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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N Mar 24. 2016

15. 리스본행 주간열차

눈 감으면 떠오르는 기억, 그 믿지 못할 망상..


첫 눈에 봐도 예쁜 사람이 있다.

오래 두고 곱씹어봐야 예쁜 사람이 있다.


사람의 기억 시스템은 예상외로 허점이 많다.

그 친구에게는 아름다운 미담으로 남았던 기분 좋은 추억이 나에게는 떠올릴 때마다 치 떨리는 악몽 같은 기억으로 남아있다는 걸 알았을 때.. 분명 우리가 함께 했던 그 시간은 이미 각자의 머릿속에서 뒤틀리고 왜곡되어 서로 다르게 반응하고 있었다. 비록 매번 그렇게 극단적인 차이가 나는 건 아닐지라도, 분명 미묘한 차이는 존재한다.

어쩌면 우리의 기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허구의 세상을 다루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각각의 사람에겐 자기 보호 본능이 있고, 자신만의 세계관이 있으며, 각각의 취향이라는 것 또한 무시 못한다. 인간의 모든 감각은 자기 자신을 최우선으로 두고 있기 때문에 너와 내가 공유했던 순간도 시간에 따라 점점 더 평행을 그리는 각기 다른 두 개의 우주가 되어가고 있는 걸지도..




#쁘띠 사이즈의 그녀 이야기..


포르투에 도착해 몸집만큼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가는 길. 지도 상에는 역에서 바로였는데, 길을 잘못 들었는지 같은 골목을 두 바퀴째 돌고 있는 듯하다. 포르투의 골목길은 말도 안 되게 좁고 가파르다. 울퉁불퉁한 돌길에 캐리어 바퀴라도 망가지면 정말 낭패다. 5분도 채 안 걸었는데 목덜미를 타고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겨우겨우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을 땐, 5분이면 갈 길을 돌고 돌아 20분이 넘도록 커다랗고 무거운 캐리어를 거의 들고 다니다시피 한 후였다. 가쁜 숨을 고르며 벨을 누르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살짝 짜증이 밀려오려는데, 190쯤 되는 큰 키에 수염이 덥수룩한 한 남자가 뒤에서 쓱 다가와 문을 열어주며 말을 걸었다. 기분 좋은 저음이었다. 우린 그렇게 만났다.

낯을 좀 가리는 나는 초면에 섣불리 말을 거는 게 두렵다. 하지만 그는 남미인들 특유의 붙임성과 낙천적인 유쾌함으로 무장했다. 묻지도 않았고 궁금하지도 않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쉴 새 없이 꺼내놓는다. 수염이 덥수룩한 상남자 같은 외모를 한 다 큰 어른이 알록달록한 줄무늬 티셔츠를 아무렇지도 않게 걸쳐 입고 묵직한 저음으로 종알종알 이야기를 이어가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진다. 웃음이 터진 다음은.. 친구가 되는 거지 뭐..

 



#덩치 큰 털보 이야기..


스펙을 늘려볼 요량으로 큰 맘먹고 코임브라에 있는 학회 코스를 두 달 일정으로 왔다. 늘 갖춰 입어야 했던 양복이 아닌 편안한 차림으로 돌아다니니 좋고, 면도도 귀찮으니 생략. 2주 만에 털북숭이가 되었다. 따뜻해서 좋다. 흐흐..

빡센 한 달 반을 보내고 주말을 이용해 포르투로 놀러 왔다. 아무래도 대학도시인 코임브라에서는 주책없이 놀기엔 보는 눈들이 많아서 나름 근엄함을 유지하느라 힘들었는데, 오래간만에 해방된 기분이다. 친구들과 만나 진탕 마시고 놀았는데, 하필 포르투에서의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날 약속이 파투가 났다. 일정이 하루가 빈다. 하루를 이렇게 공치기는 아까운데..

마침 찾아간 게스트하우스에서 그녀를 만났다. 특별한 계획이 있으면 껴달라고 했더니 포르투에서 유명하다는 포트와인 셀러를 가고 싶어 하는 눈치다. 사실 나는 남미에서도 와인으로 유명한 멘도사 출신이라 포트와인 셀러는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이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건 즐거운 일이다. 무조건 같이 가자며 따라나서야지. 날씨도 좋고 하니 슬슬 산책이나 하다가 와인 한 잔 하고, 월요일부터 또다시 빡센 세미나 일정 있으니 기차 타고 코임브라로 돌아가서 준비 좀 하다가 자면 얼추 시간이 맞겠다. 




