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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Dec 24. 2023

2023년의 해외영화 10편

올해가 어떤 한 해였는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한국영화의 위기와 관계없이) 영화의 죽음을 재차 이야기했고, 누군가는 그것과 관계없이 영화를 계속 만들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로 시작해 <아쿠아맨과 로스트 킹덤>으로 끝난 올해를 기점으로 할리우드의 '유니버스' 체제가 끝을 맞이해간다는 인상 뿐이다. 혹은 '바벤하이머'라는 어처구니 없는 밈으로 여름시장의 쌍끌이 흥행을 완수해낸 <바비>와 <오펜하이머>를 이야기하며 같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두 영화 모두 여러 면에서 실망스럽고 형편없었다는 점이 애석할 뿐이다. 작년 연말결산 때 20세기 영화인들의 죽음을 이야기한 만큼, 올해는 그저 고다르의 '유작'을 만나볼 수 있는 한해였다고 기억될 것만 같다. 


영화의 죽음과 같은 이야기가 돌아다니는 지금 노년의 거장들과 젊은 감독들 사이의 차이가 흥미롭게 다가온다. 스필버그, 에리세, 스코세이지와 같은 1940년대생 감독들은 작년 한해 동안 세상을 떠난 1930년대생 감독들을 바라보며 느낀 위기감 같은 것을 영화에 녹여낸 것만 같다. 다른 한편으로 젊은 감독들은 여전히 광대하고 풍부한 광맥으로 남은 영화가 "죽으려면 멀었다"는 듯이 그것을 소생시키고자 노력하는 것만 같다. 다분히 영화광적인 취향을 전면에 내세운 채 30~40대 젊은 세대가 지닌 노스탤지어를 소환해내는 몇몇 작업들, <스크림 6> 같은 장르영화부터 <킴스 비디오> 등의 다큐멘터리에까지 광범위하게 포진해 있는 영화들을 떠올리게 된다. 2023년이 다 지나가는 시점에서 두드러지는건 오히려 '영화의 위기'보다는 'OTT의 위기'가 아닌가 싶어진다. 넷플릭스와 디즈니+를 비롯한 플랫폼들은 요금 상승과 광고요금 도입 등의 방법을 쏟아내고 있고, HBO Max의 실패 덕분인지 워너브라더스는 파라마운트와의 합병 루머에 시달리고 있다. WGA와 SAG-AFTRA의 파업은 일단 승리로 끝났지만 그 이후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물론 이 이야기들은 할리우드의 것이지만, 위로부터의 붕괴를 상상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여전한 복잡함 속에서 올해도 여기 저기서 이런 저런 영화들을 봤다. 올해 관람한 해외영화 중 10편을 꼽아보았다. 단편과 장편을 구분하지 않았고, 극장개봉 및 영화제나 기획전 등에서 첫선을 보인 신작들로 꼽았다. 가나다순으로 나열했다. 참고로 올해 이전에 관람하여 이전 리스트에 포함된, 가령 <당나귀 EO>,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3000년의 기다림> 등의 작품들은 포함하지 않았다.


1. <결코 존재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 장 뤽 고다르 2023

작년 조력자살로 세상을 떠난 장 뤽 고다르의 (공식적인) 마지막 작품. 생로랑의 후원을 받아 제작된 작품으로, 찰스 플리스니어의 소설 [가짜 여권(Faux Passeports)]의 영화화를 시도하던 과정에서의 생산물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용된 텍스트, 메모, 회화, 영화, 사진, 포스터 등 다양한 시각적 재료를 콜라주해오된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이 작품은 제목처럼 '예고편'이라기보단 '스토리보드'처럼 다가온다. 다시 말해 콜라주된 이미지들이 영화로 만들어지기 이전의 단계의 몽타주로 남은 것만 같은 모양새다. 20분의 러닝타임 중 초반 5분 동안 사운드 없이 스토리보드 이미지들만을 보여주던 영화는 고다르의 음성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는 여느 영화에서처럼 자신의 음성으로 이 영화의 몽타주를 이야기한다. 그가 내뱉는 문장과 단어들은 이미지에 덧붙여진 또 다른 단어-이미지로서, 콜라주 및 몽타주된 것들 사이에 개입하는 또 다른 항으로서 작동한다. 영화의 영어제목에는 '가짜전쟁(phony war)'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가짜전쟁은 1939년 9월~1940년 5월 사이,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영국의 선전포고 이후에 있었던 대치상태를 일컫는다. 이 시기 각국의 군대는 전선을 형성했지만,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전투 없는 전쟁, 그러니까 '가짜전쟁'. 예고편조차 되지 못한 이미지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을테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하지만 지금의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마치 가짜전쟁처럼) 영화의 전(前)존재이자 영화 자체이며, 영화라는 관념이 스크린 위에 관류하는 순간이다.

