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마음으로 회사를 버린 사람은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내 인생 첫 퇴사 면담은 성공적이었다. 여기서 '성공적'이라는 말은 나를 붙잡고자 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표현한 것이다. 그들은 나의 퇴사를 말리는 데에 성공했고, 나는 퇴사를 보류했다. 즉, 나는 퇴사에 실패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겠다. 나는 기뻤다. 내가 붙잡혔다는 사실이 기뻤다.
떠나겠다며 울고불고 난리를 칠 때는 언제고, 막상 붙잡히니 기뻐했다고? 나의 이 야비한 이중성이 의아할 것이다. 하지만 들어보시라,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내 친구의 친구 회사의 직원 A씨는 지옥의 사고뭉치였다. 그는 매일매일 모두를 화나게 했고, 모두의 미움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은, 타인을 늘상 열받게 만드는 사람은 대개 본인이 가장 불행하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A씨 역시 회사에서 항상 불행을 느꼈을 것이다.
불행한 A씨는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회사는 몹시 기쁘게 그 사직서를 즉시 받아들였다. "정말 잘 생각했어! 줄곧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네. 왜 좀 더 빨리 제출해 주지 않았나? 잘 가게! 부디 행복하고 다시는 보지 말게나!"
그들은 깔끔하게 아름다운 이별을 했다. 모든 직원이 A씨의 퇴사를 크게 반겼다고 전해진다.
자, 여기서 관점을 조금만 바꿔서 천덕꾸러기 A씨의 입장에 이입해 보자. 이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내가 떠난다는 사실을 만인이 반가워하다니! 단 한 사람도 나를 붙잡지 않다니!
나는 이곳에서 크나큰 불행과 쓰디쓴 시간을 꾹 참고 버텨왔다. 그런데 그 모든 인내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곳에 단 한 톨도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회사에 기여하는 유일한 방법이 퇴사뿐이라는 사실에, 진정으로 행복해할 직원이 과연 존재할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몸담은 곳에 공헌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집단 속에서 필요한 사람으로 인정받고자 싶은 마음은 모든 개인의 본능이다.
A씨에게서 떠나 다시 여러분의 친구 멋진고먐미에게로 돌아오자.
나, 멋진고먐미는 2023년 12월 12일, 굳센 결심 끝에 퇴사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이게 웬일? 회사는 나를 붙잡았다. 모두가 날더러 그만두지 말라며 어르고 달랜다.
오호라, 이 묘한 희열은 무엇일까? 그렇다, 나는 여기에 '필요한' 사람이다. 적어도 "그래, 당장 꺼져!" 하는 말을 들을 만큼 형편없는 직원은 아니었던 것이다.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조금만 더 다녀 보지요..."
나를 붙잡는 이들 앞에서 나는 최선을 다해 슬픈 체념의 눈을 하고 있었지만, 두 손으로 가린 입은 빅 스마일을 짓고 있었다.
'나는 인정받고 있다. 나는 여기서 쓸모있는 사람이야. 내 인생 성공했어!'
내가 이상한가? 그렇다. 나는 이상하고 음흉한 변태이다. 떠나겠다고 얘기해 놓고 못 떠나게 하면 이것 보라며 신이 나서 싱글벙글하는, 뒤틀린 인정욕구의 소유자이다.
하지만 다른 누구라고 안 그럴 것 같은가? 내가 장담하건대 인간은 모두 나 같을 것이다. 아니면 말고.
퇴사를 꿈꾸게 된 이후로 출근 시간은 명백한 고문이었다. 그러나 "회사는 계속 다니면서 사랑하는 일을 해 보라"라는 존경하는 처장님의 조언에 따라, 나는 퇴사를 보류하는 대신 출근하기 전에 글쓰기로 아침을 시작해 보기로 한다.
아침에 1시간 일찍 일어나, 회사 앞 예쁜 카페에서 즐겁게 글을 써제낀 후 출근하기.
꽤 괜찮은 계획이었다.
결심 이튿날 아침, 약속대로 카페에서 글을 써 봤다. 비록 뜻한 만큼 일찍 일어나지는 못한 탓에 30분밖에 쓰지 못했지만 무척 설레는 시간이었다.
어찌나 즐거웠던지, 나가야 할 시간이 닥쳐도 궁둥이가 카페 의자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한 자만 더, 한 자만..." 하고 버티다 지각이 코앞에 닥쳐서야 헐레벌떡 심장이 터지도록 뛰기 시작했고, 가까스로 9시 정각에 맞출 수 있었다.
어쨌거나 글쓰기 1일차, 처장님의 솔루션은 꽤 효과적이었다. 나는 세상 가장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팀장님께 아침 인사를 하러 갔다.
"안녕하십니까!"
