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숲에 누워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를 보던 날이 있었다. 거기 누워있으면 하늘과 대나무뿐이었다. 쏴아아 하고 바람이 불면 사방의 대나무들이 일제히 흔들리며 잎을 바스락거렸다. 바람이 멎으면 햇빛 사이로 댓잎 몇 개가 빙글빙글 내려왔다. 그건 하나의 충만한 시퀀스였다. 그 공간감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다음 바람을 기다렸다. 며칠을 혼자 여행 중이었고, 그날은 그렇게 담양의 죽녹원에 누워 바람을 기다리는 하루를 보냈다.
기분 좋게 선잠이 들던 무렵이었다. 문득 깨달았다. 아니 이게 몇 시간이고 질리지가 않는구나. 대나무는 중독성 강한 콘텐츠구나. 영화도 없던 그 조선시대엔 이게 넷플릭스였겠구나.
나의 일부는 의식이 있고 나머지는 졸고 있는 와중에 그런 생각들이 바람결에 흔들흔들 오갔다. 대나무를 이어붙인 침대가 사실은 등이 배겨서 그랬을 수 있다. 넷플릭스다. 그리고 사군자는 조선시대 넷플릭스의 TOP4 인기 콘텐츠였던 것이다. 아니지 조선시대니까, 그래, ‘내불익수’.
內 (내) / 안, 내면 / 개인의 내면, 사유의 공간
不 (불) / 아닐, 멈추지 않는 / 끊임없는, 지속적인
益 (익) / 유익한, 이로운 / 정신적·감성적 유익함
秀 (수) / 빼어난, 아름다운 / 빼어난 콘텐츠, 감상 대상
내불익수(內不益秀): “내면에서 끊임없이 유익하고 빼어난 콘텐츠가 흐르는 상태”
안녕하세요 행님들 내불익수 털어드리는 십선비입니다.
(☞ 십선비란? 조선 선비의 열 가지 이상적 덕목을 갖춘 인물상을 일컫는 말입니다)
오늘 <서풍에 흔들리는 죽녹원> 시즌1 정주행했더니 유교감성 터짐요. 행님들도 아시다시피 제가 요 몇년 낙방하지 않았읍니까. 열심히 준비했으니 올해는 꼭 될 거다 올해는 꼭 돼야 된다.. 이런저런 잡념이 많던 차에 간만에 내면수양 제대로 했네요. 앗 대통밥님 1푼 감사합니다. “낙방 삼세번은 기본소양. 율곡갓도 9트만에 장원급제한 거 잊지 말고 될 때까지 정진하라 아우야.” 아이고.. 통밥이형님 정말 형님이 군자이십니다.
그간 담양 죽녹원 말로만 들었지 경험을 해보니 그 장대함이 가히 압도적이었는데요. 무려 9만4천평이 넘는 부지, 생태연못에 인공폭포에 또 곳곳에 정자들이며 침상이며, 대나무를 즐기기에 정말 이상적인 환경이었읍니다.
가만히 누워서 저 대나무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도 차분해지고 많은 위안받고 왔읍니다. 요 대나무란 녀석도 씨 뿌리고 처음 4~5년 동안은 안 자라지요. 아니 안 자라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사실은 땅 밑으로 분주히 뿌리를 내리고 쭉쭉 뻗쳐나가 영양분 저장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지만요. 그리곤 5년째가 되는 어느 맑은 아침나절, 가히 폭발적으로 자라기 시작합니다. 하루에 삼척씩 척척 자라기도 한다지요. 그리곤 보름달 몇 번 만에 하늘로 뻗어올라갑니다.
저도 요 몇년 낙방을 거듭하였지만 결코 허송세월 한 것은 아니다, 이런 말을 대나무들에게 듣고 온 것만 같았읍니다. 저들처럼 몇 년을 조용히, 남몰래 뿌리를 내려 땅을 단단히 움켜쥐어야만 어떤 강풍에도 끄떡없는 대나무가 되는 것 아니겠읍니까. 대나무의 저 강직한 성품을 제가 배워왔다지요. 고진감래요 대기만성이요 지성이면 감천이지 않읍니까. 저 십선비도 내년엔 꼭 작은 죽순이나마 올려보겠읍니다.
그리고 제가 이렇게 대나무숲을 쭉 거닐다보니 비뚜룸한 녀석들이 있는 게 아닙니까. 이렇게요.
저는 그간 대나무는 다 곧게 자라는 줄로 알았읍니다. 근데 이렇게 비스듬히 자란 녀석들이 있더라구요. 이걸 보면서 또 깨달음 한술 얻읍니다. 아 대나무도 비딱할 수가 있구나. 비딱히 쓰러진 채로도 곧게 자랄 수가 있구나. 내가 선 자리가 쓰러질 듯 기울어졌더라도, 그래서 비딱하게 자라야 하더라도, 그럼에도 빛을 향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빛을 만날 수가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고 나니 수많은 대나무들 사이에서 저런 비뚜룸한 녀석들만 보이더군요. 그래 저 녀석들도 나처럼 끼니마다 암담했을 것이나 끝내 올곧게 자라고자 빛을 향하였구나. 이 나도 그래야 하겠다, 들어갈 때 혼탁하던 마음이 돌아올 때는 청명해지었읍니다. 역시 대나무는 내불익수 최고의 띵작이 아닐 수 없읍니다.
씁. 잠깐 졸았다.
몇 시간을 누워있던 거지, 춥네.
조 앞에서 대통밥이나 한 그릇 먹고 들어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