2.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로라 포이트라스 2022

영화는 낸 골딘의 생애를 두 가지 축으로 분리해 씨실과 날실처럼 엮어간다, 라고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대체로 이야기하고 있다. 여섯 챕터로 나누어진 영화는 실제로 그렇게 느껴진다. 하나의 축은 낸 골딘이 설립한 처방전중재조직 P.A.I.N.(Prescription Addiction Intervention Now)이 옥시코딘을 팔던 퍼듀 사,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새큘러 가족과 벌이는 투쟁이다. 다른 하나는 11살 때 겪은 친언니의 자살부터 70년대말~80년대의 뉴욕 언더그라운드 활동, 그리고 80년대말~90년대 Act Up 등과 함께한 에이즈 관련 활동 등이 연대기 순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두 가지 활동은 낸 골딘이라는 키워드로, 마약, 성, 질병, 우울증, 폭력, 연대, 공동체 등을 사진에 담아온 그의 예술적 삶을 담아낸다. 낸 골딘은 자신과 주변인들을 찍은 사진을 슬라이드쇼의 형태로 공개해왔다. 영화 속에서 낸 골딘이 직접 증언하는 것처럼, 슬라이드쇼는 사진, 음악, 그리고 (사진에 담긴 이들을 포함하는) 관객들의 대화와 소음 등으로 구성된다. 영화는 "성적 종속의 발라드(The Ballad of Sexual Dependency)"를 비롯한 낸 골딘의 슬라이드쇼를 포함한다. 아니, 이 슬라이드쇼는 앞서 이야기한 두 축을 포괄한다.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는 인물의 서로 다른 두 시간대를 교차하며 한 인물의 상을 그려내는 익숙한 다큐멘터리의 문법보다는 슬라이드쇼를 중심으로 낸 골딘의 생애 속 순간들을 새로이 배치해보는 형식에 가깝다. 영화에서 슬라이드쇼가 나오는 장면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인터뷰(이 인터뷰 '장면'은 따로 등장하지 않고, 오로지 슬라이드쇼와 함께 음성으로만 등장한다)와 영화의 음악 슈퍼바이저로 참여하기도 한 낸 골딘의 선곡은, 과거 그의 슬라이드쇼 전시의 형식을 스크린에 옮겨 보려 한다. 때문에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는 위대한 작가의 전기도, 그가 경험하는 현재진행형의 사건의 기록도 아니라, 그가 오랜 시간 지속해온 작업 자체의 영화화이자 빼곡하게 덧붙여진 각주다.

3. <사적인 영화> 자나이나 나가타 2022

감독은 16mm 영사기를 테스트하기 위해 중고 필름을 구매한다. '사적인 영화'라는 제목의 필름은 한 백인 가족의 여행을 담은 홈 무비이며, 이미 한 차례 편집된 영상이다. 감독은 자막을 통해 그러한 상황을 설명한 뒤 19분 분량의 영상 전체를 보여준다. 국립공원의 야생동물, 휴양도시의 풍경, 원주민 부족 마을, 백인들의 파티 등이 스쳐 지나간다. '사적인 영화'를 한 차례 보여준 감독은 영화의 세부를 하나하나 구글링하기 시작한다. 구글번역과 텍스트를 읽어주는 시스템은 훌륭한 영화적 도구가 된다. 데스크탑 필름의 형식으로 영상의 탐구과정 전체를 담아내는 이 영화는 결과적으로 영상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밝혀내지 못한다. 다만 1960년대 백인 가족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여행하며 촬영한 이 영상이, 당대의 아파르트헤이트가 작동하던 정치적 순간들을 담아내고 있음이 점차 드러난다. 탐사과정 중 발견한 유튜브 영상의 댓글은 인종 격리 정책이 폐지된 지금에도 아파르트헤이트는 지속적인 문제임을 드러내기도 한다. 같은 공간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는 댓글들, '아파르트헤이트의 설계자' 헨드릭 베르부르트가 유명 주술사와 맺었던 관계 등이 19분의 짧은 영상 속에서 추출된 이미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실들이다. 어떠한 경로로 60년대 남아공의 영상이 2022년의 브라질로 향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사적인 영화'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이 작은 영상은 구글 시대의 고고학적 대상이며, 온라인상의 무수한 서비스들은 스크린이라는 발굴현장 위에서 만족스러운 발굴도구로 기능한다. 발견된 사실을 흥미롭게 배열하는 익숙한 '파운드 푸티지'의 방식을 넘어, <사적인 영화>는 푸티지의 세부를 발굴해낸다.

