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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없는 세계관

<슈퍼맨> 제임스 건 2025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꼭 12년 만에 다시금 슈퍼맨이 리부트됐다. <슈퍼맨>이라는 단순한 제목도 리처드 도너의 영화 이후 47년만에 되돌아왔다. 잭 스나이더에서 제임스 건의 손으로 넘어간 DC 유니버스의 첫 장편영화(DCU의 공식적인 첫 작품은 MAX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크리처 코만도스>다)이기도 하다. <슈퍼맨>은 작정하고 기존의 DCEU, 나아가 제임스 건 자신이 몸담았던 MCU, 혹은 슈퍼히어로 장르를 (소극적으로) 거부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잭 스나이더가 시도한 메타휴먼들의 신적인 면모나 신화적인 이미지를 거부하고, 끝없는 세계관 확장 속에서 작품의 길을 잃는 MCU의 방식 또한 거부하며, 신화적 우상에 가까운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찌질한 소시민에 가까운 이들의 인간적 고뇌를 담고자 한다. 물론 이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트릴로지나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 등 그의 다른 슈퍼히어로 영화들에서도 드러난 것이지만, 그 주인공이 ‘슈퍼맨’일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리처드 도너의 영화부터 잭 스나이더가 그려낸 버전, 심지어 애로우버스 ‘무한우주의 위기’에서 재소환된 <스몰빌>과 <슈퍼맨 리턴즈>의 슈퍼맨들에서의 일관된 이미지는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이번 영화 첫 장면의 슈퍼맨 묘사에서 곧장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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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건은 자신다우면서도 이상한 선택들을 이어 나간다. 독재국가 보라비아의 자한푸르 침공이라는 가상 국가들 사이의 분쟁과 그것을 방조 혹은 드러나지 않게 공모하는 미국을 보여주며 우회적으로 이스라엘-미국을 비판한다. 슈퍼맨(데이빗 코렌스웻)과 렉스 루터(니콜라스 홀트)는 물론 그린 랜턴(네이선 필리언), 미스터 테리픽(에디 가테지), 지미 올슨(스카일러 거손도) 등 대부분의 캐릭터는 ‘찐따’에 가깝게 묘사된다. 스타로드나 드랙스가 그랬던 것처럼, 이들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시기심에 찌들어 있고, 그러한 자신을 질책하고, 실수를 반복하고,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탈-찐따하는 성장형 캐릭터들로 묘사된다. 3세기 전부터 메타휴먼이 존재했다는 자막과 ‘저스티스 갱’이라는 이름의 히어로 집단(그리고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와 <피스메이커>에서 이어지는 캐릭터 카메오)이 등장하는 만큼 이미 방대한 세계를 전제로 하지만 그것을 설명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2편과 3편에서 그랬던 것처럼, 2억 달러 예산의 블록버스터를 트로마 시절처럼 찍고 편집한다(이번 영화의 액션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은 높은 확률로 바보다). 하지만 슈퍼맨 캐릭터의 본질적인 한계, 캡틴 아메리카가 그러한 것처럼 너무나도 미국적이고 백인적인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들의 존재라는 한계 또한 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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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은 여러모로 이질적인 재료 혹은 시도들을 제임스 건이라는 이름으로 통합하고 정당화하는 시도에 가깝다. 코믹스의 한 에피소드를 툭 떼어와 영화화한 것 같은 이야기와 세계는 앞으로의 확장보다는 앞서 존재한 세계의 부정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다가온다. 거대한 적과의 싸움 속에서 압도적인 파괴의 스펙터클을 자랑했던 잭 스나이더와 달리, 괴수에 깔리기 직전인 다람쥐까지 구하고자 하는 슈퍼맨을 보여주는 제임스 건의 선택은 확실히 이전과 다른 선택을 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다. 하지만 이것이 슈퍼히어로 장르의 본질로 되돌아간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무수한 메타휴먼이 등장하고 현실정치의 패러디나 다름없는 캐릭터와 플롯을 마련해두지만, 언젠가부터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민간인의 생활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DCEU가 반복적으로 <맨 오브 스틸> 속 메트로폴리스의 파괴를 보여주며 그것의 트라우마로 인해 변화한 삶들을 드러냈던 최소한의 장치들은, <슈퍼맨>은 물론 제임스 건이 만들어 온 코믹스 기반 영화들에서 찾아볼 수 없다. 슈퍼맨은 인간적 고뇌를 이야기하며 자신 또한 외계인이 아니라 인간임을 역설하지만, 이 세계에서 인간을, 그러니까 이 세계를 살아가는 누군가를 발견할 수는 없다. 세계관은 있으나 세계는 부재하는 영화. 제임스 건의 <슈퍼맨>은 쇠락에 접어든 슈퍼히어로 장르의 구원투수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의 끝이 더욱 확실히 다가왔음을 드러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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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슈퍼히어로 장르에 끝물이 찾아왔다는 게 제임스 건과 <슈퍼맨>의 탓이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번 영화는 슈퍼히어로 장르에서 적을 상정하는 게 얼마나 곤란해졌는지를 드러낸다. 명백히 이란을 겨냥하고 있음에도 그 이름을 지워냈던 (슈퍼히어로 장르는 아니지만> <탑건: 매버릭>이나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길을 잃어버린 <블랙팬서: 와칸다 포에버>,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를 떠올려보자. <슈퍼맨>은 나름의 우회로로써 반-이스라엘과 반-트럼프/머스크를 내세우지만, 이 또한 ‘생명을 구한다’라는 익숙하면서도 고루한 테마를 반복하는 데 머무른다. 무고한 생명을 구한다는 것은 슈퍼히어로 장르의 기본적인 전제이긴 하다. 하지만 슈퍼히어로 장르가 양차대전 사이에 태동하였으며 한 국가의 공권력이나 군사력만으로 해결 불가능한 상황을 초인적 능력으로 돌파하는 이들이 주인고잉었기에 큰 호응을 떠올려 본다면. 슈퍼히어로 장르에서 적을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여전히 중심이 되는 문제다. 지금의 영화들은 그것에 실패하고 있다. 빌런을 프로타고니스트로 내세운 ‘인피니티 사가’의 피날레가 성공한 이래로, 슈퍼히어로 장르의 남은 가능성은 극히 적은 영역에만 머무른다. <더 보이즈>나 <인빈시블>처럼 모든걸 제멋대로 뒤엎거나, 동물권을 중심에 내세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 3>처럼 특정한 의제를 장르 안에 녹여내거나. 여기에는 새로운 거대한 세계가 필요치 않다. 그렇기에 <슈퍼맨>은 그 혼란 속에서 DCU라는 새로운 세계관을 도입하지만 그것을 안착시키는 데에는 실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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