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수가없다> 박찬욱 2025
*스포일러 포함
영화가 끝나고 처음 든 생각은, 영화가 어딘가 미완성인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큰 틀에서는 재취업을 위해 경쟁자들을 하나하나 제거하는 만수(이병헌)의 이야기지만, 하나의 큰 이야기라기보단 하나의 플롯포인트가 채 마무리되기 전에 성급히 다음으로 이행하고자 하는, 성급하게 느껴지는 영화랄까. 조금 더 지속되어야 했을 숏을 빠르게 끊어버리고 다음으로 이행한다거나, 후반작업이 덜 된 듯 배경과 인물이 붙지 않는 몇몇 장면들이 모여 그러한 인상을 자아낸다. 물론 숏을 빠르게 잡는 지점은 전작 <헤어질 결심>에서도 볼 수 있던 것이고, 후반작업의 문제는 <어쩔수가없다> 뿐 아니라 최근의 한국영화 대부분에서 보이는 문제점이긴 하지만.
이러한 인상을 뒤로하고 영화 자체에 관해 이야기 해보자. 박찬욱은 <복수는 나의 것>에서 중간계급과 하위계급이 서로 죽고 죽이는 아이러니를 그려냈던 전적이 있다. 여기서 박찬욱이 그려내는 세계는 이후의 작품들이 그려내는 생활세계와는 동떨어진 듯한 세계, 이를테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아가씨>, <스토커> 등이 그려냈던 정신병원, 독특한 양옥집, 대저택, 교외의 주택 등의 세계와는 다른데, 달리 말하면 그의 영화 중 <공동경비구역 JSA>와 함께 가장 현실에 발붙이고 있는 작품이라는 점이다. 직전작 <헤어질 결심> 또한 부산을 배경으로 삼지만, 그곳이 부산인 게 영화 내적으로 그리 중요한 일이던가? 다시금 (적어도 외적으로는) 계급투쟁의 아이러니를 그리는 듯한 영화인 <어쩔수가없다>는 가상의 경기도 도시 ‘구종시’를 배경 삼지만 이 또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정말로?
<어쩔수가없다>를 노동영화나 자본주의에 관한 우화로 독해하고자 하는 평들은 이 영화가 현실 바깥에 있음을 애써 외면한다. 미국 자본에 인수된 제지공장에서 해고된 중간관리자가 AI를 통해 자동화된 공장에 재취업한다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노동을 목격할 수도 없고 자본주의에 관한 통찰도 발견할 수 없다. 중간관리자인 만수, 그리고 그와 유사한 업력을 지닌 범모(이성민), 선출(박희순), 시조(차승원) 등의 경쟁자들, 만수의 면접관들, 여기에는 노동자가 없다. 도리어 만수와 그의 경쟁자들은 해고가 되고 나서야 노동자가 된다. 만수는 마트에서 짐을 나르고, 시조는 자신이 채워야 하는 실적을 간절하게 언급하게 되니까. 중산층이라고 부르기엔 퍽 호화스러운 그들의 생활은 어떤 면에서도 그들을 ‘노동자’로 두지 않는다.
그들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노동자’라는 정체성이라던가, 자본주의 안에서의 생존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만수의 전원주택, 범모의 아날로그 오디오 장비, 산장과도 같은 선출의 집, 이들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생존의 조건이라기보단 가정과 사회 안에서 갖는 ‘가장’의 지위다. 계속 흐름을 끊어가며 어색하게 만수의 가족을 보여주고, 두 마리의 개를 포함한 그의 가족이 포옹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오프닝 시퀀스를 떠올려보자. 만수가 지키고자 하는 대상은 그러한 순간이며, 그 순간을 가능케 한 자신의 능력이다. 정리해고가 앗아간 것은 그가 노동하여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가장으로서 갖는 체면과 지위다. 만수가 집을 팔지 않는 이유도, 범모가 다른 돈벌이를 고려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쩔수가없다>는 (박찬욱이 종종 그래왔던 것처럼) 이러한 중년 남성들을 조롱하면서 동시에 연민한다.
이번 영화에서 이 연민은 참으로 기묘하다. 연민의 대상인 가장이자 중간관리자인 이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가정에서, 사회에서 갖는 지위임이 당연하다. 다른 한편으로, (원작의 설정이긴 하지만) 제지공장이라는 설정을 다시금 생각해 보자. 원작을 한국으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제지공장이라는 설정은 왜 유지되었는가? 완성된 종이를 만지며 희열을 느낀다는 ‘제지맨’들의 대사, 자신이 살던 집을 지켜야한다는 만수나 아날로그에 반쯤 미쳐 있는 범모의 취향 같은 것들을 함께 떠올려 보자. AI를 통한 자동화 공장에서 마무리되는 영화의 마지막을 떠올려 본다면, 우리는 박찬욱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는 영화(인)라는 대상이 처한 상황과 <어쩔수가없다> 속 중년 남성들의 상황을 동일시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어쩔수가없다>는 겉으로는 자본주의 속에서의 경쟁이 연쇄살인으로 이어지는 잔혹한 상황을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그 안에 노동자란 존재하지 않는 기만적 세계이며, 한편으로는 중간관리자/가장인 중년 남성들의 비애를 조롱하면서 연민한다. 그리고 그 대상 안에는 자본가도 신진세대도 아닌 영화인 자신 또한 속하는 것으로 상상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쩔수가없다>는 자신이 쥔 것을 차마 놓지 못하는,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지위와 안위를 최우선 가치로 설정하는 이들의 이야기일 뿐이고, 그 위에 영화(인)이라는 필터가 덧씌워질 때 이 영화의 기만감은 배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