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풀과 울버린> 숀 레비 2024
*스포일러 포함
MCU에서 멀티버스의 도입은 총체적인 실패에 가깝다. 그것을 다루는 톤 앤 매너도 각 작품마다 큰 차이가 발생한다. 드라마 <로키>의 멀티버스는 코믹스의 그것보다는 <닥터 후>에서 보던 시간여행 놀음에 가깝다(<닥터 후>에 대한 비하는 아니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오로지 팬서비스를 위해 그 설정을 가져왔다.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멀티버스라는 설정을 재빠르게 소화시켜 버렸다. 일루미나티는 등장과 동시에 퇴장했고, 스트레인지의 변종들은 서사적 소모품으로서 적재적소에 사용되었다. 잠지 고개를 옆 동네로 돌려보자. <플래시>의 멀티버스는 다소 당황스럽다. 그저 오래된 DC 영화와 그에 관한 루머를 농담의 소재처럼 사용할 뿐이다. 개인적으로 여러 차례 말했지만, 멀티버스라는 설정을 코믹스의 그것과 가장 유사하게 써먹은 것은 CW 애로우버스가 거의 유일하다.
<데드풀과 울버린>은 이미 예고된 대로 MCU 멀티버스에 관한 농담과 카메오가 가득하다. 예고편에서 공개됐듯 <로키>의 주축이었던 조직 TVA가 주요하게 등장하고, <로키>에 등장했던 인물과 공간들도 등장한다. 이번 영화의 등장하는 울버린(휴 잭맨)도 <엑스맨>부터 <로건>까지 등장했던 울버린과는 다른, 다른 유니버스에서 데드풀(라이언 레이놀즈)이 데려온 인물이다. <로키>에 등장했던, 모든 것이 버려지는 공간 ‘보이드’가 중요한 공간으로 등장한다. <로키>에서 보이드는 TVA에 의해 ‘신성한 타임라인’을 망치는 변종들이 보내지는 공간이었지만, <데드풀과 울버린>은 그것을 조금 다르게 해석한다. <노 웨이 홈>이 밝힌 것처럼 그간 제작된 모든 마블 코믹스 영화가 멀티버스의 일환이라면, 다른 모든 영화도 그렇게 취급할 수 있지 않은가? 따라서 이 영화는 실사화에서 기각된 캐릭터인 찰스 자비에의 쌍둥이 카산드라 노바(엠마 코린)를 보이드의 주인으로 내세운다. 그리고 그에 맞서는 보이드의 저항군으로서, 마블 코믹스 원작 영화의 주인공으로 존재했던 캐릭터들을 내세운다. 블레이드(웨슬리 스나입스), 엘렉트라(제니퍼 가너), 갬빗(채닝 테이텀), 휴먼 토치(크리스 에반스), 로라(다프네 킨)가 그들이다. <로건>에 출연했던 로라를 제외하면, 다른 캐릭터들은 폭스(혹은 뉴라인)가 판권을 소유했던 마블 코믹스 원작 영화들의 주인공이다. 퍼니셔, 매그니토. 리드 리처즈, 퀵실버, 데어데블 등은 대사로만 언급된다. 대사로만 언급된 캐릭터들이야 최근까지 영화화/드라마화되었던 이들이다. 그러니까 존 번탈, 마이클 패스빈더/이안 맥켈런, 존 크래신스키/페드로 파스칼, 에반 피터스/애런 테일러 존슨, 찰리 콕스는 등장하지 않는다. 해당 캐릭터를 과거에 연기했던 돌프 룬드그랜, 토머스 제인, 레이 스티븐슨, 벤 애플렉 또한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이 증명하는 것은 단순하다. 현재 이 영화를 제작한 디즈니-마블이 모든 캐릭터의 IP를 쥐고 있고, 영화에 직접 출연한 배우가 자신의 과거 배역을 재차 연기하는 것에 동의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드러내는 것은 무엇일까? <노 웨이 홈>이 한 차례 보여주었듯 과거에 제작된 영화들을 모두 포괄하는 ‘멀티버스’를 영화로 구현하는 것은 무척 고된 일이다. 그것이 성사되었을 때 팬들의 환호를 받을 수 있지만, 그것은 영화적 효용으로 다가오진 못한다. 영화 자체의 힘보다는 팬서비스만을 강조하는 극단적 엔터테인먼트의 향연만이 남을 뿐이다. 실제로 앞선 두 편과는 달리 <데드풀과 울버린>에는 마블 코믹스 혹은 코믹스 원작 영화를 레퍼런스 삼는 농담과 설정만으로 가득하다. 다양한 대중문화에서 레퍼런스를 뽑아온 두 영화와는 차이를 둔다. 이를테면 갬빗이 <엑스맨 탄생: 울버린>에서 처음으로 실사화되었으며 채닝 테이텀을 주연으로 촬영까지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혹은 블레이드가 1998년 처음 영화화되었고 다른 배우를 주연으로 한 TV드라마가 존재하며 리메이크 영화가 제작 중인 사실을 모른다면, 데어데블도 아니고 그의 사이드킥 격 캐릭터인 엘렉트라가 있으며 영화화된 적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면, 크리스 에반스가 ‘캡틴 아메리카’ 이전에 ‘휴먼 토치’였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저거노트, 토드, 레이디 데스스트라이크, 세이버투스, 파이로 등 <엑스맨>의 오리지널 3부작에 등장했던 캐릭터를 모른다면, <데드풀과 울버린>은 무엇으로 다가올까? 나아가, 이 모든 것을 한 편의 영화로서 구현하기 위한 자원은 얼마나 필요했을까?
