승리와 해방감, 긍지와 환희, 행복을 느껴 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내 속에 있는 악마 한 마리, 조르바와 같은 것은 모든 사람들 속에 한 마리씩 들어 있을 거다. 두목은 조르바의 삶을 보면서 꿈에서도 본인의 만족스럽지 못한 삶에 대한 악몽을 꾸게 되고 한번 사는 인생인데! 후회의 꿈도 꾼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목과 같은 삶을 살고 있을 것 같다. 누구나 다 자신의 한편에 조르바가 있고, 그 조르바를 얼마나 표출할 건지, 아니면 얼마나 숨길건지의 차이가 다 다를 것이다.
인간은 다 결국 한 줌의 흙, 진흙 한 덩어리로 돌아간다고 표현한다. 물론 종교를 믿게 되면 영혼은 또 다른 세상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육체로만 봤을 때는 정말 흙 한 줌으로 돌아가는 게 맞다. 후회 없는 삶? 산다는 것. 후회란 어디까지를 후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갈망하는 어떠한 것을 세상의 눈치를 보고 선을 지키느라 못해본 후회는 얼마나 죽기 전에 생각이 날까? 저 자유분방한 조르바가 세상에 많아진다면 그 세상은 너무 어지러워지지 않을까? 자유로운 삶과 자유로운 사랑까지 그리스인 조르바 라기 보단 자유인 조르바로 더 기억에 남는 책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