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이 가져온 행운: HV3
칼을 들고 나타나 우리를 식겁하게 했던 코코넛 청년과의 인연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기분 전환 삼아 바람 쐬러 나갔던 리조트 바깥 어느 공터에서 남의 차를 뒤지고 있던 그를 마주쳤다. 이튿날 오전에 해변에 나갔을 때는 첫날보다 다섯 배는 더 큰 칼을 들고 나타나 큼직한 코코넛을 자르며 우리를 위협했다.
코코넛 청년 | 마담, 어제 왜 그냥 갔어? 내가 어제 코코넛 잘라주면서 오만 원이라고 얘기했잖아, 잠깐 저쪽 간 사이에 돈도 안 내고 그냥 가버리면 어떡해? 그리고 내가 어제 똑똑히 봤어. 저녁에 리조트 밖에서 마담이랑 마이 프렌(신랑을 자꾸 'my friend'라고 불렀다)이랑 차 타고 왔을 때, 나를 봤는데도 그냥 돌아서 간 거 모를 줄 알아?
세이셸에 도착한 지 이틀 만에 무시무시한 친구가 생겨버렸다. 살면서 원하는 친구만 사귈 수 있다면 편리하겠지만, 인생은 그런 게 아니다. 원하지 않는 친구가 생기기도 하고, 그로 인해 인생이 바뀌기도 한다.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코코넛을 오만 원에 팔려고 하는 이 사람이 바로 세이셸에서의 우리 인생을 바꾸려고 하는 인연, 아니 악연이다.
신랑은 다정하게 나를 위로했다.
신랑 | 너무 놀라지 마. 자기가 그렇게 무서워하면 내가 자존심이 상해. 나 태권도할 줄 안다고.
큰 위로가 되기는 했지만, 자꾸 칼을 들고 나타나는 코코넛 청년을 떠올릴 때마다 섬뜩섬뜩했다. 다음번엔 더 큰 칼을 가져오거나 나무 뒤에 숨어 독화살 같은 것을 쏠 것만 같았다.
리조트 프런트에 가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우리 방으로 경찰을 보내 주었다. 경찰이 우리 방에 찾아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이야기해 달라고 했을 때, 나는 생애 처음으로 그렇게 긴 영어를 했고, 경찰은 내가 하는 이야기를 토시 하나 빠뜨리지 않고 보고서에 적었다. 든든한 우리 신랑은 마치 '경찰 2'인 것처럼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입이 아직 풀리지 않아 영어를 할 수 없다고 했다.
경찰이 다녀간 후, 리조트 내에서 무료로 운영하는 다이빙 클래스를 듣는 중에 관리자 중 한 사람이 우리를 찾아왔다. 동그란 눈에 푸근한 몸매를 한 직원이었다. 코코넛 청년을 해변에서 체포해서 경찰에 넘겼는데, 그 자가 맞는지 얼굴을 확인해 달라고 했다.
앨리슨 | 안녕하세요, 저는 앨리슨(Alysen)입니다. 리조트의 관리자로서 두 분이 당하신 일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아까 경찰에게 설명해 주셨던 이야기를 토대로 인상착의가 비슷한 남자를 붙잡았습니다. 경찰에서 이야기하기론, 그 남자가 신고된 것이 처음이 아니라고 합니다.
앨리슨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앨리슨 | 두 분이 얼굴만 확인해 주시면, 경찰에서도 그 사람이 더 이상 그렇게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액션을 취할 수 있게 됩니다. 죄송하지만 경찰서에 함께 가서 얼굴을 확인해 주시겠어요?
코코넛 청년과 얼굴을 마주치게 되면 그가 우리에게 악감정을 가질 수 있으니, 직접 마주치고 싶지는 않았다. 앨리슨은 절대 얼굴을 마주칠 일 없이 철창 밖에서 몰래 확인만 하고 경찰에게 알려주면 된다고 했지만, 막상 경찰서에 가 보니 얼굴을 마주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결국 경찰서에 잡혀 있는 코코넛 청년에게 면회라도 간 듯 얼굴 인사를 하고 온 셈이 되었다. 애써 평정심을 찾으려 해 보아도 상황은 악화된 것이 분명했다.
경찰서에서 리조트로 돌아오며 나는 울상이 되었다. 따뜻하고 신뢰감 있는 얼굴로 우리를 설득하여 경찰서에 데려간 앨리슨에게 이렇게 얼굴을 마주치게 하면 어쩌느냐고 따져 물었다.
앨리슨: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얼굴을 확인해 주셨으니 저 사람을 경찰에서 붙잡아 둘 수 있게 됐어요. 전혀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귀국 일정은 어떻게 되시죠? 참고할게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기는커녕 심하게 걱정이 되었다. 무슨 일을 치르고 온 건지 정신이 아득해졌다. 처음 마주쳤던 충혈된 눈과 손에 들린 날카로운 칼, 밤중에 남의 차 안쪽을 샅샅이 뒤지다가 우리에게 비췄던 손전등 빛, 다음날 다시 해변에 나타나 들고 있던 칼 중 가장 큰 칼을 휘둘러 코코넛을 자르며 중얼거리던 목소리... 모든 게 생생한데 걱정하실 필요가 없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앨리슨은 방에 데려다줄 테니, 잠시 쉬라고 했다. 짐을 싸 두면 본인이 리조트 차원에서 남쪽 해변에 있는 우리 숙소를 북쪽 해변의 숙소로 옮겨주겠다고 했다. 리조트가 워낙 크니, 해변을 옮기면 그나마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이 계속 흘렀다. 앨리슨은 우리와 헤어지며 30분 정도만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한 시간- 두 시간- 시간은 정처 없이 흘러 오후 3 시를 넘기고 있었다. 점점 화가 났다. 두 시간이 좀 넘었을 때 인내심이 바닥난 나는 전화를 걸어 앨리슨에게 다시 따졌다.