특별한 일정이 딱히 없던 쁘띠 사이즈 여자와 덩치 큰 털보는 의기투합해서 함께 유명하다는 포트와인 셀러에 가보기로 했다. 11월 초인데도 기온이 20도를 육박하는 화창한 날이었다. 20~30분이면 걸어서도 기분 좋게 가서 우아하게 와인을 즐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 착각이었다. 둘 다 지독한 길치였다는 걸 처음엔 서로 몰랐으니까.

가파른 골목길을 2시간가량 헤매면서 서로 지쳐 짜증을 낼 법도 했지만, 유쾌한 에너지를 쉬지 않고 퐁퐁 뿜어대던 털보는 틈만 나면 엉뚱한 농담을 해대며 어색한 분위기를 기분 좋게 풀어갈 줄 아는 물건이었다.


그토록 힘들게 달달한 포트와인을 맛보고,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길가다 즉흥적으로 작은 레스토랑에 들어가 앉았다. 맛집으로 유명하지도 않은, 동네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간단히 점심을 하면서 시간을 때우는 곳.


시음한 포트와인으로 간에 기별도 안 간 참이라 맥주 한 잔씩 주문해놓고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침묵의 순간을 1초도 못 견디는 털보는 아까 했던 농담을 자꾸 꺼내 재활용하고, 쁘띠 사이즈 여자는 열 번 들은 같은 농담에도 포복절도하며 웃어준다. 와인에 맥주, 그리고 낮술이라는 쓰리콤보 효과는 그렇게 밤보다 빠르게 둘의 체내에서 엔도르핀 분비를 활성화시켰다.


마침 흘러나오던 그리 흥겹지 않은 음악에도 온몸에 뻗어있는 남미인들 특유의 고도로 발달된 댄스 세포의 떨림을 주체 못 하던 털보.


그리고 우유부단해서 좀처럼 남의 부탁 거절 못하는 바보 여자.


둘은 옆 테이블에 앉아 담소를 나누던 동네 노인네들이 까칠한 시선을 느끼면서 그렇게 같이 민망하도록 푸르뎅뎅한 형광등 아래서 엉터리 탱고도 췄더란다.


요란하게 가벼운 낮술을 끝낸 둘은 다시 동 루이스 1세 다리를 건너 도우루 강가를 어슬렁거렸다.


해질 무렵이 되자, 여행은 높은 데서 보는 전경이 전부라는 털보의 여행 철학을 소중히 지켜주기 위해 클레리구스 탑 전망대에 올랐다. 포르투 시내 전경 위로 핑크빛 하늘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리고 포르투 대성당 앞에서 일몰을 함께 지켜보고는,

상 벤투 역 앞에서 작별인사를 했다.




일주일 후 여자는 상 벤투 역에서 혼자 리스본으로 가는 12시 열차를 탔다. 리스본까지 4시간 반.. 

2시쯤 열차가 코임브라 역을 지나자 여자는 덩치 큰 털보와 보낸 하루를 떠올린다. 그리고 짐짓 근엄한 모습으로 세미나실에 앉아있을 털보에게 짧은 안부 메일을 보냈다. 단 하루였지만 그냥 그렇게 보낸 석 달과도 선뜻 바꿀 만큼 유쾌했던 특별한 하루를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털보는 답장했다. 아직 코임브라에 있지만, 조만간 그리스로 휴가를 갈까 한다고.. 털보는 지나간 기억보다는 앞으로 있을 즐거움을 쫒는 사람..


그렇게 다른 방향으로 향하던 두 사람의 우주는 포르투에서 교차하고는 다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돌던 궤도를 돌뿐이다. 그 교차점은 각기 다른 둘의 기억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





쁘띠 사이즈 여자와 덩치 큰 털보가 같은 시간, 같은 곳에서 바라 본 포르투의 일몰 (Porto, Portugal - Nov.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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