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노라>는 랩댄스를 추는 스트리퍼들을 트래킹으로 담아내며 시작한다. 이 장면은 노동의 현장을 담아낸다. 넷플릭스의 팝스타 다큐멘터리들이 공연의 화려함을 담아내듯, 공사장을 찍는 영화가 먼지와 땀을 찍어내듯, 셰프가 주인공인 작품이 주방의 열기와 예민함을 담아내듯 말이다. 지난 10여 년 간 성노동자가 주인공인 장편영화를 내리 다섯 편 내놓은 션 베이커의 일관성이랄까. 그의 영화 속 성노동자들은 무수한 영화들 속 조연, 단역, 보조출연의 위치에 놓여왔던 대상에 카메라를 들이댄 결과다. 물론 (마치 많은 퀴어영화들이 그러하듯) 비극성 속에 성노동자를 밀어 넣는 형태를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같은 범작이 취하긴 했지만. 션 베이커의 앞선 영화들이 성노동자들의 노동행위, 그들의 생활세계를 보여주었다면, <아노라>의 중심은 그들이 '무엇을 파는가'에 집중한다. 아노라는 이반에게 무엇을 팔았는가? 성적으로 대상화/물화된 신체라는 답이 먼저 떠오르겠지만, <아노라>가 제시하는 것은 다른 답안이다. 아노라가 판매하는 것은 시간이다. 이 거래에는 암묵적인 약관, 이를테면 랩댄스를 추는 댄서에게 먼저 손을 대는 것을 금하는 것 등이 포함되지만, 영수증에 적히는 것은 랩댄스를 추는 시간, 연애관계를 이어가는 기간과 같은 것들이다. 이반이 아노라를 자신의 집으로 부르는 장면, 그리고 '시간 추가'를 요청하는 장면 등을 떠올려보자. 그러한 의미에서 <아노라>는 노동자와 노동자의 시간을 구매하는 재력가(자본가라기엔 이반은 생산수단이 없다) 사이의 시간의 계약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거래는 결혼이라는 다분히 낭만적 제도에 다다른다. 영화는 앞선 1시간가량을 아노라와 동료 성노동자들의 노동과 이반이 제시한 '일주일 간의 독점적 관계'를 다룬다. 대략 10일가량의 시간이 담긴다고 할 수 있다. 라스베이거스에서의 결혼식 이후 돌아온 두 사람의 집에 이반의 부모가 보낸 이들이 도착하는 순간부터 마지막 장면까지의 80분가량은 2박 3일을 담아낸다. 영화의 앞선 절반이 여러 단위로 분절된 시간들의 거래를 그려낸다면, 이후의 절반에서는 남은 시간 전체가 (결혼)계약 속에 놓인다. 물론 그것이 파행에 이르는 과정을 그려내는 것이지만. 션 베이커의 주인공들은 할리우드의, LA의, 플로리다의 빈민들이었지만, 그 영화들이 현대적 계급관계를 그려내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인물들의 반대항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이나, 반-소수자적 이웃이나, 제도 자체였으며, 그렇기에 인물들은 파국이나 비극 속으로 떠밀려갔다. 일종의 계급우화로서의 <아노라>는 주인공을 비극성 속으로 몰아내는 대신 그의 노동이 제공하던 것은 정말로 무엇이었는지, 그 노동의 구매자들이 구매한 것은 무엇이었는지를 되묻는다.
2. 브루노 뒤몽이 스페이스 오페라를 제멋대로 <릴 퀸퀸>의 세계에 집어넣었다. <엠파이어>는 한적한 프랑스 시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0과 1의, 악마와 천사의 대결을 담아낸다. 세계를 공허에 집어넣으려는 0에 맞서, 1은 3파장 형광등 같은 광선검을 들고 '바디스내처'들을 잡고자 한다. 감독의 이름에서부터 거대한 백병전이나 우주전쟁 같은 것을 기대하는 관객은 없을 것이다. 뒤몽의 영화들은 얼핏 선과 악, 피해와 가해, 지배와 피지배, 자본가와 노동자 같은 이분법으로 구성된 세계처럼 다가오지만, 그 세계의 작동방식은 이분법적이지 않다. 도리어 이분법의 작동으로 인해 그 세계는 일그러진다. <잔 다르크> 연작을 떠올려보자. 잔 다르크를 마녀로 몰아가려는 교회의 재판은 한없이 지루한 모순의 수사학으로 채워진다. 뒤몽은 그러한 수사학에 앞서 잔 다르크를 록 오페라 뮤지컬의 세계로 초대하며 수녀들과 헤드뱅잉을 하게 만든다. 그의 영화 중 가장 많은 CGI가 사용되었을 이번 영화의 두 세력이 0과 1이라는 이진법으로 표상된다는 것에서, 전작 <프랑스>에서 디지털적인 것들로 표상되는 세계에 대한 불만을 끝없이 제기했다는 지점에서, 뒤몽이 <엠파이어>에서 구사하는 다분히 이분법적인 수사들(남성과 여성, 0과 1, 악마와 천사, 어둠과 빛 등)은 그 구분 자체의 모호성 내지는 불가능성 속에서 천천히 폐기된다. <릴 퀸퀸>과 <꽥꽥과 잉여인간>의 형사 콤비가 <엠파이어>의 등장하는 순간은 그것을 자명하게 드러낸다.