4. <쇼잉 업> 켈리 라이카트 2022

어떤 영화는 자신이 가진 것을 쉬이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오레건의 아름다운 풍경도, 예술에 관한 치열한 고민도, 어딘가 갈등이 있는 듯한 가족의 과거도 이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어쩌면 이 영화는 자신이 어떤 영화인지를 철저히 숨기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예술에 관한, 가족에 관한, 직업에 관한, 일상에 관한, 친구에 관한, 동물에 관한 것임과 동시에 그것을 벗어난다. 영화는 종종 프레데릭 와이즈먼의 카메라 같은 필치로 예술학교의 학생들을 관찰한다. 도예, 조각, 회화, 섬유공예 등 다양한 방식으로 예술품을 생산하는 학생들, 카메라는 얼핏 기계적으로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맹렬한 그들의 일상을 기록한다. 평화로워 보이는 예술학교에 일상에 불안감을 도입하는 것은 리지의 존재 자체다. 아니, 영화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은 채 그에게서 벗어나지 않는다.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는 다분히 평화로운 일상은, ‘리지’라는 개인에게 집중하자 미묘한 투쟁의 장으로 변화한다. 이 투쟁의 장은 사실 보잘것없다. 리지는 완전히 자리 잡은 작가가 아니다. 어쩌면 그의 사정은 예술학교의 다른 학생들보다 나아 보인다. 아버지는 도예를 하던 예술가고, 어머니는 학교 행정실에서 일한다. 자신도 어머니를 따라 행정실에서 일하며 생계를 꾸린다. 예술적 재능이 없는 것도 아니라서, 학교에 새로 부임한 강사는 그의 작품을 마음에 들어 한다. 집주인으로 있는 친구의 집은 리지의 아버지와 남동생이 수리한 것으로, 그 덕분에 값싼 월세로 살아간다. 이 영화는 리지의 예술적 실천, 작가적 열망, 그것을 얻기 위한 쟁투를 담아내려 하지 않는다. 예술, 가족, 친구, 생계, 동물, 모든 것은 비슷한 비중으로 리지의 삶 속에서 다뤄진다. 그러니까 이 애매한 정도의 삶, 자리 잡은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 해나가고 있는 삶, 프로라기엔 부족하지만 아마추어라 불리기엔 인정받는 시기, 어쩌면 예술과 연관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많은 이들이 경험하는 중간단계가 이 영화의 중핵이다. 고양이를 쓰다듬던 손은 그 고양이가 공격했던 비둘기를 쓰다듬는 손이 된다. 핸드빌딩으로 작품을 만들어가던 손은 행정실의 컴퓨터로 사무를 보는 손이 된다. 리지의 몸, 특히 리지의 손은 그가 일상을 영위하는 방식이자 삶을 둘러싼 불안감 하나하나를 어루만지며 감각하는 매개체로 작동한다. 라이카트에 따르면 <쇼잉 업>은 “천재라는 개념을 해체하는(deconstructs the idea of a genius)” 영화다. 리지의 개인전 오프닝에 온 아버지는 자신이 영감을 받는 순간을 떠벌리지만, 그곳에 전시된 리지의 작품들은 하루하루 일상을 견뎌내며 연마된 기술의 결과물이다. 예술가가 예술에만 매진하는 모습을 담아내던, 돈을 벌기 위해 다른 노동을 하는 예술가들을 어딘가 안쓰럽게 바라보던 시선들을 이 영화는 해체한다. 라이카트의 영화적 여정, 정착과 떠돎, 연대를 바라며 내미는 손길, 사랑과 우정이 노동과 맺는 관계를 이야기해온 라이카트는 이번 영화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5.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요아킴 도스 산토스, 저스틴 톰슨, 켐프 파워스 2023

