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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N Mar 25. 2016

13. 백설공주의 남자

세고비아에서 발견한 닥터 S의 비밀 상담 노트..


 "신경정신과 상담 전문의 닥터 S입니다. 들어와서 의자에 편하게 앉으세요."


선글라스를 낀 호리호리한 턱수염 사내가 수행원으로 보이는 덩치 큰 사내들을 뒤로 물리고 상담실로 들어선다. 고급스러운 명품 옷에 기품이 느껴지는 걸음으로 들어와 주저 없이 리클라이너 소파에 앉아 몸을 기댄다.


 "상담 내용은 절대 비밀이 보장되니 안심하시고, 편안하게 하고 싶으신 말씀 시작하시면 됩니다." 


잠시 주저하던 사내는 주머니에서 실크 행커치프를 꺼내 입 주위를 닦고는 천천히 입을 연다.


 "내 이름은 펠리페 2세.

16세기에 유럽 최고의 로열패밀리였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2대 국왕일세.

우리 집안 최고의 엄친아로 불리던 '황금왕' 카를 5세가 바로 내 아버지였지."


 "아.. 그러셨군요.. 익명으로 상담을 신청하셔서 미처 몰랐습니다."


 "자랑을 하려는 게 아니라, 답답한 내 마음을 좀 털어놓고 싶어서 찾아온 거니 부담 갖지 말고 들어주시게. 그리고 솔직한 소견 부탁하네."


 "네.. 그럼 말씀 계속하시죠."




 "지금은 겨울왕국의 엘사에게 밀려났지만, 한 때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했던 공주..

인지도 집권 기간으로 따지면 구전되던 얘기들을 그림형제가 정리해서 퍼뜨린 게 200년이 넘으니, 사실 엘사 따위는 명함도 못 내밀지.. 눈처럼 하얀 피부, 곱게 찰랑이는 흑단 같은 머리카락, 앵두같이 빨간 입술로 묘사되어 전 세계인들에게 미인의 전형으로 각인된 하얀 눈이라 불려지는 사랑스러운 그 여인을 알고 있나?"


 "당연하죠. 세상에 백설공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렇겠지.. 그렇다면 백설공주를 구해내고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백마 탄 왕자의 이름은 알고 있나?"


 "글쎄요..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네요."


 "이제 와서 말하지만, 백설공주의 백마 탄 왕자가 바로 나였다네.

아무도 내 이름을 알지 못하는 건 내가 그리 하라 단단히 입막음을 시켰기 때문이지."


 "아.. 정말인가요? 전 세계 여성들의 이상형인 완벽한 남자의 대명사로 알려진 프린스 차밍, 바로 그분이시라고요?"


 "그렇다네. 거기에 대해서 할 말이 많지. 선글라스 좀 벗어도 되겠나?"


사내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앉으며 선글라스를 벗는다. 기다란 얼굴형에 심하게 굴곡진 매부리코, 멍해 보이는 눈.. 턱수염으로 가려져 있던 턱은 부정교합으로 심하게 튀어나와 있고, 입꼬리에서는 맑은 침이 턱수염을 타고 흘러내린다.


 "전하, 실례지만.. 거기.. 입가에 뭔가가 묻은 것 같은데요.."


 "아.. 못 본 걸로 해주게. 우리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이 이렇게 생겼다네. 학자들 말로는 아마도 근친결혼으로 인한 유전병이 아닐까 하더군."


사내는 들고 있던 실크 행커치프로 입가에 흐른 침을 찍어내고는 이야기를 계속한다.

 

 "사실 백설공주로 알려진 그녀의 본명은 마르가르테 본 발데크. 공주가 아닌 독일의 백작 가문 출신이었다네. 눈에 띄게 예쁘긴 했지만, 지금 알려진 것처럼 흑발이 아니라 금발이었지. 흑발이라는 이미지를 입힌 건 디즈니 사의 소행이었지만, 그녀와 가상의 백설공주를 동일시하는 자들이 없을 테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


 "정말 놀라운 얘기를 연타로 듣습니다. 상담 경력 10년 차인데 이렇게 당황스러운 건 처음입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하니 더 들어주시게. 

우리가 처음 만난 건 브뤼셀이었지. 당시 내 나이 스물둘, 그녀는 열여섯.

만났을 때 서로 호감을 느끼긴 했지만, 우리의 정식 혼인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네.

당시 그 넓은 땅을 다스리는 가장 손쉬운 전략이 정략결혼이었기 때문에 애당초 내 결혼은 제국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정치적 도구였을 뿐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

솔직히 내게 사랑이나 연애는 불장난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는 걸 이해하겠나?"


 "저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환경에서 성장하셨느니 가타부타하기 조심스럽지만, 아버님의 위상이 워낙 대단하다 보니 말입니다.. 그 부담으로 인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의심이 가는데, 맞습니까?"


사내는 약간 언짢은 기색을 보이더니, 한숨을 내쉬고는 이야기를 이어간다.


 "호방한 성격의 아버지는 영토확장을 대업의 1순위로 두셨고, 결국 프랑스를 제외한 서유럽 전역은 물론 대서양 건너 아메리카 대륙까지 섭렵하며 영국에 앞서 해가 지지 않는 스페인 제국을 건설하셨네. 물론 그 업적은 인정하지만, 내가 볼 땐 과대평가된 부분도 많아. 사실 영토확장에만 치중하느라 국가재정은 위태로운 상황이었지. 직계 장자였던 내가 옴팡 뒤집어쓸 상황이었다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는 거리가 멀다는 말씀이신 거죠?"


