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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29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1. 최근 공개된 두 편의 원고 소개... 하나는 게임제너레이션 26호에 수록된 "영상기술, 매체, 도구, 방법론으로서의 머시니마에 대한 소고"이다. 2021년 한국영상자료원의 'GAME X CINEMA' 기획전이나 올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의 온라인 기획전 '이것은 가상이 아니다', 혹은 MMCA 서울관에서 진행된 전시 '게임사회' 등을 통해 국내에 소개된 머시니마를 보며 떠오른 생각들을 다소 두서없이 풀어낸 글이다. 머시니마라는 장르가 스트리밍 시대에 여전히 성립할 수 있는지, 머시니마 비디오에세이가 넘실대는 시대에 머시니마 픽션은 가능할 것인지 등에 관해 모두들 이야기 나누길 바라며... 다른 하나는 <8번 출구> 개봉을 맞이해 기획된 [씨네21] 특집기사에 수록된 "밀레니얼의 문화 코드를 노려라, 게임 원작 영화의 현재와 미래"다. (제목의 앞 부분은 편집부의 선택이다) <모탈 컴뱃>, <스트리트 파이터>, <레지던트 이블>, <사일런트 힐>, <툼 레이더> 등 게임 원작 영화의 부흥기였던 1990년대 말~2000년대 초의 시간이 <명탐정 피카츄>, <슈퍼 소닉>,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등의 흥행으로 다시감 재현되는 듯한 지금의 상황이 과거와 어떻게 다른지를 가볍게 스케치하듯 써봤다. 게임제너레이션 24호에 수록된 "게임플레이의 영화화에서 게임-보기의 영화화로"와 같이 읽어주시면 재밌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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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할로우 나이트: 실크송] 진엔딩을 봤다. 사실 2주 전 쯤에 적던 일기인데 뒤늦게 이어 적는... 인게임 플레이타임으로는 58시간 20분 31초가 걸렸다. 인게임에서 몇 개 덜 채운 게 있긴 하지만 완료도 100%는 달성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했듯 [실크송]의 1장은 정말 악랄하다. 이렇다 할 파워업도 없고, 이동기나 문장을 제대로 갖추기도 전에 플레이어는 자연스럽게 '사냥꾼의 행진로' 같은 악랄한 플랫포밍 구간으로 유도된다. 필수 재화인 묵주의 드롭률은 아주 낮고, 잡몹들의 체력은 높고, 날아다니는 적들의 패턴은 매우 곤란하다. 다만 1장의 고행을 지나 2장에 진입하면, 이러한 어려움은 다소 누그러진다. 이단 점프나 발톱 실을 얻게 된 이후의 진행은 예상보다 쾌적하다고나 할까나. 물론 '카라크의 모래밭'이나 '톱니바퀴 핵' 같은 플랫포밍 구간이 등장하지만, 사냥꾼의 행진로에 처음 진입할 때보다야. [할로우 나이트]에서도 초반부에는 이렇다 할 정보 없이, 무엇을 목적으로 어디에 가야하는 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때도 일정 수준의 이동기를 얻고 난 이후 비교적 명확한 목표(세 꿈꾸는 자를 만나 봉인을 푸는 것)를 확인할 수 있다. [실크송]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성채에 진입하는 2장에 이르러서야 우리가 해야할 일이 명확해진달까. 그러한 측면에서, [실크송]의 내러티브는 난이도 높은 고행의 1장과 명확한 목표 속에서 다양한 강화와 더욱 유용한 도구의 습득이 가능한 2장 사이의 간극과 맞닿는다. 팔룸의 무수한 순례자들이 성채에 도달했을 때의 감각을 플레이어가 느낄 수 있게끔 한달까. 많은 플레이어의 '최애' 중 하나일 셰르마가 성채에 도달했음은 물론 치료약을 구하러 백색 병동으로 향하고, 3장에서도 살아남았음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셰르마가 겪은 여정의 디테일은 모르지만, 그 또한 호넷과 크게 다르지 않은 여정을 겪었으리라(물론 마지막 심판을 물리치진 않았겠지만). 발매 초기 쏟아진 난이도에 관한 불호평은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지 않는다. 