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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nderlust May 14. 2016

마지막을 기다리며

사라져 갈 나의 동네, 그리고 꽃님이와의 산책길

호주에 머물러 있는 동안 재개발이 확정되었다. 호주에서 더 머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때에는 이 동네의 '마지막'을 맞이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몇 년 전부터 '내년에는 재개발 한대.' 그 소리를 들었던 터라 이번에는 진짜인가 싶었는데, 집으로 돌아오니 아파트 단지 곳곳에 이주 기간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우리 집도 6월 마지막 날에 이사하기로 정해졌다.


30년이 넘은 이 아파트에서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살았다. 중학교 때 같은 단지의 옆 옆 아파트에서 살았으니, 이 낡은 주공아파트 1단지에서 15년을 살았다. 누렇게 뜬 벽지, 조금씩 뜯기고 때가 묻은 노오란 장판, 페인트 칠이 벗겨진 낡은 창틀. 우리 집이 아닌 집을 꾸밀 만큼 여유 있는 형편이 아니라서 이 낡은 집에서 친구가 별로(거의) 없었던 사춘기 시절과 실패와 도전이 반복됐던 (암울했던) 이십 대를 보냈다. 우울했던 십 대와 이십 대, 나는 늘 생각했다. 깨끗하고 예쁜 집에서 자랐으면 내 자존감도 높아지지 않았을까. 좁은 방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며 끊임없이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고 현실을 비관했었다.


그렇지만, 이 낡은 공간이 엄마와 나, 꽃님이에게는 안식처였다. 외로웠던 엄마와 나에게 꽃님이는 반려견 이상의 의미였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을 하셨던 엄마의 갱년기는 친구가 없었던 고등학교 1학년 시절에 왔고, 엄마는 일에 지치고 마음의 병도 깊어져서 짜증이 한 가득 이었다. 너는 왜 이모양이니, 라는 소리를 들으면 주눅이 들었고, 자신감도 잃고, 뭔가를 잘해보고자 하는 의욕도 없었고, 자존감은 바닥이었다.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친구도 가족도 없었던 나는 힘 없이 집에 와서 꽃님이를 안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꽃님이는 엄마에게도 큰 위로였다. 대학교 졸업 후 내가 해외에 머무는 동안 꽃님이는 늘 엄마를 따라다니며 엄마 곁에서 잠들고 나처럼 어디론가 떠나지 않았다.


내 중고등학교 시절의 꽃님이를 생각해 보면 '청춘'이었다. 겨우 마음을 고쳐 먹고 책상에 앉으면 의자에 앞발을 딛고 일어서서 안아달라고 낑낑댔다. 안고 있다가 책상에 올려놓으면 내려가겠다고 낑낑댔다. 또, '어야 갈까?'라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뱅글뱅글 돌고 빨리 나가자고 '그르릉' 재촉했다. 귀찮아서 산책도 많이 시키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꽃님이의 17년 세월 동안, 그중 15년 세월을 이 동네에서 함께 보냈으니 곳곳에서 꽃님이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동물 병원으로 왔다 갔다 했던 길... 한두 달에 한 번씩 미용을 하러, 응급 상황에 꽃님이를 안고 엄마와 뛰어갔던 길이다. 이 길을 걸을 때마다 결혼하기 전의 언니랑 셋이서 산책했던 어릴 때의 꽃님이의 모습이 오버랩되고, 나이가 들어 느릿느릿 천천히 엄마와 함께 걷던 꽃님이의 모습도 생생하다. 꽃님이는 몇 년 전부터 기운이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것도 두려워했고, 우리도 혹시 다리가 부러질까 싶어 계단은 안고 오르락내리락했다. 꽃님이는 그렇게 늙어갔다.


이 동네에 오기 전에 나는 버스가 1시간에 1대씩 있는 시골에 살았었다. 그때의 유일한 낙은 학교 다녀온 후에 옆집에 가서 강아지들과 노는 거였다. 그리고 아침에는 옆 집 할머니가 강아지 두 마리와 산책할 때 따라가서 냇물에서 세수하고 학교에 갔다. 어느 날 꽃님이의 엄마 강아지가 새벽에 새끼를 낳았고, 나는 그날 아침부터 눈도 못 뜨고 젖을 먹던 꽃님이를 만났다. 꽃님이는 눈 뜨면서부터 나를 만났고, 눈 감을 때에도 나와 우리 엄마가 함께 했다. 아기 꽃님이는 정말 예뻤다. 너무 귀여워서 입에도 넣었다 빼고, 입술을 안으로 말아 발도 '앙'하고 깨물었다. 꽃님이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눈, 코, 입이 예쁘게 생겨서 미스독 대회에 나가면 분명 ''일 거라고 농담 삼아 말했다. 인형이 살아서 나에게 친구가 되어주는 동화 같은 일이었다. 강아지를 키운다는 건.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 꽃님이는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갑자기 할머니가 된 것이 아니라 바쁜 이십 대를 지나가면서 꽃님이는 나이가 들어있었다. 큰 병을 치료하면서 기운이 없었는데 회복되어도 늘 잠만 잤다. 불러도 잘 오지를 않았다. 꽃님이가 하늘나라로 가기 몇 달 전부터 나는 문득 두려워졌다. 엄마 옆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꽃님이를 보면서 마지막이 오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자고 있는 꽃님이 등에 살짝 얼굴을 대보기도 하고, 옆으로 누워있으면 심장 소리를 들어보기도 하고, 자고 있는 얼굴에 코를 대고 꽃님이 '숨냄새'를 맡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토요일 낮에 꽃님이는 숨소리가 거칠어졌고, 엄마와 나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다른 아파트 단지에 있었던 작은 동물병원에서 24시간 진료하는 2차 병원으로 가라고 했고, 규모가 있는 동물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꽃님이가 살 가능성이 1%라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갑작스럽고 기가 막혀서 눈물과 동시에 헛웃음이 났다.


