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회'라는 연차를 기념하길 꺼리는건가 싶을 정도로 무성의한 기획전 프로그래밍을 보며 실망했던 것 이상으로, 생성형 AI로 제작된 트레일러부터 당황스러웠던 이번 부산국제영화제. 의도적으로 시간표에서 유럽/미국 영화를 줄이고 아랍/동남아시아 영화를 챙겨보자 생각했는데, 배지 예매가 생각보다 빡세서 조금 어그러졌다.
<10점 만점에 10점> 찬즈웨이 2025
동남아시아의 볼룸 문화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 미국 뉴욕 할렘에서 시작된 볼룸 문화는 소셜미디어의 시대를 맞이하여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다. 뉴욕의 '하우스'와 그곳의 '마더'들은 '글로벌 딸'들과 직접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동남아시아에서도 볼룸 문화가 자리잡는다. <10점 만점에 10점>은 2010년대 시작된 필리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베트남, 태국 등의 볼룸 문화를 담아낸다. 각 국가에서 문화를 주도하는 이들의 여정을 담아내는 영화는 이들이 각 국가의 퀴어 커뮤니티와 어떻게 관계맺고, 나아가 글로벌 볼룸 커뮤니티와 어떻게 연계되어 있는지 충실하게 담아낸다. 물론 볼룸 문화를 다룬 기념비적인 다큐멘터리 <파리 이즈 버닝>의 강렬한 아성을 넘어서기엔 찬즈웨이의 접근법은 다소 안전지향적이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퀴어와 퀴어 커뮤니티에 대한 문화적/제도적 차별이 잔존한 국가들이 여럿 있기에 안전함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아쉬움을 뒤로 미뤄둔다면, <10점 만점에 10점>은 자기표현의 장으로서 볼룸 무대가 지닌 역량을 담아낸다. 퀴어 커뮤니티에서 시작된, 일종의 생존을 위한 '하우스'였으며 젠더 정체성과 성적지향의 위계를 극단화해 폭파시키는 볼룸 공연의 이미지들은 그것이 어떤 역동 속에 놓여 있는지를 명쾌하게 그려낸다.
<머리카락, 종이, 물...> 츠엉민퀴, 니콜라 그로 2025
전작 <비엣과 남>에서 베트남 퀴어 남성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츠엉민퀴와 벨기에 출 감독 니콜라 그로가 공동연출한 시적인 민속지 다큐멘터리. 영화는 '룩어'라는 소수어를 사용하는, 60여 년 전 베트남 시골의 한 동굴에서 태어난 노년 여성이 가족을 방문하기 위해 호치민에 도착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소수민족의 시선으로 바라본 호치민은 모든 게 과잉인 공간이고, 이는 그가 사용하는 언어인 '룩어'나 그가 살아온 삶과도 다르다. 영화는 노년의 주인공과 그의 손주들을 교차해가며 담아냄으로써, 베트남에서 소수적 삶을 살아가는 그들의 일상적 풍경이 자연과, 소수어와, 기록과 엮이는 순간들을 포착해내고자 한다. 도입부에 등장한 호치민과 그들이 살아가는 시골 사이의 차이는 단지 도시와 시골, 문명과 비문명 같은 이분법으로 대비되는 것이 아니다. 사라져가는 것에 맹몽적인 안타까움을 표하는 것 또한 이 영화의 목적은 아닐테다. 다만 두 감독은 영화에 담긴 인물들의 삶, 그들의 삶에서 길어낼 수 있는 시어들을 하나씩 풀어놓음으로써 사라져가고 시들어가는 대상의 존재이유를 설득해내고자 한다.
