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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간의 헤드뱅잉

by Sangchun Kim

20 YEARS OF HEADBANGIN’


올해 펜타의 슬로건이었다. 그러고보니 내 얘기이기도 하다. 처음 가본 대형 락페가 2005년 부산락페였으니 음악 페스티벌에 다닌지도 어느덧 20년이 됐구나.


돌아본다. 20년간의 헤드뱅잉을 잠시 멈추고 머리통을 반대로 되감아보자.


매 해의 페스티벌 모두가 저마다 각별한 기억이지만 세 손가락을 꼽아보니 의외로 금방 나온다. 그만큼 세 번의 페스티벌은 압도적으로 강렬한 경험이었다. 2005년 부산, 2007년 펜타, 2009년 지산. 나는 이 세 해를 지난 20년간 자주 떠올리며 살아왔다.


1. 2005년 부산락페


음악 페스티벌에 관한 기억은 여기서 시작된다. 이전에도 클럽공연이나 쌈사페(추억의 쌈지사운드페스티벌) 같은 작은 페스티벌엔 가봤지만 부산락페는 차원이 달랐다.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전에 다른 글에서 그에 관한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이렇다.


(…) 2005년 부산엔 디어사이드, 리치 코젠, 도메인 같은 해외 뮤지션과 글램, 스키조, 크라잉넛 같은 국내 뮤지션이 무대에 섰다. 그때는 무료였고, 다대포 해수욕장 한가운데 뜬금없이 무대를 세워놓고 음악평론가 성우진씨가 사회(!)를 봤다. 그때도 숨막히게 더웠다. 소방차가 물을 실어날라 뿌려주었다. 누군가 “물 좀 주소, 목마르요”하는 한대수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다 같이 따라불렀다. 그럼 뮤지션들이 생수를 던져주었다. 그 와중에 “동남아시아인으로 추정되는 몇 사람이 가슴을 만지고 도망치고 있으니 여자분들은 주의하라”는 방송이 나왔다.


이제는 설화나 전설 같은 그 악명대로 부산락페는 개빡센 페스티벌이었다. 웃통 벗고 슬램하고 원을 만들어 모싱을 하고 한 6명이 동시에 바디서핑을 했다. ‘신을 죽인다’는 뜻의 디어사이드는 부루털 데스 메탈을 자비 없이 90분 동안 안 끊고 달렸다. 그때는 쌩쌩하던 크라잉넛이 다죽자를 부르면서 관객을 왼쪽과 오른쪽으로 펼쳐놓고 가운데서 부딪히게 했을 때는 다들 광분해서 진짜로 다 죽을 뻔했다. 누군가 넘어지면 바로 어깨를 끼우고 둥글게 스크린을 쳐서 보호해주던 부산형들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다음날 일어나니 입안이 세 군데 터져있고 턱에 멍이 들고 온몸이 안 아픈 곳이 없었다. 그럼에도 설레는 마음으로 그날도, 그다음 날도 다대포에 갔다. 가서 머리통을 흔들고, 서클에 뛰어들어 슬램이란 것을 해보고, 모르는 사람 어깨를 잡고 기차놀이를 하고, 가슴 만지고 도망가는 동남아인을 부산형들이 추격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렇게 강렬한 에너지를, 해방감을 나는 거기서 처음 느꼈다. 그게 나의 어딘가를 뻥 뚫어주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열차에서 창밖을 보며 살아가는 게 꽤 재밌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그 뭉클함을 잊을 수 없다.


2. 2007년 펜타포트


단 하나만 꼽으라면 나에겐 망설임 없이 2007년 펜타 캐미컬 브라더스다. 그때 이등병이었고, 기적적으로 백일휴가를 펜타 일정에 맞춰나왔다. 강원도 철원 산속에 갇혀있다가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 해방감, 잊을 수가 없다. 여기가 어딘지 현실은 맞는지 얼떨떨한 채 삽으로 밥 하다가(취사병이었다), 마침내 제대로 된 곳에 제대로 된 사람들과 함께 있는 그 감각. 반쯤 꺼져있던 뇌가 전구에 불이 들어오듯 확 켜지는 게 느껴졌다. 호흡이 가쁠 정도로 심장이 뛰고 온몸에서 힘이 솟아올랐다.


머리통을 흔드는데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꾹 참았다. 캐미컬 브라더스의 공연은 어떤 호기심들이 청각과 시각의 한 세트로 펼쳐지는 종합예술인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엔 정말 독보적인 쇼였다. 캐미컬 브라더스가 아니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시대보다 높은 예술이었다.


