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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Dec 16. 2024

웃음이 되지 못한 비명

<서브스턴스> 코랄리 파르자 2024

*스포일러 포함     


 처음과 마지막에서 출발해보자. <서브스턴스>는 엘리자베스 스파클(데미 무어)의 명패가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헌액되고 세월이 흘러 갈라지고 더럽혀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은 바로 그 자리에, 잘린 메두사의 머리와 같은 형상을 한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자리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 영화가 엘런 식수가 말했던 ‘여성적 글쓰기(I’Ecriture féminine)’를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의 평가처럼, <서브스턴스>는 할리우드 장르 영화의 선배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크로넨버그, 큐브릭, 카펜터, 드 팔마, 와일더, 히치콕, 린치, 타란티노, 아로노프스키, 파웰&프레스버거, 심지어 감각을 자극하는 스펙터클을 주조하는 방식은 에드가 라이트나 마이클 베이의 영향권 속에 있다. <서브스턴스>는 표면적으로는 외모지상주의에 집착하고 노화를 혐오하는 할리우드에 대한 비판을 바디 호러, 사이코드라마 장르 속에서 풀어낸 것이지만, 이 영화의 기획은 영화의 레퍼런스들에 있다. 남성 감독들이 만들어낸 이미지들, 남성적 이미지들을 레퍼런스들로 갈가리 찢어낸 뒤 그 기표들로 다시 영화를 써내려가는 것. ‘메두사의 웃음’을 시도하는 것.     

 하지만 이는 기능하는가? 우리는 무수한 할리우드 비판을 보아 왔다. 그것들은 어떤 죽음을, 영화 자체에 찾아온 위기 상황에 대한 경고들을 포함한다. 와일더는 <선셋 대로>를 통해 무성영화의 죽음을, 그럼에도 노마 데스먼드의 얼굴에 생생히 현현하는 마지막 생기를 포착하고자 했다. 린치는 <인랜드 엠파이어>에서 디지털이라는 혼란을 다뤄낸다. 디지털 이미지는 영화를, 할리우드를 새로운 혼란 속으로 집어던졌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혼돈은 더욱 복잡한 세계들의 중첩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주목할 지점은 이 죽음들, 이 혼란들은 여성의 신체로서 다뤄졌다는 지점이다. 우리는 글로리아 스완슨의 주름을, 로라 던의 비명을 목격한다. <바스터드: 거친 녀석들> 속 불타는 스크린에서 광기를 터트리는 멜라니 로랑과, 생사여부를 알 수 없는 밤거리로 유유히 걸어가는 <바빌론>의 마고 로비와, 필름릴의 담배자국에서 걸어 나오는 나체의 천사와, 비명으로 박제되며 죽어가는 <피핑 톰>의 여성들과, 사이비 교주와 함께 순장된 <언더 더 실버레이크>의 라일리 키오와, 애증의 피사체가 된 스필버그의 어머니를 목격했다.      

 <서브스턴스>가 입장하려는 세계는 여기에 기반해 있다. 코랄리 파르자는 영화에 대해, 할리우드에 대해 말하기 위해 동원된 여성 신체를 새롭게 쓰고자 한다. 그것은 할리우드가 강제하는 여성의 자기혐오를 적극적으로 끌어오는 방식으로 채택된다. 레퍼런스 속 미친 남성들, <샤이닝>의 잭 니콜슨과 <플라이>의 제프 골드브럼의 모습은 데미 무어의 신체를 통해 다시 쓰여진다. 그렇게 탄생한 또 하나의 엘리자베스 스파클, 마가릿 퀼리의 신체를 가진 ‘수’의 존재는 할리우드가 지닌 여성혐오증 그 자체로 현전한다. 수는 제작사 대표 하비(데니스 퀘이드)가 바라던 바로 그 모습대로 그 앞에 나타난다. 완벽한 신체, 아름다운 얼굴, 노출 가득한 의상, 순종적인 태도, 성공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욕심. 그리고 영화는 그것을 지나치게 정직하게 담아낸다.      

 앞서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서브스턴스>가 스펙터클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마이클 베이와 같은 선정적 감독의 방법과 닮아 있다. 그것이 이 영화, 그리고 코랄리 파르자와 가장 자주 비교되는 줄리아 뒤쿠르노와의 차이다. 전작 <리벤지>에서 전형적인 여성복수극의 방법론을 밀어붙였던 그는 이번 영화에서 누벨이마주나 프렌치 익스트림의 선배들을 쫓는 대신 지극히 할리우드적 방식으로 수의 신체를 훑는다. 그것은 <리벤지>에서와 같은 방식의 실책이다. 영화가 겨냥하는 과격의 방향에 알맞지 않게, 비판의 화살이 뭉툭해지고 만다. 나아가 영화가 채택한 방법론, 남성 감독들의 것을 떼어와 자신의 쓰기 재료로 삼는 방식은 너무나도 손쉽게 이루어진다. 영화 초반부, 스튜디오의 지나치게 긴 복도가 등장했을 때 그것이 결국 피로 물들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사람이, 적어도 <샤이닝>을 본 사람 중에서 있을까?     

 결국 이 피와 고름과 척수액이 난무하는 거대한 쇼의 결말은 우리가 예상하는 결말로, ‘새해 전야 쇼’에서 무너져내리는 엘리자베스-수의 신체를 목도하는 것으로 향한다. 우리는 그 지점에서 <캐리>의 클라이맥스나 피터 잭슨의 스플래터 영화를 방불케 하는 피의 향연을 본다. 그런데 이 쇼는 이상하다. 여기는 성인 채널이 아니며 어린아이가 객석에 있지만 가슴을 드러낸 토플리스 의상의 무용수들이 무대에 가득하다. 영화는 무용수들의 얼굴, 가슴, 엉덩이에 뿌려지는 피를 클로즈업으로 담아낸다. 무엇을 찍고 싶었던 것일까? 이 무용수들은 엘리자베스-수가 겪은 그로테스크한 여정의 공범인가? 이건 일종의 영화적 패배선언이다. ‘메두사의 비명’을 찍고자 했던 코랄리 파르자는 <서브스턴스>를 둘러쌀 이야기들에 기대어 그것을 완성하고자 한다. 그것은 영화 자체로 우리를 설득하지 못하겠다는 고백이고, ‘해석’을 기다리고자 좌판을 깔고 앉아있을 뿐이라는 인상만을 남긴다. 이미 있던 '메두사의 비명'을 '웃음'으로 해석해주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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