<엘레오노라 두세> 피에트로 마르첼로 2025
1차 세계대전이 종전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20년대 초, 결핵으로 연기에서 은퇴한 연극배우 엘레오노라 두세는 죽을 고비를 넘긴 뒤 다시금 무대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피에트로 마르첼로는 세계적인 우경화의 물결 속에서 파시즘의 발상지로 재차 시선을 옮긴다. 전쟁이 휩쓸고 극단적인 국수주의가 들끓기 시작하는 시대에 예술가는, 특히 대중 앞에서 직접 '퍼포먼스'를 수행해야하는 연극배우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사실 엘레오노라 두세는 정치적으로 영리하거나 사업수완이 뛰어난 인물로 그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어리석다 싶을 정도로 자신의 재능을 마지막으로 불사를 수 있는 무대를 갈망하고, 복귀한 자신에게 쏟아지는 환호와 박수갈채를 통해 얻은 고양감에 흠뻑 도취된 인물이다. 영화의 등장과 함께 쇠락해가는 연극을 끝까지 붙잡고자 하는 그는 단지 전쟁의 후유증을 앓는 이탈리아 사회를 위해 배우가 할 수 있는 것은 좋은 연극을 공연하는 것 뿐이라 믿는 순진한 인물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꿈꾸는 연극의 전당을 건설해주겠다는 무솔리니의 감언이설도, 그에게는 유효한 약속으로 받아들여진다. 파시즘의 선구자들이 보여주었고 지금의 극우 정치인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의 거대한 쇼처럼 느껴지는 정치무대의 현장은 예술에서의 고양감과 맞닿아 있다. 두세는 예술의 고양감과 정치의 고양감을 구별하지 않은 채 그 속으로 투신한다. 변화하는 정치지형을 파악하거나 정말로 이탈리아를 위한 행동이 무엇인지 고뇌하는 것은 그가 하려던 것도 아니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치적 발언으로 유명세를 탄 <마틴 에덴>의 마틴 에덴이나 민중가수로 여겨지던 <루치오를 위하여>의 루치오 달라 등 그간 마르첼로가 다뤄온 다른 예술가들에 비해, <엘레오노라 두세>는 탈정치화된 예술이 가져오는 위협을 두세의 말년을 통과하며 그려낸다. 마르첼로 영화에 전반적으로 등장하던 아카이브 푸티지들이, 이번에는 민중(people)을 대중(mass)로 만들어내는 스펙터클의 아카이브로 꾸려짐으로서 이러한 이야기를 늘어 놓는다.
<트루먼의 사랑> 김덕중 2025
자신을 '트루먼'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트루먼 쇼>의 주인공처럼 세계가 실은 거짓이며 자신은 거대한 스튜디오에 갇힌 인물이라고 믿는 사람들. 그들은 정체불명의 영어가 들려오고 주변 사람들이 동작을 반복하는 '에러'를 함께 경험함으로써 자신이 트루먼이라고 믿는다. <트루먼의 사랑>은 이것을 믿는 세 남녀의 이야기다.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세 사람이 어떻게 함께 사랑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다가 에러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출구'를 찾고자 한다면, 후반부는 먼저 떠난 두 사람을 추적하고자 하는 남은 한 트루먼의 추적극으로 변모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트루먼 소셜 클럽'의 모임장은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이라 믿는 '트루먼 증후군'을 언급한다. 이 영화의 관객인 우리들은 영화 속 세 트루먼이 목격한 에러를 함께 목격한다. 우리는 영화의 '주인공'인 세 사람을 보고, 그들이 '트루먼'이라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다. 영화는 그것을 벗겨내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이들이 정말로 그러한 것인가? 이들은 짐 캐리처럼 '굿 모닝, 굿 애프터눈, 굿 이브닝'이라 인사를 남기고 세상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인가? 아쉽게도 영화는 그들의 여정을 끝까지 쫓는 대신 우회로를 택한다. 중반 이후 주인공이 전환되며 일종의 추적극이 되는 <트루먼의 사랑>은 먼저 출구를 향해 떠난 두 사람을 쫓는 대신 의심을 품은 채 남겨진 한 사람에 주목한다. 그 순간, 영화는 서서히 동력을 잃는다. 누구나 주인공인 것처럼 대학로의 행인들을 담아내던 긴 트래킹숏과 같은 반짝이는 순간들이 있지만, 145분의 러닝타임 모두가 그렇게 반짝이진 못한다.
