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결정하기
우리의 결혼 이야기는 신혼여행지 고민에서부터 시작된다. 처음에는 남 프랑스로 가려했다. 잘 아는 이탈리안 친구가 매 년 가족 여행으로 다녀오는 곳이라며 소개해 주었는데, 르와르 밸리_Loire Valley를 따라 늘어져 있는 고성들이 그렇게 아름답고 사랑스럽단다. 카라반을 빌려 여행하면서 숲 속에서 잠들어도 되고, 호텔처럼 개조해서 숙식이 가능한 고성(古城)도 있으니 며칠은 그런 곳에서 지내도 될 거라 했다.
거의 마음을 정했을 때, 상견례 날짜가 다가왔다.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시간. 양가 모두 개혼이었다. “저희가 처음이라..” 가 몇 번 반복된 후 결혼 날짜 이야기가 나왔고, 8월 정도가 언급되며 ‘가급적 빨리’라는 의견을 내시기에 ‘올 해는 넘기지 않겠다’고 진땀 속에 대답한 후 마무리되었다.
인생은 ‘언제, 어디로 갈까?’를 결정하는 수많은 과정의 연속이다.
이제 내 인생은 어디로 가는가? 결혼으로 간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서른이 넘도록 '결혼'이란 것을 안드로메다의 일처럼 여기던 내가 갑자기 사랑에 빠져 사귄 지 100일 된 남자에게 프러포즈를 받고 결혼을 하는 거다. “응, 그러자!”하자마자 삼사 개월 만에 유부녀가 되자니 문득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획 세우기 좋아하는 내가 차분하게 앉아 결혼식을 위해 처리해야 할 일들을 다이어리에 적고 그릴 시간, 신혼집을 알아보고 도면을 그려 혼수용품을 배치해 볼 시간, 결혼하기 전에만 할 수 있는 일(그 일이 무엇인지는 몰라도)을 할 시간이 필요하다. 적금 하나는 내년 1월 말에 만기다. 적어도 이 적금은 만기를 채워야 할 것 같았다.
"내년 초에 식을 올리는 건 어떨까?" 하는 나의 물음에 신랑은 고개를 떨구며 자신의 체력이 그때까지 남아 있을지 걱정된다고 했다. 당시 신랑은 본가(신월동)-회사(선릉)-나의 회사(홍대)-우리 집(북아현동)까지 오가며 매일 서울을 한 바퀴씩 도는 동선으로 하루 평균 3시간의 수면시간을 이어가고 있었다. 신랑의 체력과 우리에게 허락된 휴일을 감안하여 결정된 결혼 날짜는 11월 21일 - 신혼여행지로 잠정 결정해 두었던 남 프랑스도 겨울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추운 겨울에 바들바들 떨며 여행을 할 수는 없었다. 신혼여행지를 다시 물색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다른 준비보다 신혼여행 준비가 모든 것의 우선이었음은 인정한다. 누군가 그랬다. 결혼의 클라이맥스는 신혼여행이라고. 우리는 이제 한 팀이 되어 클라이맥스를 향해 간다.
우리는 서로가 좋아하는 것에 이견은 없지만 움직이는 스타일이 다르다. 나는 결론과 성과가 있는 회의를 좋아하고, 신랑은 느그적 느그적 여유 있는 대화를 좋아한다. 나는 계획 세우기를 좋아하고 신랑은 무슨 일이든 자연스럽게 흐르듯 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깔끔하게 딱 마무리된 것이 좋지만 신랑은 끝인지 시작인지 모르게 애매하고 뭉뚱그려진 상태를 잘 견딘다.
이번 주 토요일: 신혼여행지 결정하는 날
신혼 여행지를 결정하기로 한 그 토요일, 홍대의 어느 다락방 같은 카페에 마주 앉았다. 사실 어디로 가도 좋을 것 같았다. 이 다락방에 어깨를 닿고 앉아 있듯이 한국의 깊은 시골 어딘가에 꼭꼭 숨어 속닥거리다 와도 좋을 것 같았다. 우리가 생각하는 신혼여행지의 조건을 이야기해 보기로 했다.
푹 쉴 수 있을 것
재미있을 것
아름다울 것
특히 ‘아름다울 것’ 에는 조건이 있었다. 아름다운 여행지는 수 없이 많지만 사람이 쌓아 올린 건물, 돈을 주고 친절을 사는 서비스 등과 같이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은 우리의 '아름다움' 기준에서 탈락이다. 원래의 아름다움, 가급적 하나님이 만드신 태초의 것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는 세상으로 가서 깊이 빠졌다가 오고 싶다. 진정한 쉼 속에서 자유롭게 다니며 물놀이도 하면서 속삭이다 오는 것이 우리가 생각한 아름다운 신혼여행이다.
몰디브, 하와이, 동남아, 피지, 유럽... 머리를 5cm로 맞대고 마주 앉아 전 세계 지도를 훑어보다가 우리의 시선이 동시에 멈춘 곳은 바로 세이셸이다. 세이셸은 우리가 꿈꾸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데이비드 베컴과 오바마 대통령의 휴양지로 알려져 있고, 가지각색의 개성을 가진 115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곳에서만 자란다는 식물에서부터 온갖 새들로 가득한 섬, 리조트 딱 하나만 있는 섬, 심지어 무인도도 있다. 맑은 인도양의 색감이 환상이다. 바다 깊은 곳에 서식하는 동식물들이 땅 위의 사람들만큼 풍요로워 보인다.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세이셸은 우리를 끌어당겼다. 해변가에 작은 오두막 하나만 얻어 며칠 지내고 와도 충분할 것 같은 곳이라는 느낌이 왔다. 그곳에서 타잔과 제인이 되어보리라.
느낌은 확실했지만, 이 곳은 고급 휴양지로 정평이 나 있는 듯 보였다. 검색되는 세이셸 신혼여행 패키지는 쉽게 돈 천 만원을 호가했다. 게다가 정보가 부족했다. '세이셸'로 검색되는 책도 단 한 권뿐이었고 여행기 보다는 숙소 정보나 관광지 안내서뿐이었다. 그럼에도 패키지 상품을 이용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우리는 일단 여행지를 땅땅 결정한 후 상쾌하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방법은 나중에 고민하기로 하고 말이다. 하나씩 하면 된다.
우리가 어디로 갈지, 어떤 방법으로 갈지 하나씩 정하는 과정이 어쩐지 앞으로 평생 이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결혼하기 전에 신혼부부들이 가장 중요하게 연습해야 할 것은 서로 의견을 나누고 조율하는 과정이다. 처음에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사소하고 구체적인 생각을 나누며 차이를 좁혀가는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의 저자는 "삶은 문제와 고통의 연속이다"라 했지만, 부부간에 발생하는 대부분의 문제와 고통은 이 과정을 통해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 하나 흘리지 않으려는 욕심 많은 내 성격과 마음 넓은 남편 덕에 우리는 앞으로 우리가 갈 방향에 대해 늘 토론한다. 치사해 보일지라도 사소한 이야기를 즐겨 나누면서 좌로 갈지 우로 갈지 결정한다. 하나씩 결정할 때마다 한 걸음 걷는 기분이 든다.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