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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an 08. 2024

2024-01-08

1. 종강하고 나서 오히려 학기말보다 잠을 못 자고 있다... 딱히 뭘 하는건 아닌데 불면이 더 심해진 것 같다. 방학이어도 이것저것 할 일들이 산재해 있어서 그런 것일까. 여튼 방학을 맞아 극장과 전시, 게임으로 가득 채운 2024년 첫 주를 보내고 있다. 


2. 한 주 동안 세 편의 개봉(예정작)을 봤다.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에 대해서는 딱히 덧붙일 말 없다. 그의 마지막 공연을 스크린을 경유해서나마 접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외계+인 2부>와 <노량: 죽음의 바다>도 봤는데, 따로 글을 적을만큼 뭔가 할 말이 없다. <외계+인 2부>는 1부의 떡밥들을 회수하느라 정신없이 전개된다. 이안(김태리)의 내레이션으로 앞의 이야기를 요약해준 뒤 시작되는 영화는, 다른 최동훈식 멀티캐스팅 영화들과 달리 이안이라는 인물을 사실상의 원톱으로 내세운다. 무륵(류준열)의 첫 등장이라던가 부채에 동물을 넣고 다니는 도술 등에서 <전우치>를 셀프-레퍼런스 삼는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는데, 그것의 연장선상에 <외계+인>이 놓인다. 다만 <전우치>는 조선시대와 현대를 완전히 다른 세계로 격리시킴으로서 '현대로 넘어온 조선시대 도사'라는 컨셉을 이어간 반면, <외계+인>은 고려시대와 현대를 유기적으로 이어내려다가 그 세계 자체를 납득시키는데 실패한다. 장풍과 무술이 등장하지만 우리가 흔히 아는 무협의 세계도 아니고, 고려의 경제중심지인 벽란도가 배경임에도 공권력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도 등장하지 않는다. 고려시대는 그저 과거 중 하나로서 소환될 뿐 그것이 영화가 그려내려는 세계와 연동되지 않는다. <전우치>가 과거와 현대를 분리해내며 일종의 초능력 활극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했던 것과 달리, 너무 많은 설정들이 충돌하면서 세계 자체의 생생함을 확보하지 못한다. 그 위에서 신검을 노리는 이들의 혈투이건, 다양한 액션과 VFX이건, 두 신선의 코미디이건, 그 무엇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1부에서 펼쳐진 전개를 하나의 이야기로 통합시키는 당연한 과정이 이 영화에 대한 호평이 될 수도 없다. 2부는 당연히 해야할 과정을 보여주며 그 과정은 1부와 마찬가지로 느슨하고 형편없으며 지루하다.


3.  <노량: 죽음의 바다>는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만큼 잔뜩 힘이 들어간 모양새다. 150여분의 러닝타임 중 앞의 한 시간은 패색이 짙어진 왜가 철군령을 내리자 전쟁을 얼른 마무리하고 싶어하는 조정과 명, 이에 반대하며 완전한 항복을 받아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순신(김윤식) 사이의 정치극으로 그려진다. <한산: 용의 출현>도 그랬지만, 김한민의 장기는 드라마가 아니다. <명량>부터 <노량>까지의 세 작품 모두 본격적으로 전투에 돌입하기 전까지의 이야기를 통해 이순신이 어떤 인물인지 그려내고자 하는 데 실패한다. 이순신이 영웅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불멸의 이순신> 같은 대하드라마 포맷이 아니라면) 불가능에 가깝다. 때문에 김한민은 이미 '성웅'인 이순신과 그의 선택들에 리액션하는 주변인들을 보여준다. <명량>에서는 구루지마(류승룡), <한산>에서는 와키자카(변요한), <노량>에서는 명 수군 도독 진린(정재영)과 왜의 시마즈(백윤식) 등. 이순신이 백의종군했던 시기와 전투 자체가 극적이었던 <명량>이 그나마 입체적 인물로서 이순신을 그려냈다면, <한산>과 <노량>에서의 이순신은 그저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인물일 뿐이다. 영화는 성웅에 대한 어떤 재해석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태도로 그를 그려낸다. 주변인들은 동료로서 그에게 탄복하거나 패장으로서 그를 두려워하고 인정할 뿐이다. 세 영화를 가로지르는 '진주인공'이라 할만한 인물은 아무래도 준사일 것이다. 오타니 료헤이와 김성규가 연기한 이 인물은 왜군임에도 "의(義)를 위한 전쟁"이라는 이순신의 말에 탄복하며 그의 부하가 된 인물이다. 그는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바라보는 감독 혹은 관객의 위치에 가장 알맞은 인물이며, 그의 선택들은 이순신이라는 인물 앞에서 취할 수 있는 반응들의 집합이다. 즉 '이순신 3부작'이 "의를 위한 전쟁", 즉 불의에 항거한다는 의미에서의 싸움을 중심에 둔다고 할 때, 준사는 이순신을 넘어서 '의'에 충성하는 인물에 가까웠다. 세 영화에서 이순신은 육화된 '의'이며 준사는 그 신봉자이다. <노량> 후반부의 피비린내나는 싸움, 특히 조선 수군 병사에서 조선 장수, 왜군 병사로 이어지는 롱테이크는 그 테마를 꽤나 확고하게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롱테이크의 끝에서 이순신의 칼에 쓰러지는 왜군 병사의 모습, 특히 롱테이크가 이순신의 칼질과 함께 끊어진다는 지점에서, 해당 장면은 재차 성웅에게로 카메라를 가져간다. <노량>은 결국 이순신의 죽음으로 끝나야 한다. 영웅이 아니라 성웅이 되어야 한다. 3부작은 그렇게 뭔가 다른 해석의 여지를 스스로 끊어내 버린다. 