<공존이라니, 웃기시네!> 앰버 파레스 2025
유대계 루마니아인 아버지와 유대계 이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노암은 어린 시절을 '평화의 오아시스'라는 협동조합 마을에서 보냈다. 이곳은 팔레스타인 가정과 유대인 가정이 함께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한 마을이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팔레스타인인들과 함께 성장한 노암은 공존의 가능성을 일찍이부터 깨닫고 평화와 공존을 설파하는 평화운동가가 된다. 학창시절부터 쌓은 커리어를 통해 20대 중반에 나이에 UN에 입성한 그는 정치인의 꿈을 꾼다. 영화 안에서는 장난스럽게 언급되지만, 코미디언 출신 대통령 젤렌스키를 보고 자신 또한 운동과 정치의 방식으로서의 스탠드업 코미디를 채택한 그는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이 함께 웃을 수 있는 코미디를 만들고자 한다. 하지만 그 꿈은 팬데믹으로 한번, 부정부패가 드러난 이후 빠르게 극우화된 네타냐후 정권으로 인해 발생한 팔레스타인 탄읍으로 다시 한번 무너진다. 2023년 10월 7일 시작된 비극은 '공존'이라는 노암의 가치관을 뒤집는다. 집단학살을 목격한 그에게 공존은 그저 허울 좋은 구호일 따름이다. 점령, 식민지의 완전한 종식 없이는 공존도 없음을 깨달은 그는 마이크를 들고 거리로 향한다. <공존이라니, 웃기시네!>라는 제목은 그러한 순간들을 지나간 뒤 노암이 진행한 스탠드업 코미디쇼의 제목이다. 영화는 그의 스탠드업을 보여주는 중간중간, 그의 대사와 맞물리는 과거의 이미지들을 보여준다. 그렇게 노암의 코미디는 지금 여기를 위한 발언으로 변화한다. 공존을 말히던 소녀가 어떻게 국가의 반역자로 불리길 주저하지 않는 정치적 코미디언으로 변화했는지 목격할 수 있는, 지금의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만행의 현재를 내부자의 시선에서 그려내는 영화.
<누마카게 시립 수영장> 오타 신고 2025
2024년, 52년 간 운영된 사이타마시의 누마카게 시립 수영장이 문을 닫았다. 시 교육위원회가 늘어난 인구를 감당하기 위해 수영장을 철거하고 학교를 짓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며 방학을 맞은 어린이와 부모들의, 운동이 필요한 노인들의 보금자리로 여겨진 수영장의 폐쇄에 반대하지만 역부족이다. 철거 중인 수영장의 이미지로 시작한 영화는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제시한 '죽음의 5단계' 부인-분노-협상-우울-수용을 스토리텔링의 구조 삼아 수영장의 마지막 한달 반 정도를 카메라에 담아낸다. 그 사이에는 알게모르게 극화된 에피소드를 추가함으로써 수영장이 만남과 교차의 장임을 드러낸다. 제목만 듣고 프레데릭 와이즈먼이나 소다 카즈히로와 유사한 스타일의 다큐멘터리, 혹은 수영장의 폐쇄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운동을 중점적으로 담아낸 액티비즘 다큐멘터리일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오타 신고는 시민들의 운동이나 시의회에서의 발언들은 짧막하게만 담아낸 채, 수영장의 죽음이라는 테마에 노스탤직한 방식으로 접근한다. 아름답게 촬영된 여름날의 수영장은 그곳에 대한 추억도, 기억도 없는 관객들마저 노스탤지어를 느끼게끔 한다. 그러한 방식이 대단히 흥미로운 것은 아니지만, 한 공간의 마무리를 받아들이는 시민과 직원들의 흥미로운 태도를 목격할 수 있다.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 알렉스 바크리 2025
