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 이슈로 영화를 다양하게 관람하지 못함...
<푸틴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 파벨 탈란킨, 데이비드 보렌스타인 2025
영화의 감독인 파벨 탈란킨은 러시아 우랄 지역의 소도시 '카라바쉬'의 종합학교 교사다. 교사지만 수업을 진행하기보단, 교내의 각종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하며 기록하는 역할에 가깝다. 때문에 그는 언제나 카메라를 들고 학생들을 찍는다. 그러던 중 2022년 2월 푸틴이 특수군사작전을 개시함으로써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침공이 시작된다. 전쟁이 장기화됨과 동시에 교육부는 파시즘적 군사교육 지침을 전국 학교에 전달하고, 그것을 촬영해 교육이 진행되었음을 보고할 것을 주문한다. 국기계양식과 국가제창으로 시작된 지침은 어느덧 와그너 용병들의 실전 교육으로까지 확대된다. 자신과 함께했던 학교의 졸업생들이 전장에 투입되는 것을 지켜보던 파벨은 자신이 촬영한 것들을 들고 망명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이 영화의 간략한 줄거리이다. 푸틴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이라는 번역제와 달리, "Mr. Nobody Against Putin"이라는 원제는 파벨이라는 '누군가'에 집중한다. 이 영화는 푸틴과 침략전쟁에 반대하는 이들 일반이 아니라, 지역 소도시의 학교가 서서히 군사화되는 과정의 의도치 않은 기록자인 파벨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침략 이전에도 독재에 가까운 푸틴의 정치와 군사주의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주장했던 그는 전쟁 발발과 함께 서서히 지역의 아웃사이더가 되어간다. 자칫 변절자, 배신자, 비국민으로 낙인찍힐 수 있는 상황 속에서, 그는 자신의 카메라 앞에서 웃고 떠들며 춤추던 아이들이 점차 군사주의의 물들어가는 것을 묵묵히 담아낸다. 그럼으로써 이 영화는 교육의 영역에서 파시즘 프로파간다가 어떻게 아이들을 잠식해 나가는지, 세계적인 극우화의 경향 속에서 교육이 한 학교, 한 지역, 한 국가의 행방을 어떻게 바꿔놓을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드러낸다.
<어머니에 대한 추측> 조진석 2025
해외 입양아인 감독은 어머니를 찾고 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어머니의 정보를 가지고 서울과 도쿄의 사설 탐정을 통해 어머니의 행방을 찾고자 한다. 하지만 이 시도는 번번히 실패한다. 65분의 러닝타임은 그러한 시도의 과정 속에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쓴 서간문이다. 영화를 만드는 그는 어머니를 찾는 여정을 몇몇 영화와 결부시킨다. 특히 그는 임권택의 <길소뜸> 속 이산가족 찾기 장면에 어머니가 엑스트라로 출연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영화를 수십번 돌려보며 어머니를 찾는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를 찾을 수 없다. 어느 순간 그는 어머니를 왜 찾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 단지 그는 어머니에 대한 추측을 하고 있을 뿐이다. 서간체 형식의 에세이 영화인 이 작품은 가능한 두 갈래의 길을 포기한다. 하나는 해외입양과 이산가족 등 근현대사의 비극과 자신의 상황을 결부시키는 신파적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어머니를 찾아가는 과정을 찬찬히 풀어나가는 일종의 추리극/탐정극일 것이다. 영화는 둘 모두를 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어머니를 정말로 찾아지는 것과 거리를 두고자 하는 것마냥 이 과정을 낯설게 만든다. 다만 이 전략은 성공적인가? 우리는 감독이 써내려간 편지의 세부를 알지 못한 채 그것을 쫓아간다. 관객은 <길소뜸>의 김지미만큼이나 확신 없이 화면을 바라본다. 에세이에 정교함을 바라는 것이 일면 부당함을 알고 있지만, 조금 더 정교하게 이야기를 풀어갔다면 어땠을까.
<도라지 불고기> 양지훈 2025
*지난 6월 진행된 동명의 전시서문 발췌로 대체...
