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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dden Designer Apr 26. 2021

#9 기획자가 디자인 프로세스를 알면 생기는 효과

4400만 원 용역이 780만 원으로. 이유는 명확했으나 평가는 박했다.

어느 회사, 어느 업종 불문하고 현장 경험, 실무 경험은 이후 관리자가 되기 위한 발판으로 중요하게 생각되는 편이다. 이전에 카드사에 있을 때도 카드 상품 실무 그리고 출시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현직인 항공업에서도 현장 근무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입사하자마자 공항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데(물론 코로나로 인해 휴업 중이긴 하지만) 일을 하다 보면 "실무/현장을 알아야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님을 많이 느끼는 편이다. 하지만 기획 업무를 하다 보면 '디자인'관련 경험은 실무와 깊숙이 연관됨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간과되고 상대적으로 가벼운 업무로 여겨짐을 느낀다.


B2B 회사가 아닌 이상 디자인은 상당 부분 소비자들에게 상품 그 자체뿐만 아니라 회사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인지라 상당히 윗선으로부터 의사결정을 받지만 말 한마디에 빠르고 쉽게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다 보니 그에 대한 평가는 효과에 대비하여 빈약한 편이다. 이번 글은 제목 그대로 나의 '디자이너 경험'이 어떻게 회사에 역할을 했고 그 평가가 어떠했는지 그 사례를 적어보고자 한다.




디자이너를 그만두고 기획자로 일을 하면서 디자이너와 일하거나 디자인 관련된 일을 할 때면 다음과 같은 원칙 하에 일을 했었다.


디자이너에겐 :

1. 아이디어를 요청하지 않는 이상 요구사항은 추상적으로 전달하지 않는다.

2. 수정 사항은 명확하게 전달한다.


의사결정권자에겐 :

1. 의견을 추상적으로 피력하면 조금이라도 구체적인 생각을 꺼낼 수 있게 질문을 한다.

2. 각각 안의 장점과 단점을 전달함으로써 의사결정을 내릴 때 참고가 될 수 있도록 한다.(결국엔 자기 마음이긴 하더라)


카드사 입사 첫해 그해 말이었다. 내가 담당한 상품은 프리미엄 카드답게 제휴사만 국내외 150여 업체... 매년 1월 1일 기준으로 신규 제휴/제휴 종료되고 경우에 따라 제휴 업체의 혜택 제공 매장 또는 혜택 조건이 변경되면서 이를 정리해서 회원들에게 알려주는 책자와 바우처가 함께 나갔다. 매년 디자인을 바꾼다는 것은 회사 입장에서 불필요한 과도한 비용이기에 미적인 요소의 개편은 거의 없이 내부 내용을 수정하고 통일되지 않은 표현을 올바르게 맞추거나 분류 체계를 새로운 원칙에 맞춰 개선하는 정도로 진행되곤 했다.


디자인 용역을 진행할 업체를 선정하는 데 있어서 놀랬던 부분이 계약의 규모였다. 디자이너로 일할 때 백만 원 단위 알바만 해도 크게 느껴졌던 나에게 기존의 4400만 원짜리 계약은 이래서 대기업인가 보다 싶었는데 견적에서 눈에 띄었던 부분이 '창작료' 항목이었다. 즉 미적인 요소에 대한 용역료가 전체 견적의 절반 이상이었다. 근 3-4년간 같은 업체에서 진행을 하면서 미적인 개편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관련 비용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어느 정도 이해는 됐다. 설령 디자인 개편이 없다고 하더라도 내용을 바꾸고 하는 과정에서 추상적인 표현으로 요청이 들어오다 보니 한번 수정으로 끝날 일이 서너 번 넘게 진행되고, 가끔씩은 급하다는 이유로 예측 불가능한 야근을 하게 되고... 디자인 업체 입장에서는 그와 관련된 보상을 원했을 테고 역시 돈만큼 달콤한 보상은 없었을 것이다.


다만 내 기준에서는 수정사항이 명확하게 전달된다면, 그리고 디자이너의 스케줄도 같이 고려해서 작업이 진행된다면 앞선 '창작료'는 필요하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즉 제휴업체, 의사결정권자의 의견을 조합해서 수정 사항을 전달해야 할 내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크게 느꼈다. 따라서 견적서를 간소화하여 수정 용역비, 인쇄 검수비 두 항목으로 맞추고, 수정 용역비의 경우 전체 제작물의 쪽당 단가로 맞춰 입찰에 응하도록 했다. 각 제작물마다 규격이 달랐고 어떤 쪽은 수정 자체가 들어가지도 않지만 어떤 쪽이 수정이 되고 어떤 쪽이 수정되지 않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기에 그런 것들까지 다 고려해서 단가를 계산하도록 각 업체에 요청했다.


기존 업체는 패닉이었다. 그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견적을 손 보니 얼마나 속이 쓰렸을까. 캐시카우를 놓칠 수 없기에 수정하는 것이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지 몇 번이고 어필했는지... 한때 같은 업계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마음이 아픈 것은 사실이었지만 지나치게 많이 비용이 나갈 필요는 없다고 느꼈고 나 또한 어차피 중개를 해야 하는 입장에서 내가 역할을 잘하면 충분히 줄일 수 있는 금액에 대한 불만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신규 업체와 780만 원에 계약을 했다. 줄인 금액만 따져보아도 당시 내 연봉의 절반이 훌쩍 넘게 절약했다. 수정 요청에 있어서도 불협화음은 없었는데 무엇보다도 내가 디자이너로 일했던 경험들이 많이 작용해 직접 수정하는 일은 없었어도 업체 입장에서 우려했던 것보다 수정사항이 매우 적었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단지 나는 위의 원칙만을 지켰을 뿐이다. 제휴 업체가 애매하게 요청을 해도 내가 한번 해석을 하고 수정을 전달했고, 반대로 수정된 사항을 보고할 때에는 항상 왜 그렇게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들어갔다. 진행은 신속했고 결과는 깔끔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나의 평가는 다른 이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어쩌면 당시 신입이었기에 내가 어필이 부족했을 수도 있고 반대로 신입이었기에 평가자 분들이 중요한 평가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한해에도 비용이 몇천억 단위로 움직이는 회사에서 고작 몇천만 원 절감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디자인 경험'을 실무에 적용시켜 효과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내겐 가장 아쉬운 부분이었다.


많은 기업들이 과거와는 달리 다양한 경험을 요구하는 시대이다. 신입사원을 준비하는 취준생들은 어떻게든 '경험'을 쌓으려고 발버둥 치고 힘들게 입사를 한 후에도 '경험'을 쌓으라는 명목으로 이런 일도 시키고 저런 일도 시키지 않던가. '디자인'도 그 여러 경험 중에 하나다. 충분히 어느 업종의 회사에서든지 기여할 수 있고 정성적 역할뿐만 아니라 수익성 개선이라는 정량적인 역할까지 할 수 있다. 여태껏 기획자로 살아온 디자이너로서 다양한 경험 중에 극히 일부의 사례에 불과하지만 디자인 전공자들의 디자이너 직함을 달지 않더라도 이 세상 곳곳에 보이지 않는 역할들을 하고 헛된 공부를 하지 않았음을 알았으면 좋겠다.


'디자인 경험'도 후한 평가를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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