2008년 독일의 영화감독 마르쿠스는 서안지구 제닌(Jenin)의 폐쇄된 영화관 '시네마 제닌'을 재개관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이스라엘과 EU의 펀딩을 받아 진행된 프로젝트 속에서, 40년 넘게 극장의 영사기사로 일해온 후세인은 중심점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독일인들이 말하는 '영사 전문가'는 제닌에 남아 있는 오래된 영사기나 새로 들여온 영사기의 설치부터 애를 먹는다. 후세인은 자신이 아직 영사기사로서 가진 기술과 자부심이 있다고 믿는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그는 영사기를 다시 작동시키고자 하고, 오래 방치된 영사기에 필요한 부품을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바쁘게 돌아다닌다. 영화는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진행된 시네마 제닌 재개관 프로젝트 동안의 후세인을 담아낸다. 2008년이면 이미 영화관 영사의 헤게모니가 디지털로 넘어간 시기임에도, 팔레스타인의 낙후된 영화관에서는 여전히 필름 기반의 영사시스템이 유효하기 때문에 영사기사의 존재는 중요하다. 하지만 독일에서 넘어온 프로젝트의 실행자들은 그러한 팔레스타인의 실정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서구에서 낙후된 지역을 돕는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익숙한 '백인 구원자' 서사 속에 자신을 위치시킨다. 다른 한편으로, 영사기술의 헤게모니 변화에도 불구하고 40년 이상 영사기사로 일해온 후세인의 모습은 영화의 디지털 이행기 속에서 잊혀지고 실직하는 영사기사라는 직군의 현재를 보여준다. 극장의 재건과 재개관에 있어 영사기사는 그다지 중요한 역할이 아니라는 듯이, 프로젝트의 진행자들은 후세인의 노고와 그가 지켜온 영사의 유산에 알맞은 보수와 명예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러한 레이어들은 영화의 기초적인 지지체로서 필름과 필름영사기, 그것들을 다루는 영사기사의 쇠락을 한 축으로, 다른 한 축에는 이스라엘과 독일의 지원이라는 조건 속에서야 재개관할 수 있으며 필요한 부품을 구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행정 절차를 거쳐 텔아비브로 향해야 한다는 점령지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한 축으로 설정하게끔 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축은 일종의 문화 제국주의 프로젝트로서의 시네마 제닌 재개관 프로젝트를 바라보게끔 한다. 시네마 제닌의 재개관 프로젝트는 이미 2011년 프로젝트를 주도한 마르쿠스 베터에 의해 <시네마 제닌>이라는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공개되었다.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은 재개관 프로젝트와 다큐멘터리를 주도한 마르쿠스 베터 등의 서구인들이 정말로 시네마 제닌이 서안지구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어떠한 공간으로 기능해야하는가에 관한 고민이 결여된 것이었음을 드러낸다. <나의 친애하는 후세인>의 마지막은 재개관으로부터 7년 뒤 영화관은 다시금 문을 닫았고, 그로부터 몇 달 뒤 후세인이 세상을 떠났음을 알려준다. 영화의 제작자인 알렉스 바크리는 독일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출신 감독이자, 동시에 마르쿠스 베터의 <시네마 제닌> 제작 당시 촬영으로 참여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부산영화제 GV에서 그는 팬데믹 이전에 마무리된 후세인의 이야기가 2025년에야 공개된 것에 그저 '운'이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하지만 2025년의 시점에서 '시네마 제닌'과 영사기사 후세인의 이야기를 목격하는 것은, 우리를 이전과 다른 맥락으로 인도한다.