논픽션과 픽션을 가리지 않고 재일조선인은 역사의 피해자로, 차별과 혐오 속에서 살아가는 소수자로 재현되었다. 물론 이것의 재현은 중요한 문제다. 여전히 청산되지 않은 일제의 과오가 존재하고, 차별과 혐오는 현재진행형이다. 박수남이나 양영희의 다큐멘터리를 보지 않아도 우리는 피해의 역사를 기억할 수 있고, <피와 뼈>(2005)나 <파친코>(2022~2024)를 보지 않아도 차별의 시간을 알 수 있으며, <우리 학교>(2006)나 <나는 조선사람입니다>(2021)을 보지 않아도 조선학교 학생들에 공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영화들은 그것을 재현한다. 그러한 재현이 비윤리적이거나 잘못되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때의 재현은 필요한 정치적 전략에 가깝다. 피해와 가해의 스펙터클, 일본과 한국, 북한을 넘나드는 재일조선인 인물들의 내러티브는 매력적이고, ‘기억하기의 정치’라는 측면에서 효과적이다. 피해와 차별을 증언하고 재연하는 얼굴은 영화적 장소이자 피해자됨과 약자됨이 체현된 표면이다. (중략) 얼굴 없는 이들의 이야기로 구성된 다큐멘터리는 무엇인가? 관객은 카메라 앞의 주어진 대상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도라지>와 <불고기>의 다큐멘터리적 진정성이나 진실성을 의심할 수도, 심지어 그것이 비윤리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이러한 비판은 일정 부분 타당하다. 그들의 이야기만을 취해 작가의 입맛대로 재일조선인을 재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작품이 담아내는 재일조선인의 이미지에 집중해보자. 이들의 삶은 일제강점기와 분단이 만들어낸 역사적 아이러니 속에서 조총련과 조선학교라는 이름의 폐쇄적 공동체와 강제되는 국적 선택의 문제 속에 놓인다. 도입부에 열거한 작품들에서처럼 그것은 이들의 피해자됨과 약자됨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들의 삶이 피해자나 약자의 규범 속에 놓이는가? 학교에서는 북한 노래를 공연하지만 노래방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가요를 부르는, 여느 젊은이들처럼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진로를 고민하는 평범함이 여기에 담겨 있을 뿐이다. 이 평범함을 어떻게 찍을 수 있을까? 평범함에는 매력적인 내러티브도, 눈길을 사로잡는 스펙터클도 없다. 작가는 평범함의 유일한 스펙터클일 수 있을 얼굴마저 지워버렸다. 행여 관객이 저들의 얼굴을 재일조선인의 초상이라는 스펙터클로 받아들일 여지마저 배제한다. 운동장의 인공기, 강당에 걸린 북한 지도자들의 초상, 한복을 입고 안무를 추며 부르는 북한노래. 이것들은 얼굴 없는 재일조선인이 놓인 역사가 아니라 환경을 환기한다. 그들이 지금과 같은 삶을 살게 된 원인이 아니라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양지훈은 찍는다. <불고기>에서 작가가 스쳐지나가듯 말하듯이, 한국을 살아가는 (아마도 전시를 찾은 대부분의) 관객들은 경험하지 못했기에 궁금해하기도, 부러워하기도, 이상하게 바라보기도 하는 삶.