나 | 경찰서에서도 코코넛 청년의 얼굴을 마주치는 일이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 하더니 딱 마주치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30분만 기다리라더니 두 시간이 넘게 기다리게 하다니! 이 나라 사람들은 늘 이렇게 이랬다 저랬다 하는가 보네요. 여기 사는 사람들이야, 한 시간이건 두 시간이건 별 차이 없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온 우리는 세이셸에서의 1분 1초가 아까운 사람들이에요, 우리의 귀한 시간을 이렇게 낭비하면 안 되지 말입니다.
앨리슨 | 기다리게 해서 정말 죄송해요. 짐은 다 싸셨나요? 숙소 청소를 급하게 하느라고 예상보다 시간이 더 걸리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최대한 빨리 하고 있어요.
이십 분 정도가 더 지난 후에 앨리슨이 우리 방 문을 두드렸다. 반갑긴 했지만, 웃을 기분은 아니었다.
앨리슨이 데리고 온 또 다른 직원이 우리가 싸 둔 짐을 챙겨 먼저 출발했고, 우리는 앨리슨의 버기(Buggy_리조트 내에서 타고 다니는 전기차, 최고 속력 20km 정도) 뒷자리에 탔다. 앨리슨은 운전하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앨리슨 | 코코넛 청년은 더 이상 신경 쓰지 마세요, 경찰이 당신들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감옥에 붙잡아 두기로 했어요. 그리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청소를 이제 막 시작해서 오래 걸렸지만, 이제 안전한 곳으로 옮겨 드릴 거예요, 허니문에 가장 걸맞은 곳이죠. 절 믿으세요, 정말 좋으실 거예요!
앨리슨은 약간 흥분한 것 같았다. 기분도 좋아 보였다. 그녀는 최선을 다해서 기대감을 심어 주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경찰서에서 한 번, 시간 약속에서 한 번 우리를 실망시킨 후였다. 전혀 믿음이 가지 않았다.
버기를 타고 가면서 생각을 좀 정리해 보았다. 만일 여기가 한국이었다면 코코넛 청년은 트럭에 수박이나 파인애플을 쌓아 두고 손님들에게 맛보기 용 조각을 잘라 먹여주며 장사를 하는 사람이었을 지도 모른다. 순수하게 생계의 일환으로 고객에게 다가왔을 뿐인데 우리가 수영복만 입고 누워있는 상태에서 마주치다 보니 괜히 크게 놀랐을지도 모른다. 만일의 경우 그 어떤 반격을 취할 수 없는 자세였고, 우리가 있는 이 곳이 아프리카라는 사실에 미처 익숙해지기 전에 만난 흑인 청년이라 괜히 예민하게 군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오히려 조금은 미안해졌다. 순간, 시뻘겋게 충혈된 눈과 썸뜩한 칼날이 떠올랐지만, 애써 지워버렸다. 그 사람 하나 때문에 이제 막 시작된 신혼여행을 망칠 수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앨리슨의 버기는 한참을 달렸다. 남쪽 해변과 수영장만 겨우 몇 번 이용해본 우리는, 리조트가 그렇게 큰 지 조차 모르고 있었다. 시원하게 달리던 깨끗하고 정돈된 오솔길이 갑자기 좁아지고 오르막이 시작됐다. 공기까지 상쾌한 산길을 달려 올라가는데 왠지 느낌이 이상했다.
설마 여기... 여기는...?!
앨리슨이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에필리아 리조트에 단 여덟 채뿐인 풀빌라 - 힐사이드 뷰였다. 하룻밤 숙박비가 이삼백 만원을 호가하는 곳이다. 평생 바라지도 못해봤을 가격이고, 막상 들어가 보니 몇 백 만원을 내도 아깝지 않을 법 한 멋진 풍경을 품고 있는 방이었다.
산을 올라가면서도, 방에 들어서면서도 믿기 어려웠지만, 빌라 안으로 함께 들어와 안내해 주면서 앨리슨이 다시 한 번 이야기 하자 믿을 수밖에 없었다. 실내가 워낙 넓어서 왜 청소가 오래 걸렸는지도 이해하게 되었다.
앨리슨 | 두 분이 겪은 일은 진심으로 유감스럽습니다. 우선 남쪽 해변에서 그런 일을 겪으셨으니 북쪽 해변으로 옮겨 드렸습니다. 원래는 해변 근처의 숙소로 옮겨드릴 계획이었지만 마침 오늘 이 방이 비게 되었어요. 급하게 청소하느라 예상보다 오래 기다리시게 한 점도 죄송해요. 그렇지만 이 방은 정말 허니문에 딱 어울리는 방이랍니다. 가장 안전하기도 하고요!
앨리슨은 푹 쉬라고 다시 다정하게 이야기해 주면서, 함께 타고 온 버기의 열쇠까지 건네주고 방을 떠났다. 잠시 후 이 방의 담당 매니저를 보낼 테니, 그 사람에게 궁금하거나 필요한 내용을 이야기하면 도와줄 거라고 했다.
신혼여행을 망쳐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세이셸이 싫어지려고 했는데-
갑자기 집도 생기고, 차도 생겨버렸다!
코코넛 청년과의 악연이, 우리에게 들이닥쳤던 불행이, 행운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