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rae Sep 04. 2023

치앙마이에서 알게 된 나의 전생

 

 나는 오늘 나의 전생을 알게 되었다. ⠀

 *⠀

 옛날 태국 정부에서는 귀족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이름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서민들은 스스로 종교적 의미가 담긴 이름들을 만들었는데 그 이름들이 하나 같이 너무 길고 어려워서 부르기 쉬운 애칭들을 하나씩 더 만들곤 했다.⠀

 그 결과 대다수의 태국사람들은 본명인 ‘츠찡’보다 애칭인 ‘츠렌’을 일상에서 더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

 나의 태국 애칭은 ‘땡모’다. ‘땡모’는 태국어로 수박이라는 뜻인데 수박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땡모’라는 어감이 재밌어서 태국친구들이 이름을 물을 때마다 농담 삼아 그걸 나의 애칭이라고 말하곤 했다.⠀

 태국친구들도 하나 같이 ‘땡모’라는 나의 애칭을 들으면 재밌다는 듯 유쾌하게 웃곤 했다.⠀

 *⠀

 오늘도 와로롯 시장 인근 카페에서 우연히 알게 된 친구 ‘다오’가 이름을 물어보길래 ‘땡모’라고 이야기하니 그녀 역시 잠시 웃더니 나에게 다른 이름을 제안하였다.⠀

 “쿤 피피 어때?”⠀

 “피피? 섬 이름 말하는 거야?”⠀

 “그래, 안다만 해의 그 섬.”⠀

 “왜 내가 그 섬의 이름을 나의 애칭으로 써야 하는 거지?”⠀

 “왜냐하면 내가 그곳을 좋아하니까.”⠀

 다오는 그렇게 말한 후 유쾌하게 웃었는데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피피’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

 내가 다시 태어났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

 *⠀

 나는 전생이 있다고 믿는다. 특별한 종교적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전생이 없다고 믿는 것보다 있다고 믿는 것이 더 재밌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오늘 나의 현생에 어울리는 이름을 가지게 되면서 ⠀

 나의 전생을 알게 되었다. ⠀

 나의 전생은 태국으로 오기 전 한국에서 살았던 날들이다. 꿈꾸던 일들을 성취해보기도 했고 좋은 일들도 많았지만 불안감과 우울감 속에서 신음하던 날들이 참 많은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오늘 다시 태어났다. 아니 나는 오늘 내가 태국으로 온 이후로 다시 태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어디에 있든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내가 어디에서 누구와 어떤 언어로 대화를 하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먹고 사는지가 삶에 참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집을 정리하고 태국으로 들어온 후로는 매일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다. 과연 태국으로 오지 않았다면 이런 행복감을 누릴 수 있었을까? 오늘부터 나의 이름은 ‘피피’다. 한국에서 쓰던 이름 또한 여전히 나의 이름이겠지만 이제 나의 삶에는 ‘피피’의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날들이 더 많을 것이다.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춥고 어두웠던 날들이 참으로 길었다. 이제 영원히 끝나지 않는 여름 안에서 살아갈 것이다. ‘피피’ 혹은 ‘땡모’라는 이름으로.

작가의 이전글 치앙마이의 물가가 주는 편안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