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즈음엔 이런저런 영화제 심사를 보느라 정신이 없다. 개봉작이나 기획전을 제대로 챙겨보지 못해 아쉽다... 최근에 마무리된 심사는 2025 네마프 글로컬 단편 부문 본선이다. 총 14개의 미디어아트/실험영화를 관람했고, 그 중 튀르키예와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는 피라트 위첼(Firat Yücel)의 데스크톱 시네마 <해피니스>를 수상작으로 선정하였다. 이 작품은 암스테르담에 머무르는 연출자가 스마트폰이나 랩톱으로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자행되는 학살 소식을 들으며 불면에 시달리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검색하고 일기를 쓰는 형태로 진행된다. 수면유도제나 블루라이트 차단 방법 같은 것을 검색하던 그는 같은 불면 속에서 같은 디스플레이 위에 소셜미디어나 유튜브 속 학살의 소식을 바라본다. 정말로 불면의 원인인 것은 팔레스타인 등에서 자행되는 학살의 이미지와, 그것에 반대하는 유럽의 (주로 이주민과 학생인) 시민들을 강하게 탄압하는 공권력의 모습이다. 디스플레이가 내뿜는 블루라이트가 불면의 원인이며, 스크린을 멀리할 것을 주문하는 의학 칼럼은 이러한 현장을 외면함으로써 스트레스를 피하라는 주문과 다름없다. 모든 이미지가 디스플레이를 통해 우리 앞에 당도하는 디지털-온라인-모바일 시대의 폭력은 우리가 그것을 외면할 때 강해지고 목격할 때 위축된다. 피라트 위첼은 당신 또한 이러한 불면의 순환을 경험해본 적 없는지, 디스플레이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반영하며 담아낸다.
여담이지만, 최근에야 랩톱이나 스마트폰, 태블릿 등의 화면이 주로 이용되기에 <언프렌디드: 친구삭제>, <서치>의 제작자 티무르 베크맘베토프가 일종의 마케팅 차원에서 제안한 '스크린라이프 시네마'라는 용어가 주로 사용되곤 하지만, 그가 지칭하고자 하는 워딩 속에는 이미지의 재연, 녹화, 편집이 모두 '데스크'에서 벌어진다는 점이 다소간 간과된다. 나아가 웹캠을 통한 페이스타임이나 화상회의의 과도하고 어색한 사용이 문제적이라는 것을 최근 아마존프라임으로 공개된 (그리고 베크맘베토프가 제작한) 아이스 큐브 주연의 <우주전쟁>을 보고 모두가 재차 지각하게 되었을테다. '스크린라이프'라는 것이 디스플레이를 들여다보는 사용자의 얼굴을 꼭 포괄해야 한다는, 무엇보다 배우의 얼굴을 요구하는 다분히 상업적이고 마케팅적인 요인이 필수적이라는 지점에서 적절하진 않게 다가온다.
2.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도 하고 호평받았던 단편 <맥북이면 다 되지요>는 그 호평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실망스러운 영화였다. 어떠한 공백도 남겨두지 않은 채 관객에게 모든 것을 (말로) 설명하고자 한다는 느낌이었달까. 연출자 장병기의 첫 장편영화 <여름이 지나가면>은 그러한 방법론에서 벗어난다. 엄마의 교육열로 인해 갑작스럽게 시골 학교로 전학온 초등학교 6학년 기준은 친구도, 놀거리도 없는 이곳에 쉬이 적응하지 못한다. 게임기와 축구를 통해 간신히 몇몇 아이들과 관계를 맺어가지만, 그것의 연결고리는 쉽게 끊어질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상황을 기준의 엄마나 학교 선생님은 쉬이 파악하지 못한다. 어른들은 그저 부모 없이 살아가는 형제를 안타까워 하면서도, 그들을 중심으로 구축되는 아이들의 세계를 직시하지 못한다. 그들의 눈에 아이들의 폭력은 그저 일대일의 사소한 다툼들, 혹은 축구경기를 준비하며 벌어진 어떤 사건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는 두 개의 세계가 있다. 하나는 엄마, 선생님, 소도시의 어른들로 구성된 세계가 있다. 다른 한편에는 기준을 비롯한 초등학교 고학년생들과 몇몇 중학생으로 구성된 세계가 있다. 두 세계는 같은 지역을 점유하지만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아니, 서로의 존재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을 지각하는 순간 균형이 무너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른 한편으로, 기준에게는 그 세계가 전부다. 어른의 세계, 진학을 위해 소도시에 와야 하고 '부모 없는', '못 사는' 아이를 동정의 시선으로만 바라볼 수 있는 세계는 기준이 속한 세계를 바라보지 못한다. 그러다가 그 세계가 드러난다. 많은 것이 돈과 폭력의 논리로 구성된 기준과 아이들의 세계는 바깥의 시선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종의 폭력적인 사건들이 흘러가고, 기준은 서울로 되돌아간다. 윤가은의 <우리들>이 "놀 시간"을 찾는 아이들만의 헤테로토피아를 묘사하고, 김보라의 <벌새>가 외부적 사건으로 무너진 아이들의 세계의 잔존을 그려내고자 했다면, <여름이 지나가면>은 그러한 세계에 외삽되었다가 빠져나온 한 사람의 시선으로 그것을 담아낸다. 성장이라고 할 것이 없는, (<잠자리 구하기>에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반-성장의 여름.
