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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N Mar 24. 2016

03. 너는 정말 밀당의 고수

내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너의 이름은..


그런 아이를 본건 정말이지 난생처음이었다.

내가 모르는 다른 세상에서 온, 내가 처음 들어보는 낯선 말을 한다.

감히 따라 하지도 못할 만큼 음성부터 발음 구조까지 완전히 다른 그런 언어다.

누에가 갓 뽑아놓은 실처럼 가늘고 고운 실버 블론드 머릿결, 영혼까지 꿰뚫어볼 듯한 블랙홀 같은 동공이 고스란히 보이는 하늘빛 눈동자, 핏줄이 비치는 듯한 맑은 피부톤, 다듬어지지 않은 듯 예상치 못한 이상한 부분에서 꺾이는 뭔가 특이한 목소리, 13등신은 족히 되어 보일 정도로 비율이 과한 길쭉길쭉한 골격까지.. 아무튼 지금까지 내가 봐온 다른 외국 여자 아이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해서 아주 아주 신기한 여자 아이..

그렇게 문을 열고 멍하니 서 있자 그 소녀는 내게 뭐라 뭐라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며 몹시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내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기 시작하고 동공이 확장된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어색하게 'Hello'하고 인사라도 꺼내보려 하지만, 잔뜩 쫄아든 성대에서 겨우 기어나온 목소리는 모기 소리보다 작다. 입술도 말라붙어 제대로 떨어지지 않는다. 괜스레 밀려드는 민망함에 관자놀이 부근이 훅 달아오른다. 소녀를 보자마자 그렇게 나는 갑자기 이성의 존재에 갓 눈을 뜬 수줍은 소년이 되고 말았다..


내 응대가 마땅치 않았는지, 그 소녀는 내게 턱으로 비켜달라는 시늉을 하며 불쑥 집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더니 새초롬한 표정으로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고, 발그레 상기된 얼굴로 조심스럽게 벽에 걸린 사진들과 선반에 올려진 장식품들을 하나하나, 그러나 무심히 살펴본다. 그러더니 실내에 들어와 더웠는지 양쪽 귀가 달린 노르딕 문양의 빨간 털모자를 벗어 들고 있던 가방에 넣는다. 모자를 벗으며 발생한 정전기 때문에 약간 부스스하게 흐트러진 갈래 머리가 어쩐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흘끔흘끔 그 소녀를 훔쳐보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는 흠칫 놀란다.


때마침 부엌에서 인기척이 들리고, 순간 소녀가 갑자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 바람에 움찔한 나도 자동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다가 코트자락이 옆 테이블에 놓여있던 사진 액자를 툭 쳐서 넘어뜨린다. 액자가 넘어지면서 주위에 있던 메모지와 펜, 그리고 작은 장식품들까지 흐트러지고 만다. 얼른 액자를 다시 세워 사태를 수습해보려 하지만 손이 평소처럼 움직여주지 않는다. 머쓱함에 이게 왜 이러냐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테이블을 정리하는 동안 어쩐지 뒤통수에 따가운 그 아이의 시선이 꽂히는 듯해 슬며시 뒤를 돌아보지만, 그 아이는 이미 거실에 없다.


그 소녀를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는 주방으로 홀린 듯 향한다. 소녀는 주인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주방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그 소녀가 보이는 지점에 서서 벽에 꽂혀있는 책들을 살펴보는 척한다. 하지만 내 몸의 신경들은 온통 그 소녀를 향하고 있다. 도무지 시선을 뗄 수가 없다.


순간 소녀가 활짝 웃는다.

내 마음이 여름 한 낮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린다.

홀딱 빠져든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소녀는 유명하지 않은 '오로라'라는 인디밴드의 보컬이라고 한다. 정식 출시된 앨범은 없지만, 소녀의 노래를 들어본 사람들은 모두 기가 막히다며 꼭 들어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아.. 정말 미치도록 들어보고 싶다..


갑자기 늘 신경 쓰이던 일들이 아득하게 멀어져버리기 시작했다. 그 소녀 앞에서는 친구와 다툰 일도, 오늘 중에 꼭 해야 한다고 단단히 별러온 일들도 전부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소녀 이외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무의미하다. 


그리 상냥하지 않고, 행동에 거침이 없다. 처음 만나는 사람 앞에서도 눈치 보지 않고 거리낌이 없이 제멋대로이지만, 어쩐지 그 소녀의 모든 걸 알고 싶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다음번에 또 와서 친해지면 소녀의 기가 막히게 신비로운 노래도 꼭 들어보고 싶다. 소녀에게 다가가 뭔가 있는 척 으스대 보고도 싶지만, 막상 앞에만 서면 완전히 무장해제되고 만다. 나라는 존재는 안중에도 없는 듯 눈길조차 주지 않고, 무뚝뚝하며 쌀쌀맞기까지 한 소녀이지만, 나는 소녀가 너무 너무나도 궁금하다. 그래서 용기를 내서 말을 건다.


 "저.. 이름이 뭐야?"


 "나? 레이캬비크 아이슬란즈도티르.."




열흘 만에 본 레이캬비크의 환한 웃음.. 홀딱 빠져버린 그 찰나 (Reykjavik, Iceland - Oct. 2015)


[에필로그]

1. 레이캬비크(Reykjavik)는 아이슬란드의 수도.


2. 아이슬란드 이름은 별도의 성을 사용하지 않으며, 다른 서양식 이름의 성의 자리에 오는 것은 바로 윗대의 부칭이나 모계명만을 사용한다. 욘 스테판손(Jón Stefánsson)의 아들 피알라르(Fjalar)의 이름은 피알라르 욘손(Fjalar Jónsson)이 된다. 성의 자리에 오는 욘손은 욘의 아들(Jóns + son)이라는 뜻이다. 또 다른 딸 카트린(Katrín)의 이름은 카트린 욘스도티르(Katrín Jónsdóttir)가 된다. 성의 자리에 오는 욘스도티르는 욘의 딸(Jóns + dóttir)이라는 뜻이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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