예고가 없었다. 엄마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고, 나는 소파에 누워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그저 평범했던 토요일 오후였다. 아침까지 멀쩡했던 꽃님이가 두세시쯤 숨쉬는 걸 힘겨워했다. 그즈음에 자주 밤마다 잠든 꽃님이를 보며 심장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리고 곧 마지막이 올지도 모른다는 슬픈 예감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날이 이렇게 빨리 올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24시간 진료하는 2차 병원에 반려동물과 보호자가 같이 지낼 수 있는 입원실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은 이미 누가 이용 중이었다. 엄마와 나는 로비에 앉아있다가 밤 12시 즈음에 집에 돌아왔다. 엄마와 나는 꽃님이를 걱정하면서 울다가 새벽에 잠이 들었는데, 엄마가 5시부터 깨웠다. 꽃님이에게 빨리 가자고. 병원에 도착하니 새벽 6시가 조금 넘었다.


출입 금지였던 치료실의 문틈으로 꽃님이를 보고 있으니 의사 선생님이 들어가도 좋다고 허락해주셨다. 꽃님이는 산소호흡기에 의존하고 있었고 유리문으로 된 케이지의 벽을 보고 누워있었다. 우리가 부르니까 꽃님이는 힘들게 우리를 향해 돌아누웠다. 엄마랑 나는 유리문 너머의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호흡이 불안정한 꽃님이를 보며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엄마는 유리문을 쓸어 만졌다. 그러다가 꽃님이의 심박수가 떨어지기 시작해서 수술실로 꽃님이가 들어갔고, 우리는 유리창으로 지켜보면서 마음이 타들어갔다. 얼마 후 의사 선생님이 들어오라고 했고, 꽃님이는 의식이 없었다.


"외로웠던 나랑 엄마에게 가족이 되어줘서 정말 고마워."

이 말을 하고 나니 북받치는 울음이 터져나왔고, 엄마는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시고 꽃님이의 이름만 계속 부르면서 쓰다듬었다. 간신히 붙어있는 숨이 다하기 전 내가 "꽃님아" 부르면서 이마를 쓰다듬었다. 그때 꽃님이가 눈을 뜨더니 미끄러운 스테인리스 수술대에서 일어나려고 애썼다. 우리 모두 꽃님이가 엄마의 품을 찾고 있음을 알았다. 의사 선생님은 엄마가 꽃님이를 안을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옮겨주었고 꽃님이는 엄마의 품에 안기자마자 곧 눈을 감았다. 8시가 좀 넘은 시각이었다. 엄마랑 나는 울면서 얘기했다. 아마도 꽃님이는 밤새 우리를 기다린 것 같다고. 우리가 도착하고 두 시간 후에 꽃님이는 떠났다. 밤새 스테인리스 케이지 벽을 마주하고 눈을 감은 채 꽃님이는 우리를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꽃님이의 인생에는 우리 가족이 전부였을테니까. 꽃님이는 우리를 기다렸고, 정말 다행히도 함께 마지막을 맞이했다.


꽃님이가 하늘나라로 떠난 후에도 이 낡은 집에는 구석구석 꽃님이의 체취가 있었다. 신문지를 깔아놓았던 화장실 앞의 오줌 냄새, 꽃님이와 함께 깔고 덮었던 이불들, 꽃님이의 강아지용 방석, 소파 위의 방석.





"그래도 다행이야. 눈도 안 보이는데 다른 집으로 이사 갔으면 여기저기 부딪혀서 다쳤을 거야. 잘 갔어......"


꽃님이는 나이가 들면서 안구건조증으로 각막이 찢어져서 두 번의 봉합수술을 했고, 나중에는 눈 하나로 살았었는데 그 눈도 실명이 돼서 여기저기 부딪혔었다. 엄마는 꽃님이를 위해 가구의 모서리에 스펀지를 붙이셨다. 그런 꽃님이가 익숙한 이 아파트를 떠나 새집으로 갔으면 많이 고생했을지도 모른다고 엄마는 위안 아닌 위안을 삼으셨다.


가난하고 우울했던 시기에 나는 이 집의 낡은 기운이 나를 감싸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이 집의 낡은 정도만큼 내 모습도 빛이 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집에서의 마지막이 오는 것이 두렵다. 꽃님이의 흔적이 묻어나고 우리 세 식구가 15년을 산 이 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 30년이 넘은 5층짜리 아파트보다 키가 훨씬 큰 나무들이 어딘가에 버려지고 그 자리에 또 다른 아파트가 세워진다는 것, 꽃님이가 뛰어다녔던 닳고 닳은 보도 블록들도 꽃님이가 냄새를 맡던 길가의 풀들도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이 슬프다. 꽃님이와 함께 했던 많은 장소들을 지나가면 꽃님이가 떠올랐는데, 어쩌면 나중에는 사라진 이 길들이 희미해지고, 그 속에서의 꽃님이의 모습들도 점점 잊혀질까봐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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