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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jonler Jan 13. 2019

질문이 성해야 선진국이라면서  

2-5


  작년 초에 세계 경제력 순위를 전망한 월스트리트 저널의 10여 년 전 리포트를 접했다. 고무되었던 것은 미국과 중국 두 나라 다음으로 세계 3위의 경제력을 갖게 될 나라를 통일된 대한민국이라고 예측한 사실이었다.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은 그들이 10년 전 예측한 수치에 한참 못 미쳐 있다.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변수는 이전 두 정권.) 그러나 우리가 어떤 나라인가. 성숙한 시민의식을 바탕으로 평화로운 촛불 혁명을 통해 정권교체를 이뤄냈고 더불어 남북이 활발한 교류를 시작하면서 세계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나라가 아닌가.


 최근에 ‘질문이 성해야 선진국이다’라고 말하는 책을 읽었다. 작가는 우리나라가 독일과 같은 철학 생산국이 아니라 철학 수입국으로써 선대의 탁월한 사유가들의 이론을 진리로 믿고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라 믿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고 지적하며, 체계화된 이론으로써가 아닌 지식 자체의 맥락과 의미를 질문하는 것을 통해 따져 묻고 그것이 우리 사회와 세계 안에서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보는 것이 철학적 시선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생각할 줄 아는 것이 철학’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의 사유 방식의 변화로 사회 전체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였다. 

 책의 내용에 감명되어 작가의 강연에 찾아갔다. 강연 내용은 책과 비슷했고 강연 끝에 질의응답 시간이 있었다. 작가의 팬이라는 사람이 질문을 했다. “철학적 사유로 개인의 사유방식이 변화해야 한다는 작가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그러나 지금 청년들은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고 저 또한 그런 청년 중 한 사람으로서 지금의 삶에 철학적 사유가 적용될 수 있는 건지, 될 수 있다면 방법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강연자는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말로 대답을 시작했다.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사람은 다 불가능한 시점에 탄생했다. 그들은 불가능한 상황 속으로 삶을 밀어붙여서 자기를 확장했기에 역사적인 인물이 된 것이다.” 라면서 무조건 개인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그 시절에도 개인들은 힘들었지만 열심히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이 시대 청년들이 일자리가 없다고 하는데 나약한 말이고 할 일은 찾아보면 많다.”라고 덧붙였다. 질문이 성해야 선진국이라고 말하는 사람조차 질문의 수준을 평가하며 틀렸다는 대답을 하다니 강연자도 결국 지식뿐인 사람인 걸까. 거기다 6-70년대 부모님 세대만 해도 한국이 고성장 사회였기에 마음을 합해 열심히 일하면 경제는 충분히 성장 가능했고 누구나 개천에서 난 용이 될 수 있었다. 그 시대를 지나오면서 부를 축적한 일부가 이 나라 전체를 좌지우지하게 되었고 재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아 빈부격차가 극심해진 사회에서, 한참 일해야 할 이 시대 청년들은 그 능력을 제대로 평가받을 정당한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있다. 역사의 한 획을 그을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공정한 과정으로 능력을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강연자도 이것을 모를 리 없을 텐데, 훈계를 하기 전에 적어도 ‘이 시대 청년들의 아픔을 깊이 통감한다.’는 공감의 말 한마디 해줄 수는 없었을까. 




  학창 시절 교실 분위기가 떠올랐다. 권위적인 분위기에서 지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질문의 과정이 소거당하는 것은 일반적인 우리 교실의 풍경이었다. 궁금한 것을 질문했을 때 “이런 것도 몰라?” 라며 돌아오는 비판적이고 따가운 시선으로, 질문을 하는 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학습했다. 흔히 쓰이는 말 중에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라는 표현이 있다. 잘 모를 때는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중간 지향적인 모습을 가르치고 배웠다.  

 위계질서가 강조되는 한국사회에서 윗사람에게 질문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으로 규정된다. 질문을 하는 행위를 돌발 행동으로 여기며 질문하는 사람을 향해 ‘치기 어리다’,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등의 비판적 평가를 내린다. 이러한 사회에서 용인될 수 있는 질문의 수위를 조절하는 것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심한 경우 구성원의 질문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일방적인 정보전달의 방식을 취함으로써 설득의 과정을 생략하기도 한다. 이러한 집단에서는 소수의 기득권자들이 구성원들의 개별적 주체성을 억압하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 당연히 사실에 대한 가치판단은 금기시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우리는 질문을 통해 따져 묻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님을 끊임없이 학습해왔다. 

 2010년 우리나라에서 열린 G20 기자회견장에서의 굴욕적인 일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폐막 기자회견장에서 오바마가 부러 한국의 기자들에게 질문권을 주었고 세네 차례에 걸쳐 질문이 없는지 확인했으나, 한국인 기자단에서는 손을 드는 기자가 한 명도 없었고 끝내 중국인 기자에게 발언권이 넘어갔다. 위계적인 분위기에서 주입받는 것에 익숙한 우리에게 질문하는 것은 아직 낯선 게 사실이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대통령에게 정기적으로 질문을 하고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왕이 될 수 있다.”-헬렌 토마스

 헬렌 토마스는 존 에프 케네디 전 대통령부터 오바마 전 대통령에게까지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 백악관 기자실의 전설이라 불리는 인물이다. 질문하지 않는 우리 사회는 그녀의 경고대로 지난 정권, 대통령이 왕으로 군림했던 사태를 목도하였다.




 그렇지만 최근 들어서 우리 사회 전반에 긍정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신고리 원전 개발 초기 당시에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제안하여 전문가 집단을 조직하고 주민들을 불러 모아 설득하고 토론했다. 숙의민주주의의 첫 시행이었다. 이전 정부들이 설명하는 과정을 생략하고 권위로 밀어붙였던 것에 비하면 너무도 민주적인 방법이었다. 몇 개월 전에는 대한민국의 입시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정부차원에서 학부모 대표를 선발해 토론의 장을 열기도 했다.

 또한,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인문학 열풍이 식을 줄을 모른다. 서포터즈로 활동하고 있는 K출판사의 행사에 작년 말에 참여했다. 사장님께서 올해는 ‘책의 해’라고 할 정도로 책이 새삼 주목을 많이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아도르노는『계몽의 변증법』(1944)이라는 저서에서 아우슈비츠의 대량학살 사건을 구조적인 틀 안에 갇혀 옳은지 그른지 폭넓게 사유하지 못해 벌어진 일로 판단하고 그 해결방안의 실마리를 인문학에서 찾았다.

 인문학이란 인간의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고 대안을 탐구하는 과정인데 지식의 획득보다는 따져 묻고 사유하는 자세를 체득하는 것에 더 큰 가치가 있다. 지금처럼 인문학을 통해 각자가 내면을 단단하게 하고 종속적인 성향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사유하고 나아가 건강한 방식으로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된다면 자연스럽게 성숙한 선진국 시민으로 도약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자유롭게 질문합시다.



이미지 출처: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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