4. 종강하고 한 첫 게임은 인섬니악의 [마블 스파이더맨 2]였다. 전작을 즐겁게 플레이하기도 했고, 크레이븐 더 헌터와 베놈이라는 상반된, 다른 한편으로 최상위 포식자가 되고자 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두 빌런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게임플레이에 관해서는 크게 이야기할 거리는 없다. 두 전작과 큰 차이가 없기도 하거니와, 새로이 추가된 베놈의 능력이나 비행능력 등은 아주 인상적이지 않다. 다만 플레이가 조금 더 편리해진 부분이 있다고나 할까. 영화판 스파이더맨의 오랜 팬으로서, 이 게임의 흥미로움은 이야기 자체에 있다. 어쨌거나 내러티브를 직접 체험하게 하는 것이 내리터브 게임의 중심을 차지한다면, 그 흔한 멀티엔딩조차 제시하지 않는 이 이게임은 도대체 어떤 매력을 주는가? 게임제너레이션에 실린 이명규 필자의 글은 이 게임의 이야기가 얼마나 매력적인가를 설명한 바 있지만, 나는 다른 스파이더맨 내러티브와 함께 놓고 이야기해보고 싶다. 영상화된 모든 스파이더맨 작품을 통틀어 가장 성공한 MCU의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이야기는 (크로스오버 이벤트 같은 것을 빼고 말하자면) 결국 빌런의 갱생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스파이더맨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마블 세계관에 몇 안 되는 불살주의자로서의 스파이더맨은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적들을 생포하며, 경찰 등과의 공조를 통해 그들을 래프트(Laft)라는 슈퍼빌런 감옥(MCU에서는 <시빌 워>에 등장한 바 있다. 게임에서는 뉴욕 한복판에 있다...)에 수감시킨다. 다만 7편의 실사 스파이더맨 영화에서 '생존'한 빌런은 샌드맨과 벌처 뿐이다. 그렇기에 <노 웨이 홈>의 스파이더맨은 죽음 직전의 상황에서 MCU의 세계로 이동해온 멀티버스의 빌런들을 살리고자 노력한다. 이제 막 대학입시에 뛰어든 어린 청년에게 자신으로 인해 (아무리 빌런일지라도) 상대방이 죽는 것은 받아들이기도 어렵거니와, 정의롭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영화는 그 과정을 담아내기 위해 무려 다섯 명의 빌런을 소환하고, 두 명의 스파이더맨까지 데려온다. 하지만 이 게임은 그것을 멀티버스 같은 피곤한 설정 없이 소화해낸다. 크레이븐은 최상이 포식자가 되기 위해 슈퍼히어로와 슈퍼빌런을 죽이려 한다. 스파이더맨은 한때 적이었으나 수감 및 갱생하여 살아가는 빌런들을 크레이븐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노력한다. 다른 한편으로 베놈이 등장한다. 코믹스와 영화에서는 그린 고블린 혹은 뉴 고블린이 되었던, 피터 파커의 절친 해리 오스본이 베놈이 된다. 코믹스 특성상 다양한 베놈과 스파이더맨이 존재해왔지만, (내가 아는 한) 해리가 베놈이 된 것은 처음이다. 이 파격적인 선택은 피터의 선택들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와 팀으로 활동하게 된 마일즈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미스터 네거티브를 맞닥뜨리지만, 크레이븐 및 베놈과 얽힌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그를 용서하고 서로를 이해한다. 물론 이야기만 늘어놓는다면 좀 더 깔끔한 버전으로 <노 웨이 홈>의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것처럼만 느껴진다. 이 이야기가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 나왔다면 그것이 역동적인 스펙터클이 될 수는 있겠지만 대단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되진 못했을 것이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노 웨이 홈>이 경험한 난관, 나아가 마일즈 모랄레스를 소개하는 과정을 "캐논 쓰기"라는 방식을 통해 풀어냈다. 그와 유사하게, [마블 스파이더맨 2]는 플레이어를 그 과정에 개입시킴으로서 두 대형 빌런의 충돌과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의 정의로움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낸다. 아니, 그 과정을 플레이어-관객에게 설득시키는 데 성공한다. 선형적인 내러티브일지라도 플레이어가 개입되지 않으면 그 이야기는 진행되지 못한다. 이 게임은 내러티브 게임의 가장 기초적인 전제를, 특히 스파이더맨 같은 초거대 IP와 동기화시키는 방법을 영리하게 풀어낸다.