 "그렇지. 난 그런 위기를 타계하고자 아버지와는 정반대의 노선을 탄 것뿐이고, 모든 것을 서류화하여 청렴한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구축하겠다는 선한 의도로 혁신적인 제도를 설계했던 거였어.

근데 시대를 너무 앞서 갔는지 대다수의 이해와 지지를 얻지 못한 거야. 혼자서라도 어찌어찌해보려 죽도록 노력했지만, 무지하고 욕심 많은 대신들과 그 넓은 땅에 흩어진 영주들을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이었네. 그래서 발로 통치해도 100년은 족히 번영했을 황금기의 스페인 제국을 몰락으로 이끌었다는 오명도 쓰게 된 거겠지. 하지만 난 평생 잠도 포기해가면서 오직 하느님과 나라만을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해왔다고!"


 조곤조곤 자신의 입장을 피력해나가던 사내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고 있다.


 "아버님에 비해 나름의 업적들이 상대적으로 평가절하 된 것 같아 안타깝네요. 보통 외향성을 지닌 사람들은 그런 경우 어떻게 해서든지 상대방을 설득해내려는 강한 의지를 보입니다. 반면에 그런 오해들을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고 쌓아두신 걸로 보아 내향적 성향으로 판단되는데 인정하시나요?"


 "음.. 그렇게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 난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네. 역사서에 내 개인사를 모조리 누락하도록 엄명을 내리긴 했지. 그래서 백설공주와 관련된 이야기에서도 내 이름을 언급하지 않도록 입단 속을 시킨 거고. 사실 약간 외모 콤플렉스도 있고 해서 왕자의 외모 부분은 살짝 돌려서 묘사하라고 유도하기는 했지만 뭐.."


 "아.. 그랬군요. 그럼 심적인 부담이 엄청나셨을 텐데, 스트레스 해소는 어떤 식으로 하셨나요?"


 "열심히 기도하는 걸로 이겨낼 수 있었지. 난 아주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네. 덧붙이자면, 아버지가 신교도들의 세력 확장을 제대로 막지 못하신 것이 못마땅했어."


 "종교로 승화하셨군요.. 그러면 백설공주, 아니 마르가르테 본 발데크 그 백작의 딸과는 어떻게 된 건가요? 많은 경우에 마음에 맞는 이성과의 로맨틱한 교류로 마음의 위안을 찾기도 하니까요."


 "아까 얘기하지 않았나? 그저 지나가는 불장난이었을 뿐이네. 만났을 당시 새어머니에게 미움을 받고 브뤼셀로 쫓겨났다고 해서 측은한 마음이 들었는데, 만나다 보니 어린 나이에도 영악한 구석이 있더라고. 내가 백작 가문과의 결혼은 불가능하다고 못 박았더니 바로 태도가 달라지더군. 마침 왕궁으로 돌아가야 해서 몇 달 만나다가 헤어졌다네."


 "우리가 알고 있던 얘기와는 많이 다르네요. 그 이후에 들은 소식도 없었나요?"


 "나야 일에 파묻혀 지내느라 그 여자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지. 하지만 워낙 미모만큼 욕심도 많았던 여자라서 어린 나이에 가문에서 내쳐진 후로 어떻게든 신분 상승해보려고 아등바등했지 않았겠나? 나중에 얼핏 전해 듣기로는 감히 내 아버지를 만나겠다며 생난리를 치기도 했다는데, 워낙 동해 번쩍 서해 번쩍하신 분이라.. 그리고 2~3년쯤 지나서 내가 왕이 되기 직전에 사망 소식을 들었네. 독이 든 사과로 살해되었다는 흉흉한 소문도 돌았지."


 "그런 일이.."




 "세상 사람들이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게 참 많아..

지나고 보니 나도 참 굴곡진 인생을 살았어. 기대했던 장남 녀석도 합스부르크의 이 저주받은 부정교합을 피해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곱사등에 한쪽 다리를 절기까지 한다네. 대 제국의 후계자로서 그런 유전병 폭탄을 맞았으니 그 성정이라고 고울 수 있겠나? 아랫 것들만 죽어나고 있지. 아비로써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야. 그나마 큰 딸 하나가 비교적 멀쩡해서 의지가 되지만, 이런 얘기를 딸에게 털어놓지는 못하겠고..

아무튼 이렇게 털어놓고 나니 조금 홀가분해지는구먼. 고해성사와는 또 다른 느낌일세."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배운 부분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흠.. 시간이 꽤 지났군. 다른 일정이 있으니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지. 조만간 다시 일정을 조정해서 찾아오도록 하겠네."


자리에서 일어서는 사내의 손에 들린 실크 행커치프가 푹 젖어 있다. 안타까운 마음에 오지랖을 떨어본다. 

 

 "저 여기.. 제가 잘 아는 성형외과 의사 명함인데 상담 한 번 받아보시죠. 만족스러우실 겁니다."


사내는 헛기침을 크게 하더니 명함을 받아 재빨리 실크 재킷 포켓에 넣고는 황급히 상담실을 빠져나간다.


 "다음에 상담 예약 전화 주실 때는 꼭 프린스 차밍이라고 말씀해주세요!"





세고비아의 알 카사르를 뒤로 하며 백설공주의 남자가 느꼈을 남모를 고단함에 공감하다.. (Segovia, Spain - Nov. 2015)


[에필로그]

1.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의 외곽에 위치한 세고비아에는 백설공주의 성으로 유명한 알 카사르가 있다. 알 카사르(al kazar)는 스페인어로 성을 뜻하는데, 세고비아에 위치한 알 카사르가 백설공주 성의 모티브로 쓰였다고 한다.


2. Schneewittchen: Marchen oder Wahrheit? (Snow White: Is It a Fairy Tale?) by Eckhard Sander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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