<마른 잎> 알렉산드레 코베리제 2025
영화는 어느 날 편지를 남기고 사라진 사진기사 딸을 찾는 아버지 이라클리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이라클리는 레반이라는 남자와 함께 조지아 전역의 축구장을 돌며 딸을 찾는다. 하지만 우리는 186 분의 러닝타임 동안 레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단지 우리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서만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구형 소니 핸드폰으로 촬영된 이미지는 유튜브에서 360p로 화질을 설정한 것처럼 뭉개지고 픽셀화되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조지아의 풍경을 새로운 방식으로 감상하게 한다. 그렇다고 <마른 잎>의 배경이 과거인 것도 아니다. 이라클리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을 영화 내내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이 영화는 조지아를 그러한 방식으로 담아내길 결정했을 뿐이다. 어떤 면에서 코베리제의 선택은 저화질의 디지털 이미지가 8mm 필름이 특정한 감성을 갖는 것과 유사하다고 여기는 것만 같다. 노출도 제대로 맞춰지지 않으며 영화 내내 (감독의 형제인 데이비드 코베리제가 연기한) 이라클리의 얼굴조차 제대로 확인할 수 없지만, 반복되는 듯한 조지아의 풍경(숲, 도로, 그물 없는 골대 등)을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다. 딸이 들렀을 법한 축구장들을 찾아다니는 이라클리의 여정은 부재하는 대상을 뒤쫓는, 그야말로 유령을 뒤쫓아가는 로드무비나 다름없다. 동시에 그와 동행하는 레반 또한 모습 없이 목소리로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영화적 유령과 다름없다. 유령과 동행하며 유령적 존재를 뒤쫓는 로드무비, 저화질의 뭉개진 디지털 이미지는 조지아의 풍경을 노스탤직한 감상주의 속에서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뚜렷한 경계 없이 풍경에 녹아드는, 그럼으로써 영화 내의 유령이나 다름없게 느껴지게끔 하는 촬영이랄까. 얼핏 홍상수의 <물안에서>가 그러했듯 후기 인상주의 회화의 방식을 영화에 끌어오는 시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마른 잎>을 바라본다면, 이 영화의 저화질은 고화질의 이미지가 갖는 투명성, 이미지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그것에 개입하고자 하는 관람자(혹은 목격자)의 욕망을 배제하고 이라클리의 시적인 여정에 동참하게끔 하는 시도로 바라보는 게 적절하지 않을까. 3시간 동안 한 편의 영화를 봤음에도 이라클리의 얼굴도, 그와 동행한 레반의 정체도, 그들이 찾던 딸의 정확한 모습도 확인할 수 없는 관객들에게 남는 것은 거대한 원을 그리며 조지아 곳곳의 풍경을 담아낸 하나의 긴 여정일 따름이다. 잘 보이지 않더라도, 스크린 너머의 대상과 우리 사이에 길이 있다는 것만 확신하면 된다, 라고 <마른 잎>은 주장한다.
<시라트> 올리베르 라시 2025
사막에서 레이브 파티가 열린다. 이곳을 찾은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그들은 실종된 딸이 레이브 파티를 찾는다는 말을 듣고 사막으로 향했다. 군대에 의해 갑작스레 종료된 파티에서 이들은 딸을 찾지 못했고, 다른 레이브를 찾아 떠나는 한 무리의 레이버들의 여정에 동참하게 된다. 종종 <매드맥스>를 연상시키는 사막에서의 자동차 질주를 보여주고, 린치의 영화 속 기나긴 도로에서 방황하는 이들처럼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여주며, <소서러> 속 트럭들의 고행을 사막으로 옮겨온 것 같은 순간들을 담아내는 <시라트>는 무엇보다 전쟁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화가 절반을 넘어가는 시점부터 등장하는 죽음들은 그것의 잡작스러움 자체만으로도 충격을 주지만, 가족과 친구를 잃은 슬픔을 온전히 감각할 시간마저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충격적이다. <시라트>는 영화의 배경이 명확하게 지시되지 않고, 3차 세계대전에 준하는 전쟁이 일어났다는 라디오 음성만 나올 뿐 어떠한 정세 속에 놓여 있는지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단지 오랜 시간 전쟁이 있었고, 더욱 큰 전쟁이 도래했다는 사실만이 알려진다. 마치 <매드맥스>의 세계가 도래하기 직전의 시점인 것처럼. 레이브는 전쟁으로 인해 종료되고, 전쟁의 흔적은 애도의 뜻을 담은 춤사위를 가로막는다. 아이와 여성, 장애인은 먼저 위협에 처한다. 전쟁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지만, <시라트> 곳곳에 도사리는 전쟁의 흔적과 위협은 실존적인 위협으로 다가온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의문으로 가득하다. 아버지는 왜 딸을 찾고자 어린 아들(그리고 강아지)와 함께 사막으로 향했는가? 사막과 사막 사이를 돌아다니는 레이버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 것인가? 이들이 놓인 사막은 대체 어떠한 공간이며 무엇에 휘말린 것인가? 올리베르 라시는 그러한 의문을 품을 여유를 주지 않은 채 충격적인 직유를 던져 놓는다. 어떤 지점에선 탁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체할 것처럼 과도하다. 영화는 무책임하게도 언제든 다가올 수 있는 죽음과 적절한 애도의 시간마저 가질 수 없는 전쟁의 감각을 관객들에게 주입할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감각이 '전쟁의 느낌'이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밖에 없다.
