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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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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어제가 생일이었다. 축하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1. 올해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무주산골영화제에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한 <에스퍼의 빛>에 대해 쓴 비평이 무주산골영화제 블로그에 공개되었다. 작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처음 관람한 이후로 이 영화에 대해 한번 써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기회가 되었다. 지난 2월에 있었던 DiGRA 학회에서 여러 게임 다큐멘터리를 C. 티 응우옌이 말한 '행위성' 개념으로 묶어 설명하는 발표를 했었는데, 그때 정리해둔 내용의 도움을 받았다.

https://blog.naver.com/mujufilmfest/223983689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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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주산골영화제에서 관람했던 영화 두 편이 지난 주 연달아 개봉했다. 그 중 한편인 이란희 감독의 <3학년 2학기>는 지난 7월 '독립영화 쇼케이스' 상영 때 리뷰와 GV 모더레이터를 맡아 진행했다. 개인적으로는 감독의 전작인 <휴가>보다 더욱 단단하고 완성도 있는 영화라 생각한다. 아래는 리뷰의 일부. 리뷰와 GV 녹취는 내년 초 발간될 [2025 독립영화 쇼케이스] 책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노동영화’라는 명명을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붉은 머리띠를 둘러매고 팔뚝질하며 구호를 외치는 투쟁의 이미지가 떠오를 테다. 사측이나 고객의 폭언과 갑질에 시달리며 자신의 상황을 비관하는 불행한 노동자와 일터의 풍경을 떠올릴 수도 있다. 혹은 그러한 순간들 속에서 가능한 일탈과 연대의 순간을 새겨 넣는 영화들을 떠올려 볼 수도 있다. <파업전야> 속 붉은 머리띠와 높이 치켜둔 횃불,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폭언 속에서도 지켜나가던 웃음을 서서히 잃어가는 <다음 소희>의 콜센터 현장실습생, 노동의 현장에 카트로 장벽을 치고 투쟁과 연대의 현장으로 탈바꿈시키는 <카트> 속 마트 노동자들.

(중략)

이란희는 우직하게 이들의 노동을 담아낸다. 점심시간에는 근처 백반집에서 밥을 먹고, 추가보수가 걸린 잔업을 일상처럼 받아들이며, 여느 또래 학생들처럼 성인이 되는 순간을 기다리는 19살의 노동. 노동영화에 으레 등장하곤 하는 악역이나 비교대상도 이 영화엔 등장하지 않는다. 아니, 등장하긴 하지만 적극적인 갈등의 주체가 되지 않는다. 현장관리자는 규정의 회색지대에서 안전장치의 부재를 지적하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회피하거나 휴일 근무를 진행한다. 하지만 <3학년 2학기>에서 그가 악인으로 묘사되는가? 그렇지 않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니며 수능을 준비하는 창우의 동생은 고된 하루를 보내고 퇴근한 창우가 잠든 곁에서 불을 켜고 공부하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다. 하지만 영화가 그 둘의 처지를 비교하는가?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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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른 한편인 박준호 감독의 <3670>은 여러모로 즐거운 작품이었다. 3일 동안 8편의 영화를 연달아 관람해야 하는 심사 일정을 개운하게 만들어주는 경쾌함이 살아 있었고, '탈북 게이'라는 소재는 자극적인 내러티브보단 세밀한 (탈북민과 게이) 커뮤니티들의 묘사와 교차성에 집중하고 있었다. 무주산골영화제 블로그에 업로드된 손희정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탈북민의 '시민권'은 어떻게 획득되며 게이의 '시민권'은 어떻게 획득되는가? 나아가 각자의 커뮤니티 속에서 그들은 어떻게 그 커뮤니티의 시민이 되는가? 조유현이라는 매력적인 배우의 열연으로 완성된 주인공 철준은 탈북민이며 게이이고 생계를 위해 교회에서 간증을 하며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20대 남성이다. 철준뿐 아니라 영화 속 주요 등장인물들의 정체성은 단일하지 않다. 한국영화(특히 독립영화)에서 동성애자(라고 쓴 것은 아직 모든 종류의 퀴어가 일반화된 등장인물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가 일반화된 등장인물 유형이자 정체성의 겹 중 하나로 자리잡은 상황을, <3670>은 적극적으로 끌어온다. 경쾌한 로맨틱코미디의 톤으로 흘러가는 <3670>은 정확한 포지셔닝을 통해 영화의 정체성을 갈무리한다. 무수한 BL 영화/드라마/웹툰/웹소설이 생산되는 상황에서, 자신만의 최전선을 재설정하는 것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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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피에트로 비니에비치 감독의 <그를 찾아서>는 여러모로 도발적인 작품이다. 세계 최대의 다큐멘터리 영화제 IDFA(암스테르담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며 여러모로 논란(?)이 있었던 영화이기도 하다. 감독과 제작자들이 함께 개발한 LLM 모델 카스파(KASPAR.)에게 베르너 헤어조크의 작품, 비평, 인터뷰 등을 학습시키고, 그것을 바탕으로 생성된 각본을 영화화했다. 영화 안에 헤어조크의 다큐멘터리에서 익숙하게 발견할 수 있던 헤어조크의 내레이션이라던가, 그의 출연 분량 등은 모두 AI를 통해 생성된 것이다. 물론 영화 전체가 AI로 생성된 것은 아니다. 비키 크리엡스 등 배우들이 출연한 부분이 있고, 보리스 그로이스나 스티븐 프라이 등 유명인사의 인터뷰가 등장하기도 한다. 물론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가지고 있을 뿐 완전한 픽션이다. 일종의 페이크 다큐멘터리 혹은 다큐-픽션의 형식을 띠는 이 영화는 헤어조크의 다큐멘터리스럽다가도 넷플릭스나 HBO의 범죄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픽션을 종종 봐왔다. 오손 웰즈의 <거짓의 F>나 <바람의 저편>과 같은 영화들 말이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AI가 개입되었을 뿐 그러한 작품과 별반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는 것만 같다. 혹은 아핏자퐁 위라세타쿤의 책 [태양과의 대화]나 곧 있을 DMZ다큐영화제에서 상영될 알렉산더 클루게의 <원시적 다양성>처럼 AI와의 대화를 담아낸 영화라고 할 수도 있겠다. 솔직히 말해서, 이 영화의 이야기는 그렇게 흥미롭지 않다. 미스터리는 어느샌가 SF 판타지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영화 스스로가 말하듯 한계에 봉착하기도 한다. 다만 영화, 그리고 다큐멘터리라는 영역 안에서 AI는 무엇을 수행할 수 있으며 이미 수행하고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영화랄까. 흥미로운 지점은, <그를 찾아서>는 헤어조크의 팬무비처럼 다가온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AI와의 대화를 통해 헤어조크스러운 작품을 만들고자 한, 나아가 AI가 생성한 헤어조크를 하나의 행위자(agent)로 개입시키면서 헤어조크풍의 에세이 영화를 만들고자 한 것에 가깝다. 유튜브에 업로드된 무수한 비디오 에세이를 보며 AI와의 협업을 통한 비디오 에세이를 궁금해했는데, <그를 찾아서>는 그 답 중에 하나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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