<반칙왕 몽키> 박홍열, 황다은 2025
'몽키'라는 닉네임으로 살아가는 전업주부 아빠는 부부 성역할에 대한 규칙들에 반칙을 가하며 살아간다. 아내의 계획에 따라 딸 둘, 아들 둘, 총 네 아이를 양육하며 살아가는 그의 삶은 전업주부 아빠, 외벌이, 마을공동체 등 한국 사회에서 익숙치 않은 단어들과 엮여 있다. 9개의 '반칙'을 제시하는 <반칙왕 몽키>는 양육에 있어서도 획일화된 정상의 루트를 강조하는 현재와 거리를 두고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독특한 아빠에 주목한다. 포대기에 어린 아이를 매고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길거리 벽화를 칠하던 인부에게 페인트를 빌려와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며, 자신의 자녀들은 물론 동네의 자녀들이 먹을 식사를 준비하고, 종종 동네 어르신의 고충을 해결해주기도 하는 그를 보고 있지만, 같은 24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인지 이해할 수 없는 밀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만 같다. 다만 이 영화는 그것을 성반전된 '슈퍼우먼 싱글맘' 서사로 풀어가지 않는다. 성미산 마을공동체를 중심으로 구성된 일종의 공동양육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에 관한 하나의 답을 <반칙왕 몽키>는 담아낸다. 흥미로운 것은 촬영감독인 박홍열이 영화의 연출에 참여했음에도, 영화의 대부분이 '몽키'가 직접 촬영한 세로 화면비의 푸티지들로 채워져 있다는 지점이다. 촬영에 있어 박홍열, 황다은 감독의 디렉션이 어느 정도까지 개입되어 있는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영화의 대부분은 주인공 몽키가 직접 촬영한 장면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이것은 몽키와 그의 가족이 몸담고 있는 마을공동체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기록하는 시선이 몽키라는 지점에서 차별화된다. 그 지점이 다소간 '영화'에서 멀어지는 것 같으면서도, 지금의 기록이라는 것이 어떤 기기와 플랫폼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흔들리는 사람에게> 임수빈 2025
감독인 임수빈은 서울대 재학 당시 미술대학 학생회장을 하며 학생운동에 투신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졸업 이후 운동을 떠났던 그는 여전히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 소화해야 하는지 고뇌하고 있다. 그는 2010년대 초반 함께 운동에 투신했던 친구들을 찾아나선다. 누군가는 운동의 경험을 바탕삼아 공부를 이어가고, 누군가는 자신의 정체성에 보다 관련된 영역으로 옮겨갔으며, 누군가는 운동의 경험과 감정을 작업으로 풀어낸다. 학생운동의 마지막 불꽃과도 같은 반값등록금 투쟁이 불타오르는 순간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유력 진보정당의 해산과 함께 힘을 잃어가는 과정을 영화는 그 한가운데에 있던 자신과 친구들의 시선으로 재구성한다. 당시를 기록한 여러 대안 미디어, 뉴스 보도 사진, 개인적인 사진첩에서 끌어온 저화질의 이미지들은 10여 년 전이라는,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과거와의 거리감을 드러내는 듯하다. 이명박근혜 정권 동안 있었던 수많은 사건은 학생운동이 마지막 불꽃을 불태울 수 있는 시간임과 동시에 그 반대에 놓인 학생세력이 부상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2014년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 대학 내에 팽배했던 '운동권 혐오'를 기억한다. 나아가 2016년 이화여대 시위부터 2024년의 동덕여대 시위까지 존재해온 있었던 운동권에 대한 (다소 왜곡된) 거부반응과 트루스포럼과 같은 극우적 학생조직이 서울대를 중심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던 것을 기억한다. <흔들리는 사람에게>는 한 출연자의 말처럼 '학생운동'의 밸런스가 진보에서 극우로 기울기 시작한 순간의 기록이자 회고이기도 하다. 그들의 운동은 결국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 혹은 빠르게 우경화되는 세계 속에서 그들은 마지막 방파제를 자처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첫 장면은 윤석열 탄핵 집회다. 계엄과 두 번째 탄핵을 경험한 우리에게, 이 영화의 기록과 고민, 운동에 투신했던 이들이 겪은 고통과 얻은 성취를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감독은 그 한복판에 있던 당사자로서 그 고민을 함께 해보자고 제안한다.
<마당이 두 개인 집> 설수안 2025
전작 <씨앗의 시간>을 통해 농촌/농업과 살림에 관해 다루었던 설수안 감독의 신작. 영화는 오세봉이라는 노년 여성의 생활과 감독 자신이 겪는 원인 모를 통증에 관한 내러티브를 풀어낸다. 고령의 노인인 오세봉은 바구니를 보행기 삼아 짚고 다니며 텃밭에서 상추를 일구고 몇 마리 고양이들에게 밥을 챙겨주며 생활한다. 농촌에서 홀로 살아가는 그는 자신을 찾아오고 연락하는 감독에게 자신에 대한 돌봄을 요구한다거나, 어떤 호의를 댓가로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감독이 자막과 내레이션으로 전달하는 그의 말들은 자신이 먼저 연락하겠다는 의사 표명들이다. 그는 자신의 돌봄의 권역에 감독을 포괄하고자 한다. 영화 말미의 자막에서 감독은 오세봉을 '살림 노동자'로 표현한다. 돌봄 노동자도, 자기돌봄가도 아닌 살림 노동가는 무엇인가? 살림은 자신과 타자를 포함하는 이들 모두를 돌본다는 맥락에서 사용될 수 있다. 오세봉의 살림에는 자신과 자신을 찾아오는 감독, 밥을 주는 고양이들, 텃밭의 식물들이 포함될테다. 그가 기른 (상추가 아니라) 상치의 씨앗을 도시의 작은 화분에 심는 감독의 행위는 그러한 살림 영역의 확장과 포괄을 보여준다. 다만 이 영화는 이러한 아이디어들을 피상적으로 영화 곳곳에 흩뿌려두고, 그것을 묶어내는 것을 관객의 몫으로 남겨둔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그저 농촌에 홀로 살아가는 노인을 돌보는 감독의 일인칭 에세이로 오독될 여지 또한 남긴다.
