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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떠나간 여인>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원제: Ang babaeng humayo
감독: 라브 디아즈
출연: 차로 산토스-콘치오, 존 로이드 크루즈
제작연도: 2016


러닝타임이 무려 226분에 달하는 영화로, 2017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라브 디아즈 감독의 신작이다. 30년간 여성 교화시설에 수감되어있던 호레시아는 다른 수감자가 실제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석방된다. 석방된 그녀는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다. 1997년의 필리핀은 홍콩의 중국 반환의 영향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고, 돌아온 호레시아가 목격한 고향은 사람들이 부정부패와 빈번한 납치사건으로 공포에 떨고 있는 상태다. 그녀는 발롯 장수, 정신이 나간 거리의 여인 마멩, 트렌스 베타이트 홀란다 등을 만나며 고향의 현재를 발견하고, 인정 많던 그녀의 성격은 복수심에 물들어간다.

226분의 기나긴 러닝타임은 끝없는 롱테이크와 정지된 카메라로 가득하다. 가만히 앉아서 호레시아와 주변 인물들을 관찰한다. 동시에 같은 장소를 카메라가 담아내도 쇼트마다 다른 앵글로 담아내기 때문에 관객은 장소의 여러 면을 영화 내내 바라보게 된다. 가령 여러 차례 등장하는 호레시아와 발롯 장수가 대화를 나누던 공간은 쇼트마다 다른 앵글로 촬영된다. 그러던 어느 쇼트에서 그 공간이 부정부패를 일삼는 로드리고의 집 앞이었음이 드러나고, 로드리고와 호레시아의 이야기가 드러나면서 스토리가 전개된다. 롱테이크의 쇼트가 점증적으로 쌓여가는 방식은 느리지만 강력하다.

라브 디아즈 감독은 <떠나간 여인>의 배경을 1997년이라는 특정한 시간대로 지정했다. 거기에 흑백으로 이어지는 화면은 <떠나간 여인>이 그리는 필리핀이 현실을 그대로 반영했다기 보단, 특정한 시간대를 배경으로 한 라브 디아즈의 평행우주처럼 느껴진다. 부정부패가 가득하고 납치사건이 빈번하던 1997년 필리핀의 단면을 호레시아라는 인물을 통해 잘라내고 다시 그려낸다. 4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은 호레시아가 복수심을 쌓아가는 시간이고, 결국 고향을 떠나가고 마는 호레시아의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카메라가 움직이는 부분이 호레시아가 고향을 떠나기 직전의 모습이다. 하드코어한 복수심은 다른 이의 손을 대신해 발현되고 호레시아는 다시 고향을 떠난다. 라브 디아즈 자신은 여전히 필리핀에서 필리핀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아내지만, 그가 담아내는 필리핀은 호레시아처럼 떠나버리고 싶은 공간이다.

226분은 생리적으로도 버티기 힘든 시간이고, 온전히 집중하기에도 힘든 분량이다. 심지어 라브 디아즈는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제에 인터미션을 두지 않을 것을 당부한다. 관객은 영화의 일부분에 넋을 놓고 졸아버릴 수도 있고, 생리현상을 참지 못해 화장실에 다녀올 수도 있다. 이마저도 라브 디아즈의 전작인 489분짜리 장편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의 절반 정도이다. 그가 영화의 러닝타임을 물리적으로 고통스러울 정도로 길게 잡는 이유는 영화로 현실을 그려냄과 동시에 관객이 스크린을 넘어 물리적으로 고통을 체험하길 바라는 의도가 담겨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가 그리고 있는 시대와 역사와 인물들의 고통이 관객들에게 물리적으로 전달된다.그렇기에, 극장이 아니면 라브 디아즈의 영화를 온전히 체험할 수 없는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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