케빈 파이기는 <어벤저스: 엔드게임> 이후 멀티버스라는 소재를 도입함으로써 MCU를 코믹스에 가까운 형태로 재편하려 했다. 사실상 ‘인피니티 사가’ 이후의 MCU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너무 많은 캐릭터가 한데 모여 있었고, 각각의 이야기를 하나로 모으는 새로운 이벤트를 만들어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코믹스의 방법론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다. 실제로 마블 코믹스는 멀티버스라는 설정을 통해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와 같은 작품이 보여주는 것처럼, 다양한 멀티버스의 존재는 소수의 독자만이 지닌 니즈를 만족시킬 수 있는 마이너한 작품부터 다분히 작가주의적인 작품은 물론, 대중적인 빅 이벤트까지 성사시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코믹스 속 캐릭터들의 다양한 조합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캐릭터의 다양한 변형 또한 가능하게 해주었다. MCU는 이러한 마블 코믹스의 설정을 뒤따라간다. 몇몇 영화와 드라마에서 꾸준히 예고되는 ‘인커전’ 이벤트는 코믹스의 것을 그대로 따를 뿐이다. 코믹스가 다양한 개성과 성격의 변형을 ‘팬-메이드’의 이름으로 허가하며 그것이 종종 멀티버스의 이름으로 합류할 수 있는 방식을 가졌다면, 영화와 드라마라는 매체를 택한 MCU는 그것의 자유도를 근본적으로 포기할 수밖에 없다. 캐릭터는 배우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며, 그것은 영화/드라마의 자유로운 생산을 방해하는 가장 큰 제약이다. <데드풀과 울버린>에 그러한 캐릭터들이 채택된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 다름없다. 찰스, 매그니토, 진, 사이클롭스, 비스트, 퀵실버 등 엑스맨의 간판 캐릭터들이 등장하지 못한 이유는 너무나도 단순하다. 그들을 연기했던 배우들이 출연료나 일정 등의 여러 이유로 출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코믹스에서는 그 캐릭터들을 그려내면 된다. MCU가 코믹스에 가까운 노선을 택했을 때, 그것이 필연적인 실패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데드풀과 울버린>은 분명 팬들을 즐겁게 해주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캡틴 아메리카인 것처럼 등장했던 크리스 에반스가 휴먼 토치였음이 밝혀졌을 때, 한 번도 실사화된 적 없는 채닝 테이텀의 갬빗이 태어나자마자 보이드에 존재했다고 말할 때, 왕년의 히어로들의 과거의 시그니처 무브를 보여주며 액션을 선사할 때, 이 영화는 팬들이 기대했을 무언가를 충족시켜 준다. 다른 한편으로, 나의 의심은 여기에 가 닿는다. 이제 막 15주년이 지난 MCU를 쫓아가는 것에도 진입장벽을 느끼는 이들이, 과거의 ‘망한’ 슈퍼히어로 영화들에 추억을 느끼고 진정으로 ‘팬 서비스’라 느낄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가? 나아가 <플래시>에 니콜라스 케이지의 슈퍼맨이 등장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 번도 대중 앞에 모습을 보인적 없던 채닝 테이텀의 갬빗이 등장했을 때 쾌감을 느낄 관객은 몇 명이나 되는가? 이것은 총체적인 자원의 낭비다. 단지 소수의 팬을 위해 쓰잘데기 없이 노력을 들였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데드풀과 울버린>은 공동의 추억으로 존재하지 못했던 무언가를 공동의 추억이라고 주장하는 영화다. 물론 울버린이라는 영화의 두 기둥 중 하나가 만들어내는 공동의 추억과 이야기가 존재하지만, 그 바깥의 모든 것을 채우는 것은 그 누구의 추억도 되지 못했던 것들의 재소환이다. 그러한 지점에서 <데드풀과 울버린>은 영화 속 데드풀의 대사, “이 멀티버스인지 뭔지 질리지 않아?”를 영화화한 것에 다름없다. 이 영화는 자신이 속한, 속할 세계의 실패를 인정하고 농담으로 삼지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제안을 해내지 못한 채 그 세계의 부스러기들을 모아 최후의 농담을 던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