<오, 발렌타인> 홍진훤 2025
2004년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전개된 비정규질 철폐 투쟁 중 노동자 박일수가 분신한다. 20여 년이 흘러 진행된 추모제에서 그의 약력이 읽히는 것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오, 발렌타인>에서 화면을 나눠 갖는 가수 우창수와 노동운동가이자 시인인 조성웅이 등장한다. 두 사람은 박일수가 분신했던 현장에 동참했던 동지들이기도 하다. 영화는 얼핏 그들의 회고담을 담아내는 것만 같다. 박일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비정규직 철폐 투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동지에 분신에 어떤 부채감을 갖고 있는지... 다만 이러한 이야기들은 영화의 주가 되지 않는다. 박일수의 죽음으로부터 20년이 흐른 시점에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홍진훤의 카메라는 포착하고자 한다. 두 개로 나뉜 화면을 나눠갖는 두 사람은 겉으로 보기엔 운동 현장에서 은퇴한 것 같지만, 그들의 내적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영화는 스스로 수차례 언급되듯 "혁명의 시간을 앞서서 실행하는 자들"로서 그들을 위치짓는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영광을 되찾자는 아카이브 영상 속 노동자의 외침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우리는 고용유연화가 확대된 것을 넘어 플랫폼 노동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우창수와 조성웅 두 사람은 그 실패에 머무르지 않는다. 물론 겉보기엔 그들은 실패자이며, 새로운 연대할 현장을 찾아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말, 강화된 자본주의 구조 안에 기후위기부터 민주주의의 위기까지 모든 것이 엮여 있으며 그것을 타파하는 혁명의 시간이 요구된다는 주장에는 변함이 없다. 오히려 그들의 관심은 기후위기로, 페미니즘으로, 동(남)아시아 전반의 민주주의로 확장된다. 그들은 마치 혁명의 시간이 이미 도래한 것처럼 발언하고 있다. 홍진훤은 그들의 말과 노랫말, 시구절과 함께 실패한 혁명들(1990~2000년대 초반 울산지역에서 있었던 파업과 투쟁)의 이미지를 병치시킨다. 그들이 이미 살아온 혁명의 시간을, 20년 후에 바라보는 우리는 그것이 실패라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가? <오, 발렌타인>은 그 반문을 던지기 위해 104분 동안 인터뷰와 이미지를 바라보게끔 한다. 뜬금없게도 영화 속 우창수의 마지막 말은 "그리고 지금까지의 얘기는 안 들어도 좋다."이다. 혁명의 시간을 이미 실행해본, 그 반동으로 반-혁명의 시간을 경험한 그들은 투쟁의 전선을 매번 새롭게 설정한다. 그들은 또 다시 도래할 혁명의 시간을 지금-여기로 끌어올 궁리를 여전히 하고 있고, <오, 발렌타인>은 그에 화답한다.
<에티엔의 정원> 김민정 2025
프린지 페스티벌의 한 공연을 보는 것 같았다...라는 생각 말고는 별 생각이 안 든다...