<드라큘라> 라두 주데 2025
한 루마니아 감독이 '드라큘라'를 영화화하고자 한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을 드라큘라라고 믿던 늙은 재연배우의 이야기를 영화화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이 다소 지루하다고 느낄 관객들을 위해 폭력적이고 성적이며 상업적인 영화를 만들어보고자 한다. 가상의 AI 서비스와의 대화를 통해 생성된 여러 편의 단편들과 늙은 재연배우가 나오는 큰 줄기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등장하고, 영화 속 감독은 그 변사처럼 그 사이를 설명한다. '드라큘라'라는 루마니아 배경의 오래된 전설을 끌어오는 라두 주데의 170분 짜리 신작은 그것이 품은 익숙한 은유들을 풀어 놓는다. 드라큘라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착취에 관한 것이다. 드라큘라는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착취에 관한 것이다. 드라큘라는 평민에 대한 귀족의 착취에 관한 것이다. 등등... 다른 한편으로 <드라큘라>는 소셜미디어나 유튜브 등을 적극적으로 영화 안에 끌어온 주데의 근작들을 떠올렸을 때 당연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생성형 AI의 도입을 통해 지금의 미디어 환경이 자아내는 산만함을 구현한다. 그는 왜 드라큘라라는, 영화의 역사 전체에서도 너무나 자주 등장해 고루해질 대로 고루해진 대상을 선택했는가? 그리고 그 대상이 어떻게 지금 영화화될 수 있는가? 주데의 답은 영화화 되는 것은 재미없는 일이며, 그렇기에 드라큘라라는 대상은 지금의 세계를 묘사하는 낡아빠진 은유이자 제멋대로 변형하며 유희할 수 있는 대상일 수 있다, 라는 것이다.
<쓸모 있는 귀신> 랏차품 분반차촉 2025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단 한편의 발견을 고른다면 이 영화여야 하지 않을까. 고장난 청소기의 A/S를 위해 수리기사를 부른 자칭 '트랜스젠더 지식인'은, 수리기사를 통해 청소기가 귀신에 빙의된 것임을 알게 된다. 수리기사는 공장에서 죽은 노동자가 귀신이 되어 종종 전자제품에 빙의한다고 말해주며, 공장주의 둘째아들 마치의 죽은 아내 냇 또한 그런 귀신이라고 말해준다. 그렇게 수리기사는 청소기에 빙의한 냇과 돌아온 아내를 반기는 마치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흥미롭게도 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태국의 아이, 교육자, 농부, 군인 등을 담은 부조가 제작되는 과정에서 출발한다. 광장에 놓여 있던 부조는 광장이 거대 쇼핑몰로 재개발되는 동안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그 과정에서 파손된다. 태국 민중을 기리는 부조가 철거되고 파손되며 재개발되는, 기억에서 점차 지워진다는 것, 영화는 귀신이 사람들의 기억을 통해 존재할 수 있다는 태국의 미신을 적극적으로 영화에 끌어들인다. 다방면으로 서브플롯을 풀어내고 무수한 인물들을 등장시키며 대기오염/재개발/퀴어/노동/산재/민주화/정치/학살/결혼/소수민족 등에 관한 논평을 쏟아내는 영화는 결말에 이르러 그것을 한데 엮어내는 솜씨를 선보인다. 귀신에 관한 전통적 민담을 현재의 의제를 풀어내는 도구로 적절히 활용하는 방식, 아키 카우리스마키를 연상시키는 미쟝센과 유머코드는 130분의 짧지 않은 러닝타임 동안 집중할 수 있게끔 해준다. 이 정도의 응집력 있는 이야기를 솜씨 있게 풀어내는 영화는 실로 오랜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