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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jonler Jan 13. 2019

싫존주의

2-4


 학창시절, 생활기록부에 올라가는 취미 란에는 언제나 ‘독서, 영화감상이라고 채워 넣었다. 대지에 발붙이고 있는 호모사피엔스라면 하나쯤 가지고 있어야  것만 같은 취미 란의 폭력성이 불편했지만 ‘취미 같은  없음이라고  수는 없었다. 자본주의를 살아가기에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분위기 속에서 독서와 영화감상은 고급취향을 가질 형편이 못되는 어린 시절, 나를 보호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나열한 활자에 불과했다. 힘들  몰입할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며 남들처럼 취미생활을 하라고 어른들이 그랬다. 나의 즐거움을 위해 시간과 비용을 들여  일이 없었기에  취향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 바이올린, 플루트, 헬스, 요가, 수영  다채롭게 시도했다. 즐겁자고 가진 취미생활 때문에 이전 보다  다채롭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남들처럼 고급취미하나 갖고 있지 못한  스스로가 부족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취미 없는데, 취미 없는  문제인가? 취미가 대체 뭐길래. 사전을 찾았다.


취미:
 ①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 - “저의 취미는~입니다.”
 ② 아름다운 대상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힘 - “취미가 고상하시군요.”
 ③ 감흥을 느끼어 마음이 당기는 멋 -“저는 그런 일에는 취미가 없습니다.”

 오늘 날에는 주로 생계나 직업으로써가 아닌 스스로의 즐거움을 위한 일이라는 첫 번째 뜻의 의미로 취미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본질적으로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 행위가 취미라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산업화로 인해 일과 여가가 분리되면서 취미라는 개념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과 떨어진 공장에서 노동을 하는 시간 외의 시간이 여가시간이 된 것이다. 산업사회가 발달하기 이전에 여가란 일하는 틈틈이 짧게 누리는 것이었고 집이 곧 일터였기에 사람들은 쉬다가도 일로 복귀하기가 쉬웠다. 하지만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많아지면서 여가시간이 몰아서 주어지고 집이라는 공간은 노동과 분리된 공간으로 변해 갔다. 이렇게 여가라는 개념이 분명해지면서 여가시간을 둘러싸고 수동적 여가와 능동적 여가를 나누는 인식이 생겨났다. 그저 빈둥거리면서 쉬는 수동적 여가와는 달리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하면서 여가를 보내야 한다는 사회분위기가 생겨난 것이다. 그러면서 취미는 생산적으로 여가를 보내는 방식, 즉 능동적 여가활동이라는 개념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개인의 여가생활마저 공동체 안에서 꼭 필요한 행위로 규정되어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하는 일이 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오면서 이 현상은 극대화 된다. 소비지향적인 방향으로 고급취향을 계속해서 강요받는 것이다. 그들이 제시하는 대로 많은 사람들이 고급취향의 환상을 따라가며 고급소비를 해왔다. 자신이 무엇을 정말 좋아하는 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을 포기한 채 말이다.


 취미의 사전적 의미로 돌아가서 그 본질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취미생활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 다면 취미는 그 본질을 상실한 것이다. 즐겁지 않으면 취미라고 할 수 없는데 왜 다들 취미 생활 하나쯤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고급취향 하나쯤 없으면 뭔가 부족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땅히 개인의 즐거움을 위해 누려야 할 취향과 취미생활 조차도 생산적인 활동이어야 하고 꼭 하나쯤 갖고 있어야만 하는 것으로 강요하는 분위기가 나는 싫다. 자신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 꼭 활발한 활동이거나 소비 활동이 아닐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전적으로 이것은 내향적인 나의 성향이다. 활발한 활동이 즐거운 외향적인 분들은 지금처럼 외향적인 취미생활을 즐기시면 됩니다.) 무조건 남들이 많이 한다니까 유행 따라 하는 맹목적인 취미 말고 내가 무엇을 좋아 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스스로에게 먼저 물어봤으면 좋겠다.


 다행히 혼밥족, 혼영족, 혼행족의 무엇이든 혼자 하는 흐름이 대세다. 강요받지 않고 혼자의 시간을 오롯이 보내려는 사회적 현상이다. 최근 들어 싫은 것도 각자의 취향이라면 존중해주자라는 “싫존주의”라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개인의 개성이 소거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공동체 중심의 우리 사회에서 드디어 개인이 그 영역을 탄탄하게 확보해가는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취미의 세 번째 의미에 집중하고 싶다. “감흥을 느끼어 마음이 당기는 멋.” 나는 숨 쉬는 일, 잠자는 일, 가만히 있는 일 등에 감흥을 느끼고 마음이 당긴다. 감흥을 느끼고 있으니 이것도 나의 취향이고 취미이다. 나 같은 사람이 많으면 나라 경제에 발전이 없다고 걱정할까봐 노파심에 말하는 건데 좋아하는 것, 좋아하는 일에는 열심히 소비한다. 다만, 강요하는 분위기에 휩쓸려서 따라가는 취미생활에 ‘취미가 없을 뿐’이다. 싫은 것도 존중해 주시길.



이미지 출처: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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