사실 [실크송]의 난이도는 (물론 어렵고 [할로우 나이트]에 비해 불친절하지만) 유사하게 비교될만한 [로드 오브 폴른] 같은, 오로지 "불쾌함"(사실 모두가 난이도와 관련해 이 단어를 쓰는 게 썩 와닿지는 않는다)만을 위한 수준은 아니다. 매트로배니아(와 그 영향권 안에서의 소울라이크)가 탐험의 즐거움을 주요한 유희 대상으로 삼는다고 가정할 때, [실크송]은 그것에 한없이 충실하다. 제목에 걸맞은, 호넷이 음악을 연주함으로써 알 수 있는 NPC들의 이야기나 연주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NPC와 같은 요소들을 떠올려보자. 물론 누군가는 모든 벽을 치고 다녀야 하는 강박적 탐험 플레이에 불만을 표하듯 이곳 저곳에서 일단 연주하고 봐야하는 이러한 순간을 지겨워하겠지만, 사실 그것을 즐거움으로 승인하는 이에게 한없이 열려 있는 세계를 보여주는 게임이니까.


3. <트론: 아레스>는 형편없었다. <트론: 새로운 시작>이 그랬던 것처럼 NIN의 사운드트랙만이 유일한 장점이랄까. AI 가 3D 프린팅을 통해 현실로 나오는 것도 모자라 인간(나아가 유기물)이 되길 꿈꾸는 여러모로 철지난 이야기를 어째서 <트론> 프랜차이즈를 통해 봐야하는가? <트론>의 매력은 게임이라는, 네트워크라는 이세계에 대한 상상 아니었던가. 케빈 플린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재현된 1982년 <트론>의 비주얼을 본따 만들어진 순간만이 과거의 즐거움을 노스탤직하게 끌어올 뿐이다. 차라리 자레드 레토가 출연한 또 다른 졸작 시퀄 <블레이드 러너 2049>가 이 주제에 관해 조금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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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일 대구 이미지북에서 열린 한받 작품 상영회 '춤춰 트위스트 보이'에 다녀왔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제작된 비디오 작품들이 사실 쉬이 접하기 어렵다. 디지털화된 파일도 돌아다니지 않고, 보존이나 수집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지점도 있기 때문이다. 과거 인디포럼 사무국에서 일할 때 종종 인디포럼 초창기의 프로그램북을 들춰보곤 했는데, 당시의 작품들을 지금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러한 작품들의 작은 조각이나마 만나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5. 좀 더 즐거웠던 것은 상영 이후 이어진 금동현 영화연구자/평론가의 강연이었다. 강연은 현재 매거진 삼삼오오에 "황금양털을 쓰는 법 — ‘조정의 국면’에서"를 통해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요지는, 한국영화(와 독립영화)가 팬데믹 이후 맞이한 조정의 국면(산업의 몰락, AI의 도입 등)을 직시하고, 그 안에서 지역영화가 기능할 수 있는지 혹은 생존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강연 중간에 한독협 회원으로써 갑작스러운 질문을 받기도 했지만, 그럼으로써 계속 생각나는건 조정의 국면에 걸맞은 테라포밍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한독협은 물론 각 지역 독립영화협회에는 일종의 테라포밍이 필요하다. 나 혹은 강연을 선보인 금동현과 같은 세대의 감독, 스탭, 평론가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협회에 가입하고 활동하며 그곳을 우리에게 끌어와야 한다. 이를테면 (제작부터 개봉에 이르는) 지원사업을 중심으로 구성된 지금의 독립영화 생태계에 반감을 가진 사람, 탑-다운 방식으로 구성되는 정책을 타파하고픈 사람, 서울아트시네마와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를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대할 수 있는 사람, 혹은 독립영화라는 이념을 재고하고 다시 구성하고픈 사람. 