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8월은 몇몇 토크 진행과 심사를 위한 스크리너 관람으로 순식간에 지나갔다. 대학원 졸업식도 있었고... 스크리너로 온종일 영화를 보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나름 열심히 극장을 돌아다녔다. 이전처럼 조금 길게 평을 남기고 싶었던 영화들이 있지만, 시간 관계상 여기다 짧게라도 남겨본다.
2. <존 윅> 시리즈의 두 번째 스핀오프 <발레리나>는 오랜 시간 걱정과 기대를 오가며 기다려 온 영화였다. 첫 스핀오프였던 <콘티넨탈>이 <존 윅> 시리즈 특유의 액션을 전혀 살리지 못한 채 전형적이고 지루한 액션물이 되었으며, 세계관 자체를 가지고 노는 즐거움도 온전히 발휘하지 못했다. <발레리나>에 대한 우려도 그와 같았다. 게다가 <언더월드> 시리즈 이후로 이렇다 할 히트작을 내지 못한 데다가 액션에는 큰 재능이 없는 렌 와이즈먼이 연출자라는 소식은 불안감을 키웠다. 내부 시사 이후로 대규모 재촬영이 있었다던가, 채드 스타헬스키가 사실상 영화를 갈아 엎었다는 루머는 (이후 아니라고 정정되긴 했지만) 예상대로 흘러가는구나 하고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천만다행으로, 완성된 결과물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시리즈 팬이라면 깔깔 웃으면서 볼 수 있는 영화였달까. 3편과 4편 사이의 시간대를 배경으로 삼은 이번 영화는 기존의 세계관 안에 킬러 컬트 집단을 등장시키고, 그곳과 얽힌 과거를 지닌 이브(아나 디 아르마스)를 주인송 삼아 세계관을 확장한다. 물론 여기서의 세계관 확장이 소위 '시네마틱 유니버스'스러운 방식이라기보다는, 전통적인 시리즈 영화의 방식에 가깝기에 거부감은 없다. 영화 곧곧에 뿌려진 <존 윅> 시리즈의 인장과도 같은 순간들, 버스터 키튼의 영화가 등장한다거나(이번 영화에는 <스팀보트 빌 주니어>의 그 유명한 장면이 등장한다), 액션을 전체적으로 보여주는 풀숏의 카메라와 같은 것들은 충분한 만족감을 준다. 새로운 인물이 유능한 킬러로 거듭나고 복수를 수행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도 시리즈의 결을 놓치지 않았달까. 물론 액션 스타일의 변화는 존재한다. 이브의 훈련 과정 중 언급된 "여자처럼 싸워라(fight like a girl)"라는 대사처럼, 이브의 액션은 존 윅의 액션과는 결이 다르다. 존 윅이 총기를 사용한 근접전과 더불어 주짓수 등의 관절기 결합시킨, 소위 '건짓수'라 부르던 것을 선보였던 것과 달리, 이브의 액션은 총기나 관절기뿐 아니라 다양한 주변 사물을 적극 활용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갖는다. 신체와 힘의 물리적 차이를 뛰어넘는, 액션영화의 클리셰이면서 성룡의 영화들이 보여주던 코미디적 액션 코레오그래피를 계승하는 방식이 적절히 맞아떨어진다. 동시에 정두홍의 등장과 같은, 비-할리우드 스턴트맨의 출연 또한 <존 윅> 시리즈가 품던 야심을 이어간다. 특히 시리즈 4편에서 두드러지던 액션 게임의 레퍼런스는 이번 영화에서 더욱 강화된다. 그러한 시리즈의 개성은 수류탄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장면처럼 인상적인 순간으로 이어진다. 에드가 라이트의 <뜨거운 녀석들> 등에서 영감받은 듯한 '닫힌 사회'인 할슈타트에 잠입하는 이브의 모습은 호러 어드벤처나 잠입 액션 게임의 일면을 고스란히 가져온다. 다양한 사물의 활용 또한 이 레퍼런스 안에서 정당화된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 존재로서 존 윅의 등장 또한 이브라는 구심점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 머문다. 확정은 아니지만 속편을 예고하고 있기에, 이후를 기대하게 된다.