멀티버스만큼 순식간에 지겨워진 소재도 없을 것이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도 예외는 아니다. 이 영화 또한 미겔 오하라의 입을 통해 자신만의 멀티벌스 설정을 풀어놓는다. 다만 MCU 멀티버스의 무수한 '변종'중 단연 흥미로운 사례는 마일즈 모랄레스다. 극장용 영화로는 <뉴 유니버스>를 통해 처음 소개된 이 캐릭터는, 피터 파커와 전혀 관계없는 인물이 스파이더맨으로 거듭난 사례다.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이 특이사례에 주목한다. 전작에서 스파이더맨으로 거듭난 그는 멀티버스의 존재를 알고 있으나, 다른 멀티버스로 접근하는 방법을 모른다.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짧은 시간 동료들과 함께했던 그는 이번 영화에서 스파이더 소사이어티의 임무에 휘말린다. 미겔은 각각의 멀티버스가 ‘위대한 거미줄’인 스파이더버스로 연결되어 있다고 파악하고, 각각의 스파이더맨들이 각성을 위해 겪어야 하는 캐논(canon, 공식설정)이 붕괴되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캐논의 종류는 관객이 앞서 보았던 여러 스파이더맨의 사례들이다. 방사능 거미에게 물리기, 벤 삼촌이나 메이 숙모의 죽음, 친밀하게 진해던 경찰서장의 죽음 등.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마일즈의 존재 자체가 캐논을 벗어난다는 지점이다. 마일즈가 물린 거미는 그가 사는 지구-1610이 아니라 킹핀의 입자가속기를 통해 넘어온 지구-42의 거미이며, 그렇기에 스파이더맨이 될 운명이 아니었던 마일즈가 스파이더맨이 되고 지구-1610의 피터 파커가 사망했다는 것이 미겔의 설명이다. 전작이 멀티버스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그리고 가까운 사람-삼촌의 죽음을 통해) 스파이더맨으로 거듭나는 마일즈의 이야기였다면, 본작은 캐논이 아닌 마일즈가 스스로를 캐논에 기입하는 이야기다. 스스로 마일즈의 ‘숙적’이라 떠벌리고 다니는 삼류 빌런 스팟은 멀티버스와 캐논이라는 소재를 흥미로운 방식으로 반영한다. 무수한 웜홀을 발사하며 힘을 소진한 스팟은 오로지 흰 피부만이 남는다. 다만 그의 피부는 온전히 하얗기만 한 것은 아니다. 백지에 옅은 인물 선만 그려진 듯한 그의 모습은, 캐논은 물론 코믹스 자체가 그려지기 이전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 스스로 소형 입자가속기를 만들고 그 속으로 들어가 힘이 강해진 이후 스팟의 묘사는 펜선만 있는 그림 콘티와 혼란스러움 그 자체인 낙서 사이의 놓여 있는 것만 같다. 다시 말해, 스팟은 캐논에 속하지 못한 마일즈가 자신만의 캐논을 쓸 수 있는, 기존의 캐논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대신 새로운 캐논을 그려나갈 수 있는 백지가 된다. 그럼으로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모두가 피로감을 호소하는 멀티버스라는 소재를 단순히 카메오 잔치를 벌이며 과거의 명대사와 명장면을 재현하는 팬서비스의 영역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2대 OOO으로 불리는 슈퍼히어로 영화/드라마/애니메이션이 쏟아지는 와중에,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멀티버스를 경유하여 앞선 세대의 유산을 성공적으로 극복 및 계승해 낸다.