<지금, 녜인> 임대청 2025
미얀마 만델레이로 자원봉사를 떠났던 최진배는 그곳에서 녜인 따인이라는 여성과 만나 연애를 시작하고, 함께 한국으로 와 부부의 연을 맺는다. 함께 삶을 꾸려가던 2021년 2월 1일,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다. 아웅산 수치 여사를 비롯한 미얀마 민주화 투쟁의 주요 인사들이 체포되고, 군부에 저항하는 시민들은 폭력적으로 진압당하기 시작한다. 최진배는 '미얀마 투데이'라는 이름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개설해 한국인들에게 미얀마 뉴스를 전달하기 시작한다. 녜인은 미얀마 현지의 지인들과 연락해 그들의 소식을 한국에 전달한다. 시간이 흐르고 군부의 집권이 점차 길어지자, 미얀마에 대한 국내 보도는 줄어들고 사람들의 관심은 사라진다. <지금, 녜인>은 군부 쿠데타 발발부터 현재의 이르는 시간 동안 두 사람의 활동을 기록한다. 그들은 배달 플랫폼의 배달기사로, 음식점 종업원으로 일하며 번 적은 돈을 모아 미얀마에 송금하기도 한다. 불안정한 인터넷과 VPN을 통해서야 겨우 안전하게 연락할 수 있는 미얀마의 시민들은 군부의 탄압과 학살 속에서도 세 손가락을 치켜든 채 희망을 잃지 않고자 한다. 이 영화는 그들이 어떻게 희망을 잃지 않았는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2020년대 들어 세계 각지에서 학살과 내전, 쿠데타가 발발하고 민주주의와 시민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지금, 녜인>은 미얀마를 이야기함과 동시에, 우크라이나에서, 팔레스타인에서, 방글라데시에서, 네팔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고 군사주의와 파시즘에 대적하여 생존권을 사수하고자 하는, 나아가 생존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국경 너머의 우리가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군부에 의해 불타버린 마을, 시위 도중 다친 사람들, 군부와 전투 중 사망한 민병대원들의 사진을 뽑아 벽에 붙여 놓는 부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의 가족이 위협받을 수도 있는 상황임에도, 녜인은 미얀마의 상황을 전파하는 데 힘을 쏟는다. 심지어 그의 아버지가 한 차례 체포되고, 위험을 피하기 위해 여동생이 한국에 와야하는 상황 속에서도 말이다. 영화의 제목이 가리키는 '지금'은 녜인이라는 개인의 지금을 말하는 것임과 동시에,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물론 영화 속 최진배의 말처럼 지금 우리 눈앞에 닥친 위기 또한 해결해야 할 문제다. 한국에서는 계엄령을 통한 내란이 시도되었고, 그것은 여전히 완전한 해소 상황에 이르지 못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지금'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생존하고 있는지, 군부는 어떻게 시민을 탄압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지, 군사주의는 어떻게 생존을 위협하는지 두 눈 부릅뜨고 목격해야 한다. 라고 <지금, 녜인>은 강력하게 발언하고 있다.
<스탠바이, 액션!> 안창규 2025
故 박종필 감독이 있었다. 빈민과 노숙자와 장애인과 유가족의 곁에서 사회적 약자들을 찍던 사람. 2017년 그는 세상을 떠났고, 그의 영화를 보고 다큐멘터리를 시작한 안창규 감독은 그가 카메라에 담아내던 두 사람, 박경석과 문종택을 자신의 카메라에 담아내고자 한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다. 세월호 유가족의 투쟁을 카메라에 담던 그는 오해와 피로로 인해 잠시 현장을 떠났다가 되돌아왔다. <스탠바이, 액션>은 이러한 이야기들을 뒤섞어 풀어낸다. 박경석과 문종택이라는 두 인물에 집중해보자. 각각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공동대표인 박경석의 모습을, 유튜브채널 4.16 TV를 운영하며 세월호 유가족의 투쟁을 카메라에 담아온 문종택의 모습을 우리는 무수한 다큐멘터리에서, 투쟁현장에서, 그 현장을 송출하는 라이브 방송에서 보아왔다. <스탠바이, 액션!>의 러닝타임 94분은 두 사람의 궤적을 온전히 기록하기엔 부족하다. 故 박종필 감독에 관한 그리움과 그의 유산을 이야기하기에도 부족하다. 안창규 감독 개인이 현장에서 경험한 갈등을 설명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다. <스탠바이, 액션!>은 그러한 세 가지 이야기를 기둥삼고자 하지만 실패한다. 관객은 故 박종필이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누비던 시기의 문제들이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다는 사실만을 알게 될 뿐이다. 장애인이동권 투쟁에 관해서는 민아영의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를 보거나 전장연이 매일같이 중계하는 유튜브 라이브를 보면 된다. 문종택의 활동에 관해서는 4.16 TV나 그가 지난 10년 동안 촬영한 영상으로 제작한 영화 <바람의 세월>을 보면 된다. 물론 <스탠바이, 액션!>이 담아낸 기록들이 의미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세월호 참사도, 장애인 이동권도 무엇 하나 해결된 것이 없으며, 그것은 영화의 엔드크레딧과 함께 등장하는 푸티지들에서 드러나듯 내란 국면이 지나간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만 지난 내란의 시간을 지나며 우리는 미디어운동의 헤게모니가 레코딩에서 라이브로 변화한 상황을 마주했다. 점진적인 변화가 내란 국면 속에서 완전히 자리잡은 것이다. 액티비즘 다큐멘터리는 변화의 시간에 직면했다. 4.16연대의 미디어팀이나 박근혜 퇴진운동 미디어팀이 촬영하고 만들었던 다큐멘터리와 사회대개혁 비상행동 미디어팀이 만들어야 할 다큐멘터리는 꽤나 다른 종류의 것이어야 할테다. <스탠바이, 액션!>은 아직 그러한 변화에 녹아들지 못한 어떤 결과물처럼 다가온다.