서페이스 투 에어에 이르러서는 그 공감각적 환희 속에서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 가슴은 벅차고 심장은 요동치고 자꾸만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마음을 꾹꾹 참으며 극한의 행복을 느꼈다. ‘아 LSD 같은 걸 하면 아마 이런 기분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3. 2009년 지산


이때 국내 페스티벌 시장에 사건이 생겼다. 펜타 해외 아티스트 섭외팀이던 옐로우나인이 독립해 지산밸리록페스티벌을 차린 것이다. 펜타 입장에선 통수였지만, 소비자 입장에선 국내 페스티벌 수준을 한 단계 올린 굿통수(!)였다. 지금 페스티벌 하면 당연히 떠올리는 잔디밭이나 액티비티 같은 것들은 모두 쾌적한 리조트 스키장 부지에서 열린 지산부터 시작됐다. 그전까지 펜타는 동춘동 대우자동차판매 부지에서 열렸다. 먼지 날리는 대형주차장에서 페스티벌을 해온 것이다. 거기에 매년 폭우가 쏟아졌다. 그 거대한 진흙바닥에서 이동하려면 주방에서 쓰는 파란색 발목장화가 필수였다.


쾌적한 게 다가 아니었다. 옐로우나인은 후에 CJ에 인수되었을 정도로 일을 잘했는데, 첫 해에 무려 오아시스를 데려왔다(이후에도 라디오헤드, 레드핫칠리페퍼스 같은 레전드들을 매해 모셔왔다). 진흙바닥에서 뒹굴다가 쾌적하고 뽀송한 잔디밭과 작은 계곡, 버블수영장, 쿨링존에 각종 액티비티가 있는 페스티벌이라니. 거기다 오아시스라니. 지산 첫 해는 정말 감동이었다.


그땐 남아도는 게 체력이고 항상 없는 게 돈이어서 숙소도 예약 안 하고 그냥 갔다. 디제이부스 구석에서 대충 술 먹고 박스 깔고 자고 그랬다. 이때는 행사장 앞 식당 사장님네 집 거실에서 잤다. 밥 먹으며 사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떻게 딜이 됐다. 아침에 라면도 끓여주셨다.


데낄라 한병과 치킨 한 마리를 몰래 들여가기 위해 산을 타고 작은 개울을 넘기도 했다. 그땐 그런 게 가능했다. 그렇게 들여온 데낄라를 병째로 들고 놀면서 모르는 사람들이랑 나눠먹었다. 밤이 되면 캠핑장에서 누군가 기타를 쳤고, 그러면 각자 숨겨온 장미주 같은 것들을 꺼내들고 둥글게 모여 앉았다. 새벽까지 떼창을 하다 잠깐 눈 붙이고 아침이 되면 또 놀러 나갔다. 낭만이 있었다.


마지막 날 헤드는 우리 모두가 사랑한 오아시스였다. 9만명이 넘게 모여서 그 많은 히트곡들 하나하나에 감격하고, 마지막의 마지막 앵콜을 기다렸다. 웃통 벗은 남자들과 야광팔찌 찬 여자들 모두 찌그러진 맥주컵을 밟고 서서. 데낄라의 취기가 옅어지며 밤의 잔디 냄새가 났다. 그때 부드럽게 찰랑이는 물소리가 들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지막 곡은 샴페인 슈퍼노바였다. 그리고 그 공연을 마지막으로 오아시스는 해체했다.




엊그제 그 샴페인 슈퍼노바를 다시 들었다. 마침내 엄마 말 듣고 재결합한 오아시스 공연을 보고 왔다. 두 샴페인 잔이 부딪히는데 16년이 걸렸다.


이날 공연장에서 기분이 좀 묘했다. 공연 시작도 전부터 다 본 것처럼 이미 너무 좋았다. 그냥 다 필요 없이 이 장소에 내가 있다는 걸로 충분한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내가 20년간 좋아한 밴드를 좋아하는 5만5천명과 모여있는 것. 그 자체로.


공연 전에 옆 자리에서 러시아 사람 첸이 말을 걸어왔다. 맥주에 알딸딸하게 취해있는 첸은 자기 자리는 스탠딩이지만 자리 주인이 올 때까지 잠깐 옆에 앉겠다고 했다. 가볍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첸의 최애곡은 슬라이드 어웨이였다. 술에 취한 첸은 맥주를 흘리기도 하고 자기가 너무 취해서 미안하다며 연신 방해가 됐으면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아니라고,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좋은 날이다. 미안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내 친구들이거나 앞으로 친구가 될 사람들이다. 즐겁게 놀고 좋은 추억을 함께 만들자.


그런 거였는지 모르겠다. 돌아보니 그 소속감 혹은 유대감 때문에 20년간 페스티벌을 다닌 것도 같다. 나는 페스티벌의 거의 모든 요소를 좋아한다. 진흙바닥과 맥주가 섞인 잔디냄새, 입구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점 선명해지는 음악소리, 살짝 좁지만 어떻게 누울 수는 있는 돗자리, 깃발들과 티셔츠들, 밤과 빗줄기를 가르는 불빛들, 또 벅차오르는 마음들. 그런 것들이 내 안에 남아 20년간 나를 일으켰다.


그중 가장 좋은 건 나와 같은 사람 수 만명이 모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래서 더 재밌게 놀 수 있다. 누가 넘어지면 일으켜주고 먼지도 털어주는 사람들. 지갑! 지갑! 하며 슬램하다 떨어진 물건이 주인을 찾을 때까지 불러주는 사람들. 어떤 유대로 연결된 사람들. 페스티벌엔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게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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