물론 지금 활동하는, 나보다 한 세대 위에 있는 분들의 활동이 전부 무의미하다거나 무가치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금동현의 글에서 드러나는 '조정의 국면'을 직시하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지금 필요한 것은 윗 세대의 교섭력(아무래도 십수년 간 쌓인 인적 네트워크를 우리가 당장 넘어설 수는 없다)을 이용할 수 있는 새로운 의견과 관점을 관철시킬 수 있는, 협회 총회에서 손을 들고 발언하고 표결할 수 있는 충분한 수의 사람일테다. 정말로 '조정'의 순간이라면, 모든 것을 부수는 것보단 남아 있는 것을 테라포밍하는 것이 보다 손쉬운 선택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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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영상자료원에서 진행되는 홍콩 기획전에 다녀왔다. 인상깊은 것은 두 작품이었는데, 하나는 걸작이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해도 할 말이 없을 호금전의 <충렬도>다. 호금전의 대표작으로 언급되는 영화는 아무래도 <협녀>나 <용문객잔>이겠지만, <충렬도>가 첫 쇼트에 담아낸 바다를 보는 순간 이 영화에 매료되지 않기는 어렵다. 다른 한 편은 정창화의 <순간은 영원히>다. 정창화의 한국영화(정확히 말하자면 한홍합작이지만 한국 배우들이 주인이니까)를 본 것은 처음인데, 007을 연상시키는 첩보물을 성공적으로 동아시아에 이식한 사례이기에 상당히 즐겁게 관람했다. 남한의 정보부 요원과 자이니치 출신 북한 요원이 홍콩의 범죄조직과 결부되며 (이러한 지점은 이 영화가 익숙한 '반공' 서사를 넘어서는 흥미로운 텍스트로 읽힐 가능성을 제공한다) 홍콩, 도쿄, 서울을 오가며 벌이는 이야기를, 다소 개연성이 결여되었으며 1966년이라는 제작시기에 따른 기술적 아쉬움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즐겁지 않게 볼 수 있을까. 게다가 이 영화에서의 남궁원은 (그가 여타 한국 '액션' 영화에서 주로 악역으로 출연했음을 생각하면) 정말로 매력적인 마초로 출연한다. 정창화의 홍콩영화에서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리듬의 편집으로 강력하게 시선을 강타하는 액션씬이 가득함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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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어쩌다보니 올해 영화제 심사를 통해 뵙게 된 (심사 부문은 달랐지만) 두 감독님의 영화를 하루에 관람했다. 한 편은 무주산골영화제에서 뵈었던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이다. 사실 전작 <우리집>에 대한 실망이 컸기에, 이번 영화에도 기대 반 걱정 반의 심정으로 극장을 찾았다. <우리들>이 시종일관 아이들의 아이레벨에서 세계를 담아냈다면, <우리집>은 아무래도 아이들(의 관점이 아니라)을 어른의 대리물로 다룬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고등학생들의 강렬한 키스로 시작하는 <세계의 주인>은 첫 쇼트부터 전작과의 결별을 선언하는 듯하다. 영화의 첫 30여 분 동안 우리는 이 영화가 여성 청소년의 섹슈얼리티와 사랑에 관한 것이라 받아들이게 된다. 영화의 첫 터닝포인트, 주인의 급우 수호가 학생들의 연명을 받기 시작하며 영화는 숨겨진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세계의 주인>은 국내에서 개봉한 극영화 중 '피해자성'에 관해 가장 깊은 숙고를 보여준다. 영화를 보며, 이 영화의 각본이 개발되는 과정에서 거쳐 갔을 무수한 고민과 회의의 시간들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것만 같다. 다만 <세계의 주인>은 모두가 입모아 호평하는 것처럼 '걸작'인가? 