6. <애스터로이드 시티> 웨스 앤더슨 2023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인물들은 지박령이다. 각자의 이유로 ‘소행성의 날’ 행사가 열리는 날 이곳을 찾은 이들은 갑작스러운 외계인의 출몰과 그로 인한 프로토콜의 발동으로 인해 일주일간 발이 묶인다. 인구 87명의 마을에 발이 묶인 이들은 일종의 구경거리가 된다. 누구의? 외계인 출몰 소식이 외부에 폭로되자 몰려든 구경꾼들은 바리케이드가 쳐진 마을 바깥에 작은 유원지를 만들어낸다. 웨스 앤더슨의 강박적인 스타일이 만들어낸 아웃사이더들의 유토피아가 으레 그렇게 다뤄지듯이. 또 하나의 구경꾼들은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일 것이다. 그렇기에 웨스 앤더슨은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극 중 극으로 꾸며낸다. 사실상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창작에 관한 페이크 다큐멘터리나 다름없다. 그런 이유로 영화 속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무대 밖의 배우이며, 그들은 연기하는 영화 바깥의 배우들은 1인 2역을 맡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연기하는 것은 무대 위의 지박령, 창작의 지박령들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감독의 전작 <프렌치 디스패치>처럼 구성된다. 후자가 잡지의 형식을 영화로 끌어왔다면, 전자는 극본의 형식을 따른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극본이 쓰이고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까지의 과정이 담긴다. 호스트의 진행을 따라 등장하는, 일종의 TV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 연극 ‘애스터로이드 시티’ 제작기는 이 영화 자체가 연극의 프리뷰 쇼와 메이킹 필름이 교차되며 결합된 형태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교차는 연극 창작 자체가 일종의 주술적 행위임을 폭로한다. 때문에 어기를 연기하는 존스 홀이 여러 개의 문을 열고 나가는 장면, 특히 각본에서 삭제된 캐릭터인 아내를 연기했어야 했던 배우와 마주치는 순간은, ‘애스터로이드 시티’라는 이름의 음모론이 켜켜이 쌓아 올린 겹들을 뚫고 나가 그 바깥을 마주하는 것이다. 그렇게 맞이한 바깥은, 그들이 왜 강박적으로 창작에 몰두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것이 알려주는 것은 단지 그 바깥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배우들이 집단최면에 걸린 것처럼 슐츠버그의 말을 반복하는 것도, 연극 공연기간 내내 백스테이지에서 생활하는 슈버트의 이상한 방식도, 호스트의 말을 따라 묘사되는 각본가의 이미지와 존스 홀의 캐스팅 비화도, 그 모든 것은 창작이라는 제의를 신성화하는 것에 할애된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라는 황당한 연극은 어떻게든 무대 위에 올려진다. 심지어 존스 홀이 잠시 문(들)을 열고 나가 바깥과 접촉하는 사이 콜사인을 놓쳤음에도 공연은 진행된다. 대역의 존재는 그야말로 극과 음모론의 존재 방식, 엄연히 존재하는 구멍을 전혀 다른 무언가로 메꿔버리고 넘어가는 것과 다름없다. 같은 평면 위에서 살아가지만 서로 다른 시공간에, 서로 다른 현실에서 살아가는 것. 비록 갑자기 달궈진 버너에 손을 얹는 것처럼 의미를 이해할 수 없더라도 이 현실들은 기묘한 방식으로 공존하고 있다. 라고 웨스 앤더슨은 <프렌치 디스패치>에 이어 주장하는 것만 같다.

7. <영화의 사도들> 아자부-아자부 2022

탄자니아에는 영화산업이 자리잡지 못했다. 물론 영화가 제작되고 영화관이 존재하지만, 할리우드를 비롯한 해외의 영화가 정식으로 수입/배급되거나 자국영화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다면 탄자니아 사람들은 어떻게 영화를 보는가? <영화의 사도들>은 해적판 DVD를 판매하는 사람, 그러한 DVD를 상영하는 '방'을 운영하는 사람, 그리고 외국어로 된 작품을 '번역'해주는 DJ를 담아낸다. '해적질'이니 불법이며 나쁜 행위 아니냐고? 물론 영화산업의 시스템이 긍정적으로 작동하는 곳이라면 그러한 논리는 타당하다. 하지만 탄자니아는 그렇지 못하다. DVD라는 물리매체를 통해 탈법적으로 유통되는 영화들은 영화가 상영될 물리적인 조건을 필요로하고, 이는 영화관이 아닌 다른 장소, '영화방'이라 부를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요구한다. 영화를 번역하는 DJ들은 그러한 공간에서, 마치 과거의 변사처럼 영화를 해설한다. 물론 이 번역은 영화의 내용에 대한 (의도적인) 오역과 의역을 포함한다.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문화를, 전 지구적 대중문화산업이 만들어낸 모종의 계급적 하위문화를 형성한다. 이는 한편으로 탄자니아의 자국 영화를 재발견하는 계기로 작동한다. DJ의 해설이 덧입혀서 새로운 관객 앞에서 상영된 <만가미지>는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영화의 사도들>는 단 16분만에 그 모든 풍성함을 기록한다.