<사진의 얼굴> 고희영 2025
일본의 포토저널리스트 구와바라 시세이는 1963년 미나마타병의 환자들을 촬영한 사진으로 처음 이름을 알린 이래 구 소련, 베트남 전쟁,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등 무수한 역사적 대상을 촬영해왔다. 그러한 그의 카메라가 향한 주요한 대상 중 하나는 바로 한국이다. 1964년 처음 한국을 방문한 그는 4.19 혁명을 기억하는 대학생들의 행진을 촬영했다. 이후 주기적으로 한국을 찾은 그는 동두천 미군기지의 여성들을, 청계천 판자촌의 빈민들을,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을, 문경의 도자기 장인을, 5.18 10주기의 광주를, 그리고 북한 평양의 일부를 자신의 카메라에 담아낸다. 그에게 한국의 근현대사는 풍부한 이야기를 지닌 대상임과 동시에 생생한 민중의 얼굴이라는 피사체가 넘실거리는 공간이었다. <사진의 얼굴>은 그의 목소리로 진행되는 내레이션과, 89세라는 고령의 나이에 다시금 한국을 찾아 젊은 시절 사진을 찍었던 장소들을 찾아가는 모습, 그리고 그가 촬영했던 사진들로 구성된다. 다소 연대기적인 구성을 갖는 영화는 구와바라의 사진작업을 우리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주지만, 동시에 외부인이자 '일본인'이라는 특수한 위치성에 관한 깊이있는 성찰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물론 한국의 기자들은 국가의 치부라 생각하고 일본의 기자들은 돈이 되지 않으며 위험하다 생각해 찍지 않았던 대상들을 촬영해온, 구와바라의 60년 사진 인생을 되짚고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다만 영화는 그곳에 멈춰선다.
<낙서가 박힌 정경> 김응수 2025
K는 폭염을 피해 베트남의 고산지대로 피서를 떠난다. 기대와는 다른 풍경에 실망한 K는 스마트폰으로 숙소 곳곳과 창밖 풍경을 찍으며 시간을 보낸다. 영화는 그렇게 촬영된 사진들과 짤막한 영상, 그리고 그 위에 쓰인 낙서들로 채워진다. 이 낙서들은 어떤 면에선 여행이 의도와 다르게 풀리는 주인공의 푸념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베트남의 역사에 관한 잡념이며, 동시에 '피서'라는 맥락 위에서 베트남으로 여행 간 한국인의 상념이다. 낙서를 통해 전개되는 생각들은 거의 달라지지 않는 풍경들 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 낙서를 적어내려가는 주인공-감독도, 그것을 쫓아가는 관객들도 어디선가 길을 잃는다. 물론 이러한 방황이 번뜩이는 통찰이나 아이디어로 연결될 수도 있다. 다만 이 작품이 그러한 경우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여정이 아름답기도 하다> 고한벌 2025
사고로 장애를 얻은 선영은 변호사를 꿈꾸는 수험생이다. 그의 아버지는 요양원에 있고, 어머니는 고된 노동에 육체적 고통을 호소하며, 형은 정신장애를 가지고 있다. 얼핏 세상의 불행을 모두 끌어안은듯 보이는 선영의 이야기를, 고한벌 감독의 카메라는 묵묵히 따라간다. 영화에 담긴 2~3년 남짓한 시간 동안 선영은 공부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시험을 응시하고, 요양원에 찾아가고, 스승의 날에 은사님을 만나러 간다. 선영이 보내는 하루하루는 누군가의 평범한 일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무언가로 영화에서 다뤄진다. 어떤 면에서, 영화는 선영이 경험했을 법한 어려움들을 영화 안에 담아내지 않는다.