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박찬욱
출연: 김태리, 김민희, 하정우, 조진웅
제작연도: 2016
박찬욱의 10번째 장편영화 <아가씨>는 전복과 반동을 모두 품고 있다. <복수는 나의 것>(2002), <올드보이>(2003), <친절한 금자씨>(2005)로 이어지는 '복수 3부작' 이후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 <스토커>(2012)와 이어지는 '소녀 3부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영화는 복수와 여성(소녀)라는 박찬욱의 두 테마를 엮는다. 도둑의 딸 숙희가 스스로를 백작이라 부르는 사기꾼과 공모하여 친일파이자 변태적인 소설을 모으는 삼촌 코우즈키에게 감금된 것과 다름없는 상태로 살아가는 히데코의 유산을 노리고 하녀로 잠입한다는 것이 영화의 간략한 줄거리이다.
백작과 숙희의 공모는 금새 무너진다. 두 사람의 은밀한 작전은 숙희와 히데코 사이의 애정으로 전이된다. 히데코가 물려 받을 유산은 히데코 자체를 물적인 것으로 보는 은유이며, 백작과 코우즈키는 그것만을 보고 있다. 천생이 사기꾼인 백작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대부분이 거짓이며, 코우즈키의 시커면 혓바닥은 히데코를 변태적인 소설을 낭독하고 소설 속 기괴한 성애 장면을 재현하는 인형으로 만든다. 두 남성과 히데코가 나누는 대화는 사람과 사람의 대화라기보단, 사람이 아닌 대상과 대상의 대화에 가깝다. 숙희 또한 백작의 장기말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코우즈키의 저택으로 잡입했다는 점에서 사람 보다는 대상에 가까운 캐릭터로 출발한다.
숙희와 히데코의 사랑은 두 사람에게 쏟아지는 대상화, 물화를 전복시킨다. 저택에서 탈주하는 두 사람의 질주는 두 사람이 살아있다는 감각을 스크린 위에 되살린다. 유산을 위해 수양딸 관계인 히데코와 혼인하려는 코우즈키는 자신의 전처를 저택의 관리자로 기용한다. 그의 저택에서 여성의 위치는 물적인 형상이거나 저택을 유지하는 역할에 머무른다. 히데코와 숙희는 각각 그러한 위치에 놓여 있고, 두 사람의 결합은 유럽과 일본의 양식이 뒤섞인 저택의 유구한 가부장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동력이 된다. 때문에 두 사람의 섹스 장면은 가부장제와 성적 물화에 대한 전복으로 해석되었다. 코우즈키가 소장한 책들에 쓰이고 그려진 것과 유사한 행위를 보여주는 두 사람의 섹스는 남성들의 판타지를 여성 간의 성적 쾌감의 도구로 활용하며 전복시킨다.
하지만 <아가씨>는 같은 장면에서 동일한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남성 판타지를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는 숙희와 히데코의 섹스는 결국 남성적 시선(Male Gaze)를 벗어나지 못하며, 박찬욱이 남성 감독이라는 지점은 이러한 비판에 힘을 실어준다. 남성감독이 연출한 다른 레즈비언 영화 대부분도 그러한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가령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3)은 그러한 남성적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섹스 장면을 촬영하면서 성적 착취를 당하는 것만 같았다는 배우들의 인터뷰가 그를 뒷받침한다. 이러한 비판은 <아가씨>가 가부장제와 여성혐오에 대한 비판을 하기 위해 레즈비어니즘을 도구적으로 사용했다는 비판에 이른다. 숙희와 히데코의 섹스는, 극 중에서 명백히 사랑으로 명명되고 충분히 묘사되었음에도, 영화 내에서 도구적인 역할만을 수행한다. 상해로 향하는 유람선에서 두 사람이 섹스를 나누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코우즈키가 소장한 그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아가씨>는 분명 두 사람의 사랑을 통해 숙희, 그리고 특히 히데코를 짓누르는 가부장제를 전복시키는 케이퍼 무비이자 복수극이지만, 이들의 성애는 두 사람의 레즈비언 정체성과는 별개의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히데코가 코우즈키의 책을 낭독하면서 그러한 방식의 섹스만 접해왔다는 내러티브 내에서의 반박이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동시에 히데코의 캐릭터를 축소시킨다. <아가씨>가 전복과 반동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가씨>를 지지하고 싶은데, 그것은 김태리와 김민희라는 두 배우의 힘이다. <아가씨>는 두 배우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소녀 3부작'이라는 박찬욱의 명명처럼 <아가씨>는 여성의 이야기이다. (물론 백작의 이야기가 불필요하게 많다는 생각도 들지만) 숙희와 히데코는 이 영화의 가장 주요한 동력이자 핵심이다. 두 사람이 함께 등장하는 영화의 모든 숏이 클라이맥스라고 생각될만큼 <아가씨>는 두 배우에게 의존하고 있다. 특히 영화의 도입부를 담당하는 김태리의 우직한 얼굴과 2부와 3부에서 다채롭게 변화하며 숙희-히데코의 하녀-주인 관계와 저택의 가부장제를 전복시키는 김민희의 얼굴은 김태리의 발견이자 김민희의 재발견이다. 히데코가 자신의 이모처럼 자살하기 위해 벚나무에 목을 매려는 순간 숙희가 히데코의 다리를 붙잡고, 히데코가 숙희를 내려다보며 숙희의 정체를 알고 있음을 밝히는 장면은 오로지 두 배우의 얼굴과 신체만으로 지탱된다. 이러한 장면들 때문에 내게 <아가씨>는 두 배우의 영화로 기억되고, 그렇기에 좋아하는 작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