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사고였을 뿐> 자파르 파나히 2025
한동안 자파르 파나히 영화의 주인공은 자파르 파나히였다. 2009년 체포된 이후 가택 연금 상태에서 다큐멘터리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와 극영화 <닫힌 커튼>을 찍었고, 가택 연금은 해제되었으나 여전히 출국 금지인 상태에서 세 편의 극영화(<택시>, <3개의 얼굴들>, <노 베어스>)와 두 편의 단편(<숨겨진>, 옴니버스 <끝없는 폭풍의 해>의 첫 에피소드 <LIFE>)를 찍었다. 파나히는 모든 작품에서 자기 자신으로, 키아로스타미 이후 가장 유명한 이란 영화감독이자 정치적 사건으로 인해 가택 연금 및 영화 연출 금지 등의 상황에 놓인 유명인사로 출연한다. 다큐멘터리화된 픽션에 가까웠던 지난 세 편의 장편영화에서 파나히는 영화를 찍지 못해 택시를 몰거나, 자신의 유명세를 통해 타인을 설득하고자 하거나, 출국 금지라는 제한된 상황을 극적 요소로 활용하는 영화감독으로 출연해왔다. 마치 아녜스 바르다나 베르너 헤어조크가 다큐멘터리 속 자신을 하나의 캐릭터로 활용해 온 것처럼, 파나히 또한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사이에 놓인 영화들을 만들어 오며 자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왔다.
<그저 사고였을 뿐>은 정말 오랜만에 파나히가 출연하지 않는 파나히 영화다. 과거 파업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모진 고문을 당한 뒤 후유증에 시달리는 바히드(바히드 모바셰리)는 우연히 자신을 고문했던 정보원 요원 ‘외다리’ 에크발(에브라힘 아지지)을 마주한다. 하지만 바히드는 그가 자신을 고문했던 요원이 맞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그에게 고문당했던 다른 피해자들에게 확인받고자 한다. 출국 금지 상태의 파나히에게 자동차는 중요한 영화적 공간이었다. <택시>와 <3개의 얼굴들>에서는 자동차가 이동수단일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주요한 로케이션이며, 나아가 카메라 자체와 같았다. <그저 사고였을 뿐>은 가족을 데리고 시골 도로를 운전하는 에크발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어두운 밤길에 우연히 지나가던 개를 로드킬한 상황에서, “아빠가 개를 죽였어!”라고 슬퍼하는 딸에게 에크발의 아내는 “신의 뜻이야, 그저 사고였을 뿐”이라 대꾸한다. 전작들에서 자동차는 영화를 성립하게 하는 장치이자 가능성의 공간이었다면, <그저 사고였을 뿐>은 그것이 죽음과 강하게 연계됨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실제로 바히드는 자신의 밴에 있는, 마치 관과 같은 캐비닛에 납치한 에크발을 넣고 다닌다. 에크발은 바히드가 거기서 꺼낼 때에만 살아 있는 존재이며, 그렇지 않을 따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바히드와 동행하게 되는 네 명의 인물은 에크발의 얼굴을 확인하지만 그가 자신들을 고문한 요원이 맞는지 여전히 확신하지 못한다. 그들 중 확신을 갖는 것은 의족을 착용한 그의 다리를 몇 개월간 안마했던 하미드(모함마드 알리 엘야스메흐)뿐이다. 눈을 가린 채 고문당했던 그들은 그저 에크발의 의족이 삐걱거리는 소리만을 기억할 뿐이다. 영화는 납치된 이가 에크발이 맞는지, 맞다면 그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이야기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다. 각자 기존의 삶을 파괴당한 채 살아가고 있기에, 에크발을 다시금 대면하는 것에 불쾌감을 표하거나 분노를 표출한다. 당장 생매장해 죽여버리자고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폭력으로 되갚아 주는 것은 그들과 같아지는 것일 뿐이라 말하는 시바(마리암 아프사리) 같은 이 또한 있다. 이들은 무엇을 택할 수 있는가? 장례 방법을 정하지 못한 채 떠도는 운구차처럼 곳곳을 떠돌던 이들은 선택을 포기한다. 그들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대상을 죽이지 못한다. “그저 사고였을 뿐”이라며 로드킬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던 에크발 부부와 달리 말이다. 밴의 사람들은 에크발을 확인하자마자 목을 조르려던 하미드를 뜯어말리고, 에크발의 핸드폰에 걸려 온 딸의 긴급한 전화를 받아 양수가 터진 그의 아내를 병원에 데려간다. 에크발의 차가 죽음을 그저 불운한 사건으로 치부하며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넘기는 흉기라면, 운구차에 가까운 인상을 주던 바히드의 밴은 죽음을 실어 나르지 않고자 점진적으로 결심하는 과정에 가깝다. 에크발이 감금된 캐비닛 위에 양수가 터진 그의 부인이 누워 병원으로 실려 가는 장면과, 병원에 그를 데려다준 이후 해산하는 밴의 사람들은, 그들이 그가 에크발임을 확신했음에도 그를 죽이지 않기로 결정한 것과 같다. 그들이 각자의 결정을 명시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그들 또한 바히드가 에크발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을 테다.
관객인 우리는 영화의 도입부 이후 에크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다. 종종 보게 되는 그의 얼굴에는 안대가 씌워져 있다. 관객에겐 에크발이 했던 행위에 대한 평가도 불가능하고, 그가 에크발이 맞는지 확인할 수도 없다. 단지 바히드 일행이 말하는 트라우마를 통해서야 에크발이 고문의 수행자이자 이란 정보국의 요원임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파나히는 그들이 함께 탄 밴 안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우리는 에크발을 죽이려는 선택을 할 수 있는가? 그러한 선택은 다시금 폭력의 순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에크발을 어떻게 처분하는 것이 정의로운 것인가, 혹은 민주적인 것인가? 광장에서 체포되었던 이들은 감옥을 거쳐 비좁은 밴에 모였다. <그저 사고였을 뿐>의 인물들이 언급하는 파업은 2021년 이란 노동자 총파업일 테다. 그렇다면 이 밴은 폭력적으로 진압된 광장-이후, 실패로 돌아간 파업 이후 국가폭력의 수행자와 노동자가 재-대면하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파나히의 자동차는 영화가 성립되는 가능성의 장소에서 폭력의 공간으로 변화하였다가, 다중이 공존하는 곳이 된 셈이다. <그저 사고였을 뿐>은 자신의 영화적 분신으로서의 자동차를 또 다른 가능성에 내맡겨 보고자 하는, 그럼으로써 이 영화를 보는 이들 또한 가해자와 피해자가 공존하고 트라우마와 폭력에의 거부가 함께하는 밴 속으로 우리를 초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