이 지점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다. <세계의 주인>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주제에 관한 깊은 이해와 쟁점을 드러내지만, 영화의 주인공인 주인을 둘러싼 인물들의 구성은 다소 주인의 안위를 과잉보호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물론 모든 인물들이 주인에게 우호적인 것은 아니지만, 영화 속 주인은 러닝타임에 비해 많은 조연에 둘러쌓여 있다. 극장용 영화의 러닝타임을 위해 기각되었을 조연들의 서브플롯을 상상한다. 이러한 상상을 하게끔 만드는 것이 <세계의 주인>의 주요한 의도일지도 모른다. 다만 무수한 인물들(주인의 친구, 가족, 봉사모임, 태권도장, 교사 등)로 빽빽히 짜여진 구조 안의 주인을 위치시키는 <세계의 주인>은, 조연들을 다소 도구적으로 (인물들을 착취한다는 것은 아니다) 등장시키고 변화하게끔 한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그럼에도 <세계의 주인>은 우리가 목격했어야 했을 하나의 삶을 충실히 담아낸다. 영화를 보며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본 다큐멘터리 <파기상접>을 떠올렸다. 두 영화의 스토리텔링을 함께 두고 이야기할 자리가 있다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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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다른 한 편은 박봉남 감독의 <1980 사북>이다. "1980년 4월, 광주 이전에 사북이 있었다"는 포스터의 강렬한 홍보문구가 말하듯, 5.18 이전 강원도 정선군 사북면에서 있었던 '사북사태'를 다루고 있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지점은 감독이 내레이션을 맡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1980 사북>의 화자는 감독도, 사건의 당사자인 광부/경찰/계엄군도 아니다. 사건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으며 서울로 대학을 갔다 나이들어 '정선지역사회연구소'를 차리며 고향에 돌아온 황인욱 정선지역사회연구소장이 영화의 내레이션을 맡았다. 그는 어린 나이에 사북사태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음을 고백하면서도, 사북민주항쟁동지회의 2대 회장을 맡은 친형 황인호와 사건 당시 '어용노조' 지부장의 아들인 친한 학우 사이에 놓여 있다. 당사자 자체는 아니지만 당사자에 가까운 인물이랄까. 일종의 중간지대에 놓인 인물로서 그의 내레이션은 단순히 '중립'적인 시선으로 사북사태를 바라보는 것으로 활용되지 않는다. <1980 사북>은 황인욱이 그간 벌여온 연구와 조사, 그리고 그의 내레이션을 따라 사북사태를 연대기적으로 구성하고 소개하는 것을 택하지 않는다. 사건 발생의 순간까지를 연대기적으로, 익숙한 역사서술의 방식으로 가져올 뿐, 그 이후의 구성은 당시 항쟁에 참여한 노조 간부와 광부들, 그들과 연계되어 계엄군의 고문을 받은 여성들, 사태의 광기 속에서 과도한 폭력에 놓인 어용노조 지부장의 아내, 그들의 증언을 따라 지난 40여 년의 시간 이곳 저곳을 바쁘게 오간다. <1980 사북>은 다소 불친절하게 다가올 수 있는 구성 속에서 황인욱의 관점과 위치를 관철시킨다. 사태의 시작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간 동안 '당사자'에서 빠져 있는 동원탄좌 당국과 그들을 지원한 국가로 질문의 방향을 돌리고, 그저 과거의 치부로 사건을 여기며 '잊히기'를 결심한 사북 주민들 사이에 벌어진 틈 사이에서 화해를 시도한다. 물론 그 화해의 결과는 영화에 담기지 않았다. 관객은 그저 황인욱의 내레이션을 따라 재설정된 질문을 목격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 지점에서 <1980 사북>의 구성은 단순히 잊힌 사건을 현재에 소환하는 것을 넘어, 여전히 미해결되고 제대로 설정되지 못한 책임 주체를 차근차근 재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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