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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Dec 18. 2024

종군기자의 카메라가 향할 수 있는 곳

<시빌 워: 분열의 시대> 알랙스 가랜드 2024

 한국인의 입장에서 이 영화의 개봉 타이밍이 참으로 기묘하게 되어버렸지만, 이 영화를 지금의 국내, 혹은 트럼프를 재당선시킨 미국의 현실 정치의 반영물로 바라보는 것은 오독에 가깝다. <시빌 워>는 내전 상황의 미국을 다루고 있지만 이는 트럼프가 선동했던 2021년의 국회 폭동 사건 같은 것과 일절 관계가 없다. 익숙한 정치 영화나 전쟁 영화의 틀 안에 속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담 맥케이류의 풍자 영화라 할 수도 없다. 영화가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지만 순간순간의 언급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설정은 그것을 명확히 한다. 영화에는 크게 두 세력이 대립 중이다. 대통령을 중심으로 동부의 주들이 뭉친 정부군, 캘리포니아와 텍사스를 중심으로 한 서부군. 그리고 플로리다를 중심으로 나머지 주들이 뭉친 플로리다연합이 두 세력의 틈바구니에 존재한다. 이러한 설정은 말도 안 되는 정치적 서커스의 결과이거나 <트로피코> 같은 파시즘 시뮬레이터 게임에서나 가능할 법한 게리맨더링으로만 가능할 것이다. 즉, <시빌 워>는 적어도 2016년 트럼프 당선 이후 할리우드에서 쏟아지는 일련의 정치 풍자극이나 정치비평과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다.     

 그렇다면 <시빌 워>의 기획은 무엇인가? 알렉스 가랜드의 연출작 필모그래피를 간단히 살펴보자. 데뷔작 <엑스 마키나>와 8부작 드라마 <데브스>에서 그는 실리콘 밸리에 대한 혐오를 드러낸다. 표면적으로는 AI 기술로의 매혹을 담아내는 것 같지만, 두 작품 속에서 AI의 창조자들은 결국 줄행랑 혹은 살해대상이 되지 않던가. 기묘한 SF 탐험극 <서던 리치>는 미국식 정복주의, 다시 말해 북미 대륙 바깥의 땅을 직접적으로 점령하지는 않지만 문화적, 경제적, 이념적 테라포밍을 통해 하나의 거대 블록을 형성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라고 바라볼 수 있다. 갑작스레 나타난 이공간을 탐사하고 정복하고자 하는 ‘과학적’ 욕망은 끝내 실패한다. 다분히 할리우드적인 게임 디자이너 코지마 히데오가 <데스스트랜딩>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대륙횡단철도의 건설을 재현하고자 했던 것과 대비된다. 영국 국적의 가랜드가 영국에서 연출한 유일한 영화 <멘>은 유해한 남성성(toxic masculinity)의 주요한 기능이자 기술로서의 가스라이팅을 바디호러의 장르적 관습 속에서 풀어낸다.     

 전작들에서 취한 가랜드의 정치적 윤리성은 <시빌 워>의 기반이 된다. 이 영화의 목표는 건국 이래로, 혹은 대륙횡단철도 건설 이래로 미국이 타 대륙에 외주화 해온 제노사이드, 자살폭탄테러, 국지전과 같은 폭력을 미국의 땅 위에 펼쳐 놓는 것이다. 현재도 미국의 지원과 묵인하에 장기화되고 있는 제노사이드와 전쟁이 이어지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이 역사는 2차대전 이래로 세계경찰의 역할을 자임해온 미국이 두 세기에 걸쳐 이어가고 있는 정치적, 군사적 프로젝트다. 리(커스틴 던스트)를 비롯한 영화의 주요 인물 4인방이 모두 종군기자 혹은 종군기자 지망생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군기자는 태생적으로 폭력 안에 존재하는 직업이다. 그들은 눈앞에서 총살당하고, 화형당하고, 폭탄에 사지가 찢어진 사람들을 찍는다. 진부한 비유이지만 영화에서도 여러 차례 등장하기에 써보자면, 그들은 총(shot)에 반격하기 위해 촬영(shot)하는 이들이다. 다만 이것은 정말로 반격인가? 종군기자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 베트남전부터 21세기 초반까지 중동에서 벌어진 전쟁들을 떠올려보자. 해당 지역의 민간인들, 그곳을 점유하며 살아가는 주민들에겐 전쟁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로서의 카메라가 극히 제한적으로만 존재했다. “이라크전은 발발하지 않았다”는 보드리야르의 도발적인 발언에 함의된, 종군기자의 카메라를 통해 사진과 영상으로, 시뮬라크르로서 매개된 전쟁은 전쟁을 독자나 시청자 앞에 현현하게끔 해줌과 동시에 그 대상을 뒤덮어버린다는 것이 지난 시기 이어졌던 비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종군기자의 카메라는 진실을 포착해 외부로 전파하는 장치임과 동시에 필연적으로 외부의 시선으로 자리한다. 특히 미국 국적의 기자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그렇기에 <시빌 워>는 남북전쟁 이래로 전장이 되어본 적 없는 미국 본토를 전장으로 테라포밍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미국이 전장이 되었을 때, 현장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종군기자의 윤리는 여전히 이어질 수 있는가? 이 영화는 그들의 카메라가 가진 위선 내지는 윤리적 개입의 불가능성을 드러낸다. 카메라가 담아낸 내전의 상황은 그 상황을 전파함과 동시에, 영화 내내 드러나듯 특정한 전쟁 세력의 보조를 통해서만 촬영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정파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정부군과 싸우는 플로리다연합군의 시야에서 촬영한 사진은 무엇을 반영하는가? 리의 악몽 속에서 등장한 중동과 아프리카의 전쟁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촬영할 때의 거리감은 사라진다. 대통령이 사살당하기 전에 인터뷰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뉴욕에서 워싱턴 D.C.까지의 위험천만한 여정을 시작할 때, 익숙한 듯 전장을 가로지르고 사진을 찍는 그들 앞에 놓인 것은 ‘적’이 아니라 친구, 동료, 시민이 된다. 영화 중반부 등장해 리 일행을 위협하는 한 극단주의자를 커스틴 던스트의 실제 남편 제시 플레먼스가 연기한다는 지점은 이를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러한 맥락에서 그들의 카메라로 촬영된 전장으로서의 미국, 총격과 폭탄테러로 죽어간 미국 시민의 사진은 로이터와 AP통신 등의 매체로 전송된다. 하지만 이 보도는 이전과 같을까? 리와 제시(케일리 스페이니)는 각자의 부모가 이 모든 내전 상황을 무시한 채 시골 농장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워싱턴 D.C.로 향하던 중 그들은 내전이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 살아가는 마을에 당도하기도 한다. 그들의 사진은 영향력 있는 동시에 무시의 대상이다. 일상적 뉴스로 받아들여지던 타국의 전쟁은 카페테리아에 놓인 TV에서 흘러나오는 백색소음이 될 수 있지만, 자국의 땅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그렇지 못하다. 그것과 거리를 두기에 그들은 너무 지근거리에 존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빌 워>와 겹쳐지는 영화는 미국에서 생산된 정치 비평적 영화들이 아니다. 타국으로 파견된 종군기자와 저널리스트들이 촬영해 온 영화도 아니다. 전쟁이 벌어지는 바로 그곳에서, 그곳의 국적을 갖고, 그곳의 사람들과 직장과 집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찍는 현장. <시빌 워>에 그러한 이미지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알렉스 가랜드는 종군기자의 카메라가 그곳의 사람들이 꺼내든 카메라와 같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미국 정치의 지금이 아니라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미국 정치에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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