8. <존 윅 4> 채드 스타헬스키 2023

시리즈를 잠시 복기해보자. 채드 스타헬스키와 데이빗 레이치는 왕년의 액션 스타 키아누 리브스를 기용해 B급 액션영화를 만들었다. 은퇴한 킬러/경찰/특수요원/군인 등을 잘못 건드렸다 복수당하는 이야기는 수 없이 많다. <존 윅>은 그러한 영화 중 한 편이었다. 최고회의라던가 맹세의 표식 같은 세계관의 개념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콘티넨탈 호텔은 단순히 킬러들의 휴식장소 정도로만 묘사되었고, 킬러 사이에서 통용되는 직업상의 규칙과 화폐 등이 존재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유일한 세계관 설정이다. <존 윅: 리로드>와 <존 윅: 파라벨룸>은 획기적으로 세계관을 넓혔다. 최고회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뉴욕을 벗어나 로마와 카사블랑카 등으로 로케이션이 넓어졌다. 2편의 엔딩에서 호텔의 룰을 어긴 존 윅은 3편이 시작되자마자 최고회의에게 쫓기는 몸이 된다. 3편의 존 윅은 자신을 노리는 모든 이들과 맞서 싸운다. 최고회의 산하의 거의 모든 조직이 그를 노리는 상황 속에서 그는 살아남기 위해 움직인다. 이 과정을 보여주는 방식은 전작과 완전히 차별화된다. 전작이 총기중심의 전형적인 할리우드 액션 스타일을 선보였다면, 2편과 3편은 넓어진 세계관만큼 다양한 액션의 방식을 도입한다. <존 윅 4>는 지난 두 영화에서 최고회의의 규율에 발이 묶여 있던 존 윅이 최종적인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이야기다. 앞선 두 영화가 끝맺음 없는 도주만을 담아냈다면, 이번 영화는 문자 그대로 끝을 향해 달려간다. 때문에 이 영화가 취하는 전략은 액션영화의 역사를 종합하려는 2, 3편의 시도를 답습하는 대신, 지난 세 편의 <존 윅>을 종합하는 시도로 선회한다. 영화 후반부 40여분 간 펼쳐지는 파리에서의 액션 시퀀스는 가히 압도적이다. 존 윅이라는 캐릭터가 지난 세 편의 영화를 거치며 보여준 액션의 거의 모든 것이 40분 동안 펼쳐진다. 1편과 3편의 장면들을 연상시키는 길거리에서의 총격전을 지나, 키튼이나 해롤드 로이드의 슬랩스틱 액션을 연상시킴과 동시에 2편 초반의 카센터 장면이 떠오르는 개선문 장면이 등장하고, 존 윅의 등장을 알린 자택에서의 액션과 2편의 카타콤 장면을 뒤섞어 놓은 듯한 폐건물에서의 액션, 222계단에서 벌어지는 처절한 혈투까지, 관객이 <존 윅> 시리즈에 바라던 모든 것을 40분 동안 퍼붓는다. 이 모든 것을 지나, <존 윅 4>는 서부극적인 피날레를 향해 달려간다. 채드 스타헬스키가 <존 윅 4>에서 시리즈의 종합이라는 시도 외에 욕심을 낸 부분은, 기어이 사막에서 말을 타고 질주하는 존 윅의 모습을 담아냈다는 지점뿐이다. 오랜 시간 복수를 위해 달려온 존 윅에게 필요한 것은 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내를 온전히 애도할 자유였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그는 너무나도 먼 길을 돌아왔다. <존 윅 4>는 지극히 서부극적인 마무리로 존 윅의 여정을 일단락한다. ‘액션영화’는 광대한 장르임과 동시에 강력한 클리셰들이 영화의 어떤 확장을 막아서는 경향을 보여준다. <존 윅 4>는 작가주의적인 방식으로 액션영화를 변주하거나 다른 장르와 혼합하지 않는다. 이 영화가 뒤섞은 장르는 오로지 액션영화의 하위 장르들뿐이다. 액션영화라는 거대한 맥락 안에서 무수한 하위 장르들이 ‘존 윅’이라는 이름 아래 뒤섞인 혼종이 이 시리즈의 정체성이다. 이번 영화는 그러한 정체성의 영화를 한계치에 다다를 정도의 밀도로 가득 채운다. 당분간 이런 액션영화는 보지 못할 것만 같다.

