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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케이 진 Mar 25. 2016

왜 데미안 허스트에 열광하나?

남다른 성공엔 남다른 이유가 있다.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1965년생 남자. 영국 브리스톨 출생으로 회화, 설치예술 등을 작업하는 아티스트다. 하지만 나는 그를 사업가라고 생각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모든 예술가는 사업가다. 그들이 파는 것이 상품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과 감정이기 때문에 사업가로 보이지 않을 뿐.     


예술가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자신만의 형식으로 대중에게 판다. 그래서 대부분의 예술가는 가난하다. 생각과 감정을 파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술작품은 특히 더 어렵다. 문학, 드라마, 영화, 음악 등은 비교적 시간이 넉넉하다.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시간이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텍스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재미적인 요소를 첨가하기도 수월하다. 하지만 미술은 비교적 짧은 시간에 텍스트의 도움 없이 대중을 설득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미안 허스트는 생존하는 최고의 비싼 작가가 됐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 그것을 알기 위해선 다음의 세 가지를 알아야 한다. 첫째, 그가 파는 생각과 감정을 알아야 한다. 둘째, 그 생각과 감정을 어떤 형식으로 파는지 알아야 한다. 셋째, 그 형식을 어떻게 파는지 알아야 한다.    


첫째, 그의 생각과 감정은 죽음에 집중돼 있다. 죽음. 바로 이것이 성공 포인트다. 누구나 결국엔 죽기 때문에 죽음은 모든 인간의 공통 관심사다. 모든 사람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주제를 선택한 것. 참으로 탁월한 전략이다. 그렇다는 과연 그는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의 작품에는 해골이 자주 등장한다. 작품 <신의 사랑을 위하여>는 실제 남성의 해골을 오브제로 사용했다. 화려한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이 해골 작품을 완성한 후 그는 “인간 존재의 무상함을 형상화했다. 그렇기에 작품을 본 관객들이 희망을 느끼고 고양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아울러 “해골은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고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자신이 죽으면 세상만사 모두 사라지는 것이니 사실 많은 것을 가져봤자 소용없다.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살면서 끊임없이 탐욕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죽음은 어쩌면 탈출구 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그가 보여주는 죽음의 이미지는 밝다. 죽음이 비극으로 보이지 않는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 그것이 비극이 아니라면 그것은 꽤나 희망적이다.     


둘째, 그의 작품은 파격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파격을 위한 파격은 아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쇼는 아니란 뜻이다. 그는 젊은 시절 시체실에서 살았을 정도로 죽음에 대해 깊이 성찰했다. 깊은 성찰 후 진정성 있는 작품을 창작한 것이다. 그 누구도 시도치 못한 독창적인 방법으로...     


데미안 허스트는 자신의 작품을 “삶과 죽음, 가벼움과 무거움, 유한함과 무한함에 대한 탐구”라고 언급한 바 있다. <1000년 1990>이라는 작품을 보면 이 같은 그의 생각이 아주 획기적인 방법으로 표현돼 있다. 구체적으로 작품을 묘사하면 다음과 같다.     


두 개로 분리된 유리 상자가 있다. 한쪽에는 잘린 소의 머리가 있고, 다른 쪽에는 파리 떼가 있다. 유리 상자를 둘로 구분한 벽에는 작은 구멍이 있다. 악취를 맡은 파리가 구멍을 통해 소의 머리에 달라붙어 알을 낳는다. 그런데 소의 머리에는 파리를 죽이는 전기 장치가 있다. 결국 파리도 죽는다. 시간이 지나면 소의 머리에 구더기가 생기고 그 구더기가 자라나 파리가 되어 전기장치에 죽는 것을 반복한다.     

계속되는 삶과 죽음을 이토록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작가가 몇이나 될까? 현재로선 아마 데미안 허스트가 유일할 것이다.     



셋째, 데미안 허스트는 타고난 비즈니스맨이다. 무명시절 전시할 곳도 마땅치 않았던 그는 공장 등을 빌려 전시를 열고 화랑, 비평가, 수집가들에게 직접 연락해서 자신의 전시를 알릴 만큼 적극적이었다. 이를 통해 찰스 사치라는 거목을 만났고 그로 인해 데미안 허스트는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된다.     


찰스 사치로 인해 큰 성공을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데미안 허스트는 찰스 사치와 결별하고 그에게 팔았던 작품들을 다시 사서 가격을 올려 되팔고 있다. 부정적으로 보일만큼 지나치게 상업적인 그의 행동은 예술을 비즈니스로 만든 앤디 워홀의 영향일 것이다. 사실 현대의 아티스트들은 상당히 노골적으로 이윤을 추구한다. 그들은 더 이상 고상한 예술가가 되길 원치 않는다. 게다가 예술가의 자존심을 지키면서도 당당히 탐욕적이다. 심지어 데미안 허스트는 이런 말들까지 했다.


“예술은 비평보다 구매자가 필요해”, “작품을 사는 것은 작가로부터 그것을 훔치는 행위야. 그리고 돈으로써 사과하는 거지. 사과를 받아들이노라!”, “예술을 산다는 것은 그것을 위해 돈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토록 오만한 판매자가 어디에 있을까? 왜 사람들은 이토록 오만한 그에게 열광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작품을 사는 것이 매우 가치 있는 일로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예술을 창조하는 일로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데미안 허스트는 탁월한 장사꾼이다. 그는 전 세계인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물건을 생산했다. 그 물건이라는 것이 앞에서 언급했듯이 죽음에 관한 그의 생각과 감정이다. 그 물건의 모양은 획기적이다 못해 충격적이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창성을 지녔지만 타당성이 있다. 겉치례가 아니다. 독보적인 콘텐츠를 독보적인 방식으로 판매한다. 구매자의 비유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월한 지위를 갖고 거만하게 판매해 주신다. 자신의 작품을 소유할 기회를 주신다. 이것이 그가 전 세계를 장악한 비결이다. 미술계의 살아있는 전설이 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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