항상 바람 빠진 풍선 꼴이었던 내가 힘찬 인사를 드리자, 팀장님은 깜짝 놀라고도 기쁜 기색으로 화답했다.
"그래, 왔어? 표정이 좋네?"
"네, 어제 처장님께서 해 주신 말씀이 도움이 많이 됐어요."
나는 처장님과의 면담을 주선해 주신 강지훈 팀장님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드렸다. 팀장님은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다행이네." 하셨다.
이때의 그는 순진하게도 '처장님이 최멋고를 사로잡는 데에 성공하신 모양이군. 퇴사 생각이 쏙 들어간 모양이야.'라고 철썩같이 믿었던 것 같다. 그날 이후 팀장님의 행보를 보면 꼭 그렇게 생각된다.
하지만 그럴 리가 있겠는가? 한번 퇴사를 진지하게 결심했던 직원은, 틈이 생기면 반드시 퇴사를 다시 떠올리게 되어 있다. 한 차례 헤어짐을 겪은 커플에게 다시 헤어지는 것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듯, 그 직원은 두 번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 당시의 나는 "당분간은 회사를 다녀 봐야지!"라고 진심으로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그 결심은 깨진 유리조각을 테이프로 이어 붙여놓은 꼴이나 다름없이 엉성하고 어설픈 것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팀장님에게 인사를 마친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일은 하는 둥 마는 둥 한 채, 카페에서 쓰던 글을 마저 쓰기 시작했다. 기분이 째졌다. 매일 이렇게 할 수 있다면 평생도 회사를 다닐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이고, 그럴 수 있을 리가. 그런 꿀 같은 회사가 있다면 내가 다니겠다.
처음 며칠은 그렇게 잘 흘러가는 듯했다. 문제는 내가 아침에 죽어도 못 일어나는 저주받은 체질의 소유자라는 것이었다.
내가 남편을 온 영혼을 다해 사랑한다는 사실은 나를 안다면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를 향한 나의 맹목적이고도 헌신적인 애정에는 뭇 인간뿐 아니라 무당집의 신령님조차도 혀를 내둘렀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그토록 사랑하는 남편과 데이트를 할 적에도 아침에 제때 일어나지 못해서 종종 그를 기다리게 하곤 했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나의 육체가 ADHD에 걸려 있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잠을 깨지 못하는 것은 ADHD의 대표적인 증상이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마태복음 26장 41절)
예수께서 꾸벅꾸벅 조는 제자를 보며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는데, 이것은 나를 두고 한 말이었다. 마음은 간절하지만 언제나 육신이 따라주지를 않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다만 모태신앙이었기에 많은 성경 구절을 알고 있고, 시도 때도 없이 성경을 인용하기를 즐긴다. 거룩한 말씀을 형편없는 곳에 인용하면 그 대비효과가 아주 재미있기 때문이다.)
귀염둥이 남편과 마찬가지로, 사랑스런 글쓰기 역시 나를 일찍 일어나게 만들지는 못했다. 딱 3일 정도는 겨우겨우 30~40분씩이나마 일찍 일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4일째부터는 기상 시간이 원 상태로 돌아갔다.
그렇게 나의 아침 글쓰기는 막을 내렸다.
얌전히 기상 시간이 원 상태로 돌아가는 데에만 그쳤다면 다행이었을 것을, 짤막한 아침 글쓰기의 경험은 치명적인 역효과를 남기며 사라졌다.
글쓰기를 통해 '살아 있는 느낌'으로 하루를 시작했더니, 회사 일을 할 때의 '죽어 있는 느낌'이 오히려 더 도드라지고 부각되었던 것이다. 처장님은 분명 사랑하는 일을 하면 싫은 일까지 해낼 힘이 생긴다고 하셨는데, 어쩐지 나에게는 정 반대였다. 나는 사랑의 달콤함을 맛봄으로써 미움의 쓴맛을 더더욱 견딜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첫날에야 농땡이를 부리며 회사에서 일은 안 하고 글을 썼으니 행복했지만, 이틀 이상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연하지만 회사에는 언제나 온당히 해야 할 업무가 있었다. 이것은 열심히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업무 시간에는 무덤 같은 일을 해내야 했다.
나는 점점 마음이 비뚤어졌다.
'회사만 아니면 글을 실컷 쓸 수 있을 텐데. 회사만 아니면, 내 소중한 에너지를 이딴 쓸데없는 <월간 업무 보고> 따위가 아니라 훨씬 생명력 있는 일에 쓸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거야? 정말 이렇게 버티면서 꾸역꾸역 살아야 되는 거야?'
당연한 수순으로, 내 안에서는 "역시 퇴사가 답이다."라는 생각이 스물스물 다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