3. MCU가 야심차게 준비한 새로운 <판타스틱 4>는 조쉬 트랭크의 작품만큼이나 후지다. 레트로퓨처리즘적 뉴욕의 디자인이라던가, 4년차를 맞이한 판타스틱 4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초반부까지야 그럭저럭 볼만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모든 측면에서 관객의 졸음만을 유발한다. MCU에서는 '에고'와 '아리솀' 이후 처음 등장하는 우주적 존재 '갤럭투스'는 자신 앞에 붙은 이름값을 해내지 못하는 캐릭터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는 갈등이 없다. 가족이라는 틀로 묶여있다는 것 외엔 개별 캐릭터에 대한 묘사도 부족하다. 다소 유치찬란한 작품이지만, 팀 스토리가 연출했던 <판타스틱 4>에는 갑작스럽게 생긴 능력에 관한 갈등도, '슈퍼히어로'라는 정체성을 두고 구성원들이 갖는 각기 다른 생각도, 그것들이 하나의 적을 상대하며 극복되고 팀으로 거듭나는 과정도 담겨 있었다. 이번 <판타스틱 4>는, 마치 <스파이더맨: 홈커밍>이 벤 삼촌의 죽음을 생략한 것처럼, 그러한 과정을 생략했다. 그렇다면 이번 영화에는 다른 갈등이 필요했을 것이다. 영화는 그것을 갤럭투스가 리즈와 수의 아들을 원하며, 아들을 넘겨주면 지구를 살려주겠다 말하는 것으로 판타스틱 4와 시민들 사이의 짤막한 갈등으로 퉁치려 한다. 하지만 이는 짧게 스쳐지나가는 플롯 포인트에 불과하다. 여기에는 이야기를 엔터테이닝하게 만들어줄, 혹은 최소한의 어트랙션을 기능하게끔 할 수 있는 배경도 부재한다. 이는 타노스와의 결전을 향해 작품을 희생시키던 '인피니티 사가' 시기의 MCU와는 다른 실패, '멀티버스 사가'에서 진행된 수많은 캐릭터들의 도입이 실패했던 전철을 밟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 "새로운 캐릭터가 있습니다!"라는 외침 외에는 무엇도 없는 그러한 영화 말이다.
4. 영등포 아이맥스에서 <스탑 메이킹 센스>를 봤다. 올해 최고의 아이맥스 경험.
5.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중인 '뉴 프렌치 익스트림' 기획전 첫날 마리나 드 반의 <인 마이 스킨>의 4K 복원판 상영 후 진행된 유은정 감독과의 대담에 참여했다. <인 마이 스킨>은 '뉴 프렌치 익스트림'이라는 흐름 안에서 상당히 튀는 작품이고, 이번 기획전의 상영작 중에서도 그렇다. 가스파 노에, 알렉상드르 아야, 자비에르 잰스, 필립 그랑드리외, 파스칼 로지에 등 이 사조(?)를 대표하는 이들의 영화는 타인을 향하는 폭력을 묘사한다. 폭력의 이유가 무엇이건, 혹은 이유 자체가 부재하건 간에, 상처입고 피흘리며 숨을 거두는 것은 언제나 타인이다. 반면 <인 마이 스킨>에서의 폭력은 주인공인 에스더가 자신에게 행하는 자해뿐이다. 이는 비슷한 시기 할리우드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고문포르노(<큐브>, <쏘우>, <호스텔>,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등)과도, 70~80년대 슬래셔나 지알로에 깊이 영향받은 뉴 프렌치 익스트림 영화들과도 분명히 다른 결을 지닌다. 실제로 마리나 드 반은 이 영화가 프렌치 익스트림으로 분류되는 것을 탐탁치 않아하기도 했다. 이 작품이 '뉴 프렌치 익스트림'으로 묶이는 것은 2004년 평론가 제임스 콴트가 여러 영화들과 <인 마이 스킨>을 함께 묶어 명명한 것의 결과다. 다른 한편으로 이 영화는 2023년 뉴욕 MoMA에서 진행된 바디호러 기획전의 상영작이기도 했는데, 당시의 인터뷰에서 마리나 드 반은 자신의 영화가 '바디호러'로 묶이는 것 또한 탐탁치 않아 했다. 어떤 영화로 자신의 작품이 분류되길 원치 않는 감독의 흔한 투정처럼 다가오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이 영화가 극단주의, 바디호러, 고어 등 익숙한 명명을 거부하는 영화라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뉴 프렌치 익스트림'이 20세기 후반의 할리우드 호러에 영향받았다는 지점을 떠올려보면, <인 마이 스킨> 속 화면분할이 조금은 다르게 다가올 수 있겠다. 대담에서는 브라이언 드 팔마의 <캐리>와 <시스터즈>를 이야기하며, 밖으로 발산되는 폭력의 범위를 드러내는 것으로서의 화면분할과 자신으로 수렴되는 폭력으로서의 화면분할을 언급했었다. 여담아지만, 마리나 드 반의 2009년작 <돌아보지마>에서의 소피 마르소와 모니카 벨루치는 <시스터즈>를 분명하게 떠올리게끔 한다. 그러한 맥락들 위에서 어떠한 명명도 거부하는 듯한 이 영화는 이유없는 자해행위를 통해 자신 속으로 수렴한다. 마리나 드 반은 인터뷰에서 자해장면을 두고 "제 자해 과정이 정말 아름다웠어요. 마지막에는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이 피로 물들어 있었죠. 저는 정말 아름다웠고, 너무 행복했어요. 마치 은총에 감동받은 것 같았어요. 그 사진들은 제 표정, 제 시선이 너무나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그 황홀함이 정말 강렬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영화 공개 이후 십수년이 흐른 뒤 진행된 인터뷰에서, 자신이 실제로 자해를 했었으며 영화를 만들고 난 뒤 그만두었음을 밝혔다. 이 영화는 그렇게 개인적인 이야기와 불쾌감 속으로 관객을 흡수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