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그는 어떻게 운전석에 앉는가? 휠체어를 타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의 어려움은 무엇인가? 국가고시에 응시하는 장애인이 겪는 어려움은 또 무엇인가? 기초생활수급자로서의 고충은 무엇인가? 영화는 이러한 질문 혹은 의제 하나하나를 깊이 파고들지 않으며, 선영과 그의 가족이 마주한 상황의 디테일을 보여주고자 하지 않는다. 다만 돌봄의 수혜자이자 돌봄의 제공자이며, 부양자이면서 피부양자이고, 보통의 사회인이면서 장애인이란 정체성을 갖고 있는 선영의 하루하루를 스케치하듯 그려낸다. 그리하여 <가끔은 여정이 아름답기도 하다>는 장애인 이동권이나 기초생활수급제도 등의 의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음에도 그러한 의제에 관한 논의들을 머릿속에서 상상하게끔 한다. 생활의 아름다움, 그로 인해 촉발되는 연대감, 이 영화는 그러한 우회로를 통해 선영과의 연대를 표한다.
<방방과 플라나리아> 박희진 2025
방송작가로 오랜 시간 일해온 감독은 고향 강릉으로 돌아온다. 돌아온 지 3년째이지만, 여전히 강릉에 완벽히 돌아왔다는 감각은 없다. 감독은 최근에야 자신이 성인 ADHD라는 진단을 받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러던 중 초등학교 시절 과학 선생님이 내준 플라나리아 잡기 숙제를 떠올린다. 강릉 남대천에 친구들과 플라나리아 잡기 숙제를 하러 떠났던 시간, 천변의 시장에 자리잡은 '방방'을 타고 놀았던 추억, 남대천의 석양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 ADHD라는 병명을 통해 자신을 받아들이고 알아가는 시간을 갖는 감독. <방방과 플라나리아>의 여정은 전혀 연관되지 않아 보이는 '방방'과 '플라나리아'의 조합으로 구성된 영화의 제목이 그렇듯 감독 자신이 삶아온 삶의 기억을 되짚고 자기 자신을 (재)수용하는 과정에서 마주하는 방황과 우연으로 가득하다. 영화의 만듦새도 어딘가 ADHD를 고스란히 영화로 만든듯한, 다소 산만한 편집과 중심에서 다른 가지로 뻗어나가는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 스마트폰이나 액션캠을 비롯해 영화에 사용된 작은 카메라들을 마치 장난감처럼 다루는 감독의 모습은 자신의 방황에 관객을 동참시키고자 한다. 영화, 다큐멘터리라는 대상을 일종의 유희의 도구 삼고, 주변이 잔뜩 어질러질 때까지 가지고 노는 모습과도 같달까.
<망양중복> 김지곤 2025
부산 서구와 중구에 걸친, 산복도로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망양로와 그 아래의 중복도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지금은 무산된) 2023 부산엑스포의 열기와 함께 부산의 구도심에 불어닥친 재개발의 열기가 마을 곳곳의 현수막으로 표출되는 가운데,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부동산을 통한 경제적 이득 같은 것보다는 이곳에서의 삶이 어떠했으며 어떠한지를 이야기한다. 영화는 김지곤 감독이 <월간-할매>를 통해 담아온 '탁주' 할매와 '청바지' 할매, 두 사람의 기록과 그들의 가족을 담아내며 전개된다. 두 할매와 그들의 가족들의 이야기는, 마치 라이다(LIDAR) 장치로 동네 전체를 스캔하듯이 곳곳을 촬영한 푸티지들과 함께 등장하며 이어진다. 막연하게 전통과 삶을 이어가야 한다는 주장보다는 그곳을 터전 삼아 살아온 이들, 산비탈에 세워진 마을의 높은 계단을 오르기 위해 바다를 등지지만 또한 바다를 바라보며 살아온 이들의 이야기를 영화에 품고자 한다.