3. 알자지라의 영어 채널에서 방영되는 다큐멘터리 시리즈의 일환으로 제작된 <The Night Won't End>는 2023년 10월 7일 이래로 여전히 벌어지는 이스라엘의 제노사이드를 다룬다. 지난 10월 오오극장에서의 상영소식을 통해 알게 되었고, 어제 '해방을 위한 시네클럽'과 '팔레스타인평화연대'가 주최한 상영을 통해 관람했다. 이번 주 국내 트위터에서 많은 수의 리트윗을 기록한 6살 소녀 힌드의 죽음을 포함해 이스라엘의 폭격과 민간인 처형 등으로 가족을 잃은 팔레스타인 민간인과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이 영화는, 그 만듦새의 측면에서 크게 얹을 말이 없다. 어떤 면에서는 트위터에서 오갔던 이야기, 특히 힌드의 죽음을 다루는 대목에서 포렌식 아키텍처(Forensic Architecture)의 협력을 통해 죽음을 재현하는 방식에서, <The Night Won't End>는 여러 전쟁 다큐멘터리가 범하는 폭력의 전시를 반복한다고 지적하는 관객도 존재할 것이다. 다만 이 영화가 담아내는 가자지구의 상황은 비교 대상이 될 법한 여타 다큐멘터리, 이를테면 21세기 초의 (국내에선 다분히 미국의 관점에서 쓰이는 단어인) 아프간전과 이라크전부터 2010년 아랍의 봄 이후 전개된 다양한 혁명과 투쟁, 시리아 등에서 벌어진 내전 상황을 다룬 무수한 작품들과 크나큰 차이를 갖는다. 이를테면 <화이트헬멧: 시리아 민방위대>가 보여주듯 내전 중에도 민간인 피해를 (가능한) 막기 위한 구호활동은 누군가의 승인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마에게>나 <아프간 리스트>에서 드러나듯 난민으로써 해외로 망명하는 것은 (탈출의 어려움이 존재하지만) 민간인들에게 가능한 선택지로 존재해야 한다. 민간인 피해 발생에 대해 그것을 규탄하는 해외 정부인사나 국제연합의 대응 등이 영화에 포함될 수도 있다. <The Night Won't End>는 그 모든 것이 기능하지 못함으로써, 혹은 그것들이 기능하지 못하게끔 억제하는 법을 뭉갬으로써 벌어진 제노사이드를 담아낸다. 여기엔 무언가 기능하고 있지 않다. 예를 들어 민간 구호단체인 적신월사(Red Crescent)의 앰뷸런스가 출동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군의 허가가 필요하며, 그들이 결정한 경로로만 이동해야 하고, 그들의 지도에 따랐더라도 구조자는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제노사이드, 집단학살이며, 그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법적 절차를 무시한 미국의 묵인과 지원 하에 벌어진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영화에 담긴 가자지구의 상황은 서구에서 2차 대전 이후 전시 민간인 보호를 위하 제네바 협약의 제4 협약이 기능하지 못함을, 더 나아가자면 나치의 절멸수용소를 묘사한 무수한 영화들(특히 올해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이 묘사하는 것처럼 전쟁범죄를 은폐하고 제노사이드를 위생화하려는 전범의 시도조차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21세기 벌어진 전쟁 중 저널리스트, 의사, 구호대원의 희생이 역대 최대인 상황 속에서, 알자지라의 저널리즘은 인스타그램과 틱톡, 트위터 등에 흩뿌려지는 민간인들의 영상을 모아 보도하고자 한다. 마치 <은빛 수면, 시리아의 자화상>이 1,001의 시리아인들에 의해 촬영된 내전을 담아내었듯이 말이다. 지금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가능한 저널리즘은, 가능한 영화는 무엇일까. 영화는 유튜브(https://www.youtube.com/watch?v=ECFpW5zoFXA)에서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