9. <파벨만스> 스티븐 스필버그 2023

주인공 새미에게 영화는 연출할 수 있는, 일종의 통제 대상이다. 새미가 촬영하고, 직접 고안한 특수효과를 도입하고, 연기를 디렉팅하고, 직접 편집하고, 상영까지 하는 모든 과정에는 새미의 손이 개입된다. 새미의 카메라 앞에서 새미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었던 유일한 존재는 가족이다. 가족은 종종 새미의 통제에 따라 연출된 촬영의 대상이 되어주지만, 캠핑영화의 사례처럼 언제나 통제의 대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족은 발견의 대상이다. 영화는 새미가 가족을, 눈으로 목격하지 못했으나 카메라가 대리하여 목격한 가족의 어떤 모습들을 발견하게끔 해준다. 때문에 캠핑영화를 본 미치가 새미에게 건넨 말, “나를 정말로 볼 줄 아는구나”은 다층적인 의미로 새미에게 충격을 건넨다. 베니와의 관계가 캠핑영화의 시선(과 편집)에 녹아 있었다는 이야기인가? 한때 예술가였던 미치의 모습을 아름답게 담아냈다는 의미인가? 화목한 파벨만 가족(과 베니)의 모습을 가장 진실되게 담아냈다는 의미인가? 새미는 카메라의 외설성을 견디지 못하고 카메라를 팔아버리지만, 카메라는 외설의 대상인 베니를 통해 강제적으로 되돌아온다. 새미에게 카메라는 일종의 분출구였으나, 어느새 진실을 폭로하고 왜곡할 수 있는 장치로서 되돌아온다. 때문에 새미는 가족이 아닌 베니를 통해 카메라를 돌려받는다. 피아노 치는 미치와 펜을 흔드는 버트의 숏들 이후 새미가 편집하는 장면이 나열된 것은 새미-영화-가족이라는 독특한 삼각구도의 몽타주다. 이 구도 속에서 새미의 콤플렉스는 해소되지 못한다. 새미는 <파벨만스>의 마지막까지 영화소년일 뿐이다. 어머니의 불륜, 아버지의 이직으로 인한 잦은 이사, 부모의 이혼. <파벨만스>는 영화소년이 어떻게 영화의 신이 되었는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의 신이라고 불리지만 언제까지나 소년이고 싶은 노장 감독의 이상한 욕망이 결부된 이야기다. 스필버그는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영화, 즉 의도치 않게 촬영된 이미지를 발견하거나 의도치 않은 반응을 이끌어냈던 두 영화를 통해 새미가 영화의 성질을 깨우치는 과정을 담아냈다. 이 과정은 스필버그의 완벽한 통제 속에서 영화화됐다. 스필버그는 자신을 영화화한다. 이 속에서 새미는 영웅도, 성인(聖人)도, 성인(成人)도 아니다. 그는 그저 영화 만들기를 좋아하는 소년이다. 이 소년은 성정과정 속에서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프로타고니스트가 아니다. 스필버그는 새미의 카메라 앞에서 촬영되던 사람들과 같은 위치에 새미를 놓는다. 새미는 가브리엘 라벨이 연기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어린 스필버그를 연기하는 배우가 된다. 이 배우가 맡은 역할은 소년 스필버그이며,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소년일 뿐이다. 이 소년은 영화의 외설성, 관음증적인 면모, 기적이자 흑마술인 편집을 배운다. 마침내 자신의 우상인 존 포드를 만나는 순간에도, 만남을 마치고 스튜디오를 나서는 순간에도 그는 소년이다. 오로지 영화의 마지막 순간만이 새미의 형상이 감추고 있던 스필버그의 존재를 드러낸다. 때문에 <파벨만스>는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노장의 노스탤지어 가득한 영화라든가, 영화(혹은 할리우드)에 관한 애정(혹은 애증)을 듬뿍 담은 아름다운 영화가 아니다. 스필버그는 여전히 새미 같은 소년이고 싶은 사람임과 동시에 자신이 영화에 행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때문에 애교 섞인 장난처럼 보이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도리어 <죠스>나 <우주전쟁>만큼이나 무섭고 매혹적이다.