5. 마침내 [발더스 게이트 3]를 하고 있다. 60시간의 플레이 끝에 3막에 도달했고, 오린과 고타쉬 사이를 오가는 중이다. 인간-드루이드를 택했고 섀도하트, 카를라크, 아스타리온을 데리고 다니는 중이다. 2막의 초반 즈음까지 진행했을 때 비슷한 시간을 플레이한 친구와 대화하던 순간이 흥미로웠다. 분명 같은 지역과 NPC를 만났는데, 그 친구와 내가 경험한 모험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TRPG가 게임의 목표와 세계관을 제시할 뿐 그것의 내용을 플레이어가 채우는 것이었다고 간단하게 정의해본다면, ([발더스 게이트 3]는 두 전작 및 라리온 스튜디오의 [디비니티] 시리즈를 해보진 못했지만) 그것을 CRPG로 가장 완벽하게 이식해온 작품이 아닐까. 그러한 지점에서 이 게임의 완성도는 가히 충격적이다. 자잘한 버그나 플레이의 불편한 지점, 예컨대 카메라의 시점이라던가 겹쳐진 대상을 제대로 클릭하기 어렵다거나 인벤토리 화면의 불편함 등이 있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개인적으로 턴제 전투를 선호하지 않음에도 이 게임의 전투가 지닌 '손맛'의 중독성은 대단하고, [엑스컴] 시리즈처럼 블록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거리와 행동력을 통해 턴의 내용을 제한하는 지점은 턴제전투 자체를 새로이 보게 하는 매커니즘이다(물론 스튜디오의 전작들을 해보지 않아 더 놀랍게 다가온 것일 수 있다). 물론 결말의 가짓수라던가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어떤 방식들 등의 한계지점이 존재하지만, 그것들이 오픈월드 지도 끝자락의 보이지 않는 벽처럼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도 대단하게 다가온다. '어두운 충동' 플레이가 그렇게 재밌다던데, 우선 1회차를 얼른 마무리해보는 것으로...


6. 6일에 인디스페이스에서 진행된 <별은 기억한다> 상영회에 다녀왔다. 10.29 이태원참사 유가족들을 담은 다큐멘터리로, 권오연 감독이 연출했다. 영화의 만듦새 자체에 관해 딱히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영화의 첫 공개는 참사로부터 딱 1년이 지난 시점이었고, 그 시점에 필요한 이야기가 있다. 참사 1주기를 맞아 여러 다큐멘터리가 나왔었다. KBS는 <이태원>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로 유가족과 생존자의 이야기를 담아냈고, 뉴스타파는 <이태원 참사 1주기 : 무책임, 무시 그리고 흩어진 목소리>를 내놓았다. 다소 뜬금없지만 파라마운트+를 통해 공개된 2부작 다큐멘터리 <Crush>도 있었다. 각각의 작품이 유가족과 생존자, 국가 행위자들의 책임, 사건 자체의 발생을 다루었다면다. 네 작품은 상호 보완적으로 10.29 이태원참사를 기록하는데, <별은 기억한다>는 유가족협의회를 통해 전개된 여러 활동들에 중심을 둔다. 4.16 세월호참사 이후 등장한 다양한 다큐멘터리 작업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참사해 접근했던 것처럼, 네 작품은 각기 다른 시야로 사건에 접근한다. 앞선 사회적 참사들과 마찬가지로 10.29도 여러 음모론에 둘러 쌓여 있지만, 사건 원인 자체가 침몰해버렸던 세월호와 달리 그 원인 자체는 비교적 명쾌한 편이다. 문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음에 있다.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라는 말은 지난 10년 동안 곳곳에서 반복되었다. 이 다큐멘터리들은 그 말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올해는 세월호 참사 10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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