3. 채드 스타헬스키가 <발레리나>를 선보였다면, <존 윅>의 또 다른 공동연출자이자 제작자인 데이빗 레이치는 <노바디 2>를 선보였다. 전작의 깜짝 히트 이후 4년만에 돌아온 속편은 여전히 피로하고 인정받지 못한 가장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자신이 폭력성을 드러낼 때에야 아들의 인정을 받고 가족을 구할 수 있지만, 역으로 그 폭력성으로 인해 가족이 해체될 위기에 놓이는 아이러니함. 전작은 그 아이러니 속에서 액션을 분출시킴으로써, 더불어 밥 오덴커크라는 배우의 노익장을 담아냄으로써 성공했다. RZA와 크리스토퍼 로이드의 지원사격은 덤이다. 이번 영화에서 허치와 그의 가족은 마침내 휴가를 떠난다. 하지만 하필 휴가를 떠난 지방 관광도시가 범죄 조직의 암시장 역할을 하고 있는 지역이었고, 허치는 얼떨결에 그들과 엮인다. 어떤 면에서 <노바디 2>는 <발레리나>와 유사한 전략을 택한다. 전작에서 보여준 타격기와 총기 중심의 액션이 아니라, 부비트랩과 지형지물을 적극 활용하는 방식 말이다. 사실 이번 영화의 연출을 맡은 티모 차얀토가 근접격투를 잘 촬영하는 감독은 못 된다. 이코 우웨이스 주연의 <헤드샷>은 실랏 마스터의 동작을 본 시리즈 스타일의 카메라로 촬영하다보니 액션 자체를 온전히 담아내는 데 실패했다. 같은 배우를 주연 삼은 <밤이 온다> 또한 '잔혹함'에 포인트를 두었지, 액션을 담아내는 방식은 비슷한 컨셉이자 이코 우웨이스의 데뷔작이었던 <메란타우>보다 못한 수준에 머문다. 이는 <섀도우의 13>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인도네시아 액션 영화를 세계에 알린 <레이드> 시리즈는 (각본의 측면에선 할 말이 없지만) 마치 카메라가 액션에 동참하듯 가까이에서 개입하는 대신 흔들림을 가급적 제어함으로써 무술가들과 스턴트맨들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담아냈다. 하지만 이 흐름 위에 등장한 일런의 작품들은 <레이드> 시리즈가 보여준 잔혹한 폭력에 보다 초점을 맞췄다. 그러한 맥락에서 <노바디 2> 또한 전작과 포인트를 달리한다. 허치가 스스로 억압하던 폭력적 본성을 해방하고, 얼마나 폭력적으로 범죄조직 일당을 쓸어버리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전작에서 묘사된 중년 가장으로서의 모습과의 괴리를 활용한 맥락적 쾌감은 본작에서 거의 부재하다. 즐겁게 볼 수 있는 여름 액션영화로서는 충분하지만, 전작과 같은 즐거움을 기대하기엔 그에 못 미친달까.
4. 감독이 시라이시 코지라는 점에서 걱정과 기대가 공존했다. <사유리>처럼 나름 흥미로운 (쿠소한) 각색을 선보이기도 하지만, <사다코 대 카야코>처럼 과하게 괴팍한 (그리고 지루한) 영화를 만들기도 했으니까. 결론적으로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아직 원작을 다 읽진 못했지만, 2ch 스레드를 비롯한 '텍스트' 인터넷 호러를 트위터나 유튜브, 니코니코 동화 등의 영상 플랫폼으로 옮겨오는 방식이 퍽 성공적이었다. 비디오에서 온라인 플랫폼까지 여러 매체를 넘나드는 영화 속 영상 로어들은 일종의 ARG를 플레이하는 것 같은 오자와와 치히로의 취재로 연결되는데, 이 과정은 나원영의 책 [대체 현실 유령]이 잘 소개하고 있는 '로어화'의 과정과도 같다. ARG의 방식을 통해 톡톡히 홍보 효과를 봤던 <클로버필드> 시리즈 등의 경우는 대체로 영상보단 텍스트와 사진 이미지를 중심 삼아왔기에, 동영상 중심의 이번 영화 속 방식은 독특한 매력을 품는다. 온라인 호러, 인터넷 괴담이 어떻게 하나의 허구/픽션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지, 그것들을 엮어내는 방식은 무엇인지 엿볼 수 있는 작품이랄까.
5. <너는 나를 불태워>는 '독서'를 어떻게 영화로 옮겨올 수 있는지 고심한 작품처럼 느껴졌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주로 다뤘다면 마이타스 피녜이로의 전작들을 보진 못했지만, 체사레 파베세의 책 [레우코와의 대화]의 한 챕터 '바다 거품'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하나의 극이면서도 그 책을 읽은 감독의 독후감처럼 느껴진다. 시인 사포와 님프 브리토마르티스가 나눈 대화를 현대 아르헨티나의 배경에서 극화한다는 점에서 명백히 극영화이지만, 영화는 책을 읽으며 밑줄을 치고 메모를 남기는 피녜이로의 모습, 본문에서 각주로, 또 다른 참고문헌이 될 책들로 이어지는 독서의 무의식적 흐름을 영화 안에 그대로 담아낸다. 극을 기대했을 관객들에겐 다소간 당혹스러운 풍경이 이어지겠지만, 독서라는 행위가 우리의 시각과 촉각, 그리고 상상을 통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떠올려본다면 이 영화의 이미지적 흐름은 풍부한 각주와 참고문헌으로 가득한 에세이로, 활자를 읽는 행위가 어떻게 픽션을 활성화시키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기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