<하산과 가자에서> 카말 알자파리 2025
2001년, 감독은 하산이라는 이름의 현지 가이드와 함께 가자지구 곳곳을 돌아다녔다. 17살 이스라엘군에 의해 투옥된 감옥에서 만났던 사람을 찾기 위해서다. 이틀 간의 여정을 담은 테이프가 뒤늦게 발견되자, 감독은 이를 106분의 영화로 편집했다. <피다이 필름>을 비롯한 전작들에서 팔레스타인의 과거가 기록된 푸티지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그는, 이번엔 본인이 직접 촬영한 일종의 여행기를 24년 만에 발굴해낸다. 2차 인티파다가 전개되던 시기, 가자지구는 이스라엘군에 의해 봉쇄되고 밤마다 총성과 포성이 울려퍼진다. 이스라엘 정착민들은 가자를 포위하듯 집을 짓기 시작한다. 또한 가자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살아던 집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체포하고, 그들이 삶을 영위하지 못하게끔 만든다. <하산과 가자에서>가 담아낸 24년 전 가자의 상황은 건물들이 비교적 남아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2025년 현재의 가자지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지역을 통채로 포위하고 총과 박격포로 맘편히 잠들지 못하게 하며 이동과 물자를 통제한다. "가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감옥이다"라는 영화 후반부의 자막이 말해주듯, 가자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부터 현재까지 이스라엘의 식민지이자 학살의 장소이며 거대한 감옥이었다. <하산과 가자에서>는 그러한 오래된 사실을 재차 끄집어낸다. 알자파리는 자신이 찾던 사람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한다. 현재는 그를 안내해주었던 가이드 하산의 행방도 알지 못한다. 알자파리는 자신이 봤던 것을 기억하고, 또 기억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든다.
<티티컷 풍자극> 프레데릭 와이즈먼 1967
프레데릭 와이즈먼의 장편 데뷔작. 현재까지 이어지는 와이즈먼 스타일의 출발을 알린 작품이다. 메사추세츠주 브리지워터 주립병원의 내부를 담은 이 작품은 수감자와 직원이 참여하는, 어딘가 프릭쇼 같은 장기자랑으로 시작하고 마무리된다. 교도소에서 이감된 수감자들로 채워진 병원 내부에서는 강제급식이나 폭언과 같은 학대행위들이 이루어진다. <티티컷 풍자극>은 내레이션이나 자막, 인터뷰를 배제하고, 마치 관객이 카메라와 함께 병원 내부로 들어간 듯 그곳을 경험하게끔 한다. 지금의 와이즈먼 영화에서 발레단, 미술관, 도서관, 시청, 레스토랑 등의 공간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작동하는 방식을 목격할 수 있다면, <티티컷 풍자극>에는 강렬하고 날선 폭로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다. 와이즈먼의 21세기 영화들보단 <영장류>나 <동물원> 등과 결을 같이 하는 작품.
<또 다른 영화> 김시원 외 10인 2025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30주년 기념으로 진행된 '오디오비주얼필름크리틱' 워크숍을 통해 제작된 11편의 비디오 에세이를 모든 옴니버스 영화. 개별 작품 하나하나에 관해 이야기하기는 어렵겠지만 몇 가지 흥미로운 지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앨런 웨이크 2>나 <RPG 메이커> 등 게임 혹은 게임 제작 툴이 비디오 에세이의 소재로 자연스럽게 등장한다는 점, 게임 뿐 아니라 광고, 서바이벌 프로그램, 회화, 우연히 발견된 사진 등 모든 종류의 이미지가 에세이적 대상으로 기능하는 지점, 맥북의 화면부터 구글 검색창, 프리미어 프로의 편집 타임라인까지 데스크톱 필름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지금의 (예비)영화인들이 관심에 두고 있는 작가들의 목록(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제임스 맨골드, 안드레아 아놀드, 스즈키 세이준, 하마구치 류스케 등)을 확인할 수 수있었다는 점 등. 비디오 에세이가 여전히 활성화되었다고 할 수 없는 한국의 상황에서, 개별 단편의 완성도를 논하기보단 다양한 사색들을 마주하는 즐거움을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