10. <클로즈 유어 아이즈> 빅토르 에리세 2023

빅토르 에리세가 31년만에 내놓은 새 장편영화. 극 중 극 <작별의 눈빛>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영화 촬영 중 실종된 배우 훌리오를 찾는 과정을 담아낸다. 1990년에 제작중단된 영화에서 갑작스레 2012년의 마드리드로 점프하는 영화는 <작별의 눈빛>의 감독이자 소설가인 미겔을 쫓는다. '미제사건'이라는 TV쇼의 요청으로 사라진 훌리오에 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한 그는 옛 동료와 친구, 훌리오의 딸 등을 만난다. 촬영이 중된된 영화를 다룬다는 점에서, 후반부를 완성하지 못한 에리세의 <남쪽>을 떠올릴 관객도 많을 것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지극히 사적이며 또 가장 감동적인"이라는 부산영화제 프로그램노트의 표현처럼 다가온다. 에리세가 장편영화를 만들지 않던 시기 영화는 필름에서 디지털로 헤게모니가 넘어갔다.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하고 관람하는 환경 모두가 변화했다. '영화에 관한 영화'로서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그 시기에 관한 회고담처럼 다가오는 부분이 있다. 물론 여기서 그쳤다면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노감독의 평범한 회고담에 그쳤을 것이다. 이 영화의 흥미로운 지점은 실종된 훌리오에 있다. 그는 미남 스타로 불리며 여러 역할을 맡아왔다. 다양한 배역을 맡아온 훌리오는 그 속에서 자신을 분산시킨다. 그의 딸 아나는 "아빠의 얼굴은 낯선 사람 같았지만, 통화하던 목소리는 아빠임을 알 수 있었다"라는 내용의 대사를 말한다. 훌리오의 얼굴은 훌리오를 지칭하는 것임과 동시에 그가 아닌 다른 존재였으며, 그의 주변인에게 그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얼굴이 아니라 다른 것(이를테면 목소리나 소지품)이었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미겔의 페르소나와도 같았던 동료이자 친구 훌리오를 영화 자체에 대한 페르소나로 지목한다. 에리세는 훌리오가 경함한 기억상실과 방향상실을 현재의 영화라고 판단한 것만 같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시네마 천국>을 연상시키는 오래된 극장에서 진행된다. <시네마 천국>이 검열로 잘려나간 영화를 보며 형성된 어떤 공동체, 그리고 목격하지 못했던 장면들의 모음을 되돌려주며 시네마의 힘을 믿는 영화였다면,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그러한 영화의 마술적인 힘을 믿는 영화는 아니다. 다만 영화는 여전히 그럴 힘을 가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다. 다소 상투적이고 올드한 느낌을 주는 이야기인데다가, 오프닝에 나온<작별의 눈빛>의 수려한 완성도와 영화 마지막에야 등장하는 <작별의 눈빛>의 빈곤함이 대비되서 다소 김빠진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겠다. 다만 그것이 중요할까? "드레이어 이후에 사라진 영화의 기적"이라는 것을 21세기에 재차 믿어보고자 하는 미겔의 얼굴은, 마치 신앙을 믿는 무신론자의 얼굴 같다.


+그 밖에 흥미로웠던 영화들

<6번 칸> 유호 쿠오스마넨 2021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미야자키 하야오 2023

<던전 앤 드래곤: 도적들의 명예> 존 프란시스 데일리, 조나단 골드스틴 2023

<로알드 달 단편선> 웨스 앤더슨 2023

<마지막 것들> 데보라 스트라트맨 2023

<어파이어> 크리스타인 페촐트 2023

<이블 데드 라이즈> 리 크로닌 2023

<인간 육체의 꽃> 헬레나 위트먼 2022

<인류의 상승 3> 에두아르도 윌리암스 2023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너무 놀큰 기대는 말라> 라두 주데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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