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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진고먐미 Apr 09. 2024

죽음의 기운이 도사린 직장을 사랑한다니요

패배주의, 체념, 무기력, 불평불만으로 그득그득한 곳을 어떻게 사랑하나요

때는 2024년 1월 모일. 부서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그날의 회의도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X시스템을 어떻게 할 건지 생각 좀 해 보세요. 이젠 진짜 어떻게 해야 해."


허영미 부장이 푸념하는 투로 X시스템 이야기를 꺼내자, 나의 두 눈은 놀람과 분노로 삽시간에 이글이글거리기 시작한다. X시스템은 내 '발작 버튼'이었기 때문이다.


    '무어어? 지금 감히 X시스템 소리를 내었어? 미친 거 아니야?'




모두에게는 순진한 막내 시절이 있었다, 물론 나에게도...


X시스템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부서의 케케묵은 골칫덩이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4년 전, X시스템은 지금과 똑같은 문제점을 그때부터 이미 지니고 있었고, 당시 막내였던 나는 그것을 개선하는 프로젝트의 담당자가 되었다.


몇 가지 개선안이 제기되었다. 나는 순진하게도 그 중 하나를 곧 추진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지만, 어쩐지 돌아온 것은 끝없이 반복되기만 하는 회의, 회의 때마다 손바닥 뒤집듯 달라지는 방향성, 이 업무가 추진될 수 없는 이유에 대한 거듭된 논의, 그리고 마침내 그 끝에 이루어진 '현행 유지' 결정이었다.


'예산이 없어서, 인력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기반 시스템이 없어서, 이게 없어서, 저게 없어서...'


모든 아이디어에는 언제나 "도입될 수 없는 이유"있었고, 높으신 분들은 그것을 언제나 귀신같이 찾아내서 불평했다. 우리는 주기적으로 엄숙한 표정으로 둘러앉아 우리의 한계와 가엾은 처지를 서로 한탄하고 눈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프로젝트를 하나 맡는 줄만 알고 반짝반짝 빛나던 막내의 눈깔은, 끈적이는 패배주의로 뒤덮인 죽음의 회의를 거듭하며 점점 썩어가기 시작했다. 그 끝에 나는 깨달았다.


    "아, 내가 순진했군. X시스템을 개선할 의지는 처음부터 그 누구에게도 없는 거였어. 다들 그냥 '회의'라는 명목으로 모여서 '일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은 것뿐이었어."





무한 루프는 뭇 사람을 미치게 한다


X시스템의 문제는 그대로 방치된 채 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2023년 여름(글의 시점으로부터 반년 전)이 되었다. 허영미 부장님이 X시스템의 문제를 다시 지적했고, 개선 프로젝트가 순진무구한 신입 직원 성서윤 선생님에게 맡겨졌다.


서윤쌤은 꼭 이전의 나처럼 눈을 빛내며 각종 아이디어를 냈으나, 가엾게도 모두 쓸모없는 짓이었다. 여전히 모든 아이디어에는 각각의 단점과 적용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고, 우리의 부장님은 언제나 그것을 예리한 감각으로 기가 막히게 찾아내 지적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순진한 서윤쌤은 또다시 새로운 아이디어를 쥐어짜서 가져갔지만, 그 어떤 단점 하나라도 감수할 용기도, 그렇다고 한계를 보완할 추진력도 없는 우리 부장님의 눈에는 그 무엇도 흡족하지 않았다.


수없는 회의와 트집과 반려 끝에 내려진 결론은 역시나 '현행 유지'였다. 그 과정에서 신입 서윤쌤의 안광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일에 대한 진심과 기쁨이 짓밟히고 농락당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일련의 과정은 지켜보는 사람들마저도 기운이 쭉 빠지게 했다.


그리고 그 사건으로부터 반년이 흐른 이 시점에서, 허영미 부장의 입에서 또다시 "X시스템을 어떻게 좀 해 봐."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이제는 독자들도 왜 나의 눈알에 독기가 바짝 올라 길길이 날뛰었는지 이해했을 것이다.




성장도 발전도 없는, '죽음의 기운'만이 가득한 회사


소리 없는 한숨만이 가득한 회의실 속에서 나는 치를 떨면서 이 바보 같은 시간을 냉소했다. 심장이 싸늘하고 딱딱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모든 현실감이 사라졌고 모든 대화 소리가 의미없는 소음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시체가 널부러진 황량한 유령도시에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된다면 필시 이런 기분일 것이다. 이 도시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죽어 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이곳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 일어날 유일한 변화라고는 모든 것이 점점 더 썩어갈 것이라는 것뿐이리라.


어떠한 설렘도 성장도 일어날 수 없는 이곳에서, 나 역시 곧 죽어갈 것이라는 아득한 절망감과 무력감.


숨쉬기조차도 버거웠던 그 순간, 이 회사를 향한 나의 혐오감의 정체가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었다. 나의 이 회사에 대한 끔찍한 기분은 바로, 죽음을 회피하고자 하는 생물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우리 회사는 죽음의 기운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나는 이 회사를 죽음과 동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삶을 열망하는 '성장', 죽음에서 도피하는 '생존'


나는 모든 사람들의 인생을 사는 패러다임이 두 종류 중 하나라고 믿는다. 첫째는 '성장 패러다임'이고 둘째는 '생존 패러다임'이다.


1. 성장 패러다임


성장 패러다임은 성장과 발전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다. 이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들은 주어진 환경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먼저 생각한다. 주도적이고 창조적으로 자신의 비전을 삶 속에 구축해 나가는 것이다. 업무에서 성장 패러다임을 지닌 사람은 아래와 같은 질문을 할 것이다.


나는 고객들에게 어떤 가치를 어떤 방식으로 전달하고 싶은가?

업무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느 부분을 어떻게 개선하면 좋을까?

이런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추진하려면 어떤 방법을 쓸 수 있을까?


성장 패러다임은 생생한 변화를 가져다 준다. 변화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배움이 있고, 배움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성장은 곧 생명 그 자체이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자기 자신이 있다.




2. 생존 패러다임


반면에 생존 패러다임은 어떻게든 살아남기만 하면 장땡이라 여기는 삶의 방식이다. 이 패러다임을 따르는 사람들은 주어진 환경과 조건을 먼저 생각한 후 자신의 생존 방식을 결정하는데, 그것은 대개 순응이나 회피 중 하나이다.


잘릴 위험이 없는 안정적인 직장에서 '생존'이란 '욕을 먹지 않는 것'이 주안점이 된다. 인간은 비난이나 소외를 당할 때 죽음과 같은 공포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생존 패러다임을 지닌 직장인의 사고방식의 예시는 이런 것들이다.


싫은 소리 안 듣고 무사히 넘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지?

새 업무를 안 맡고 싶은데 그럴듯한 핑계가 뭐가 있을까?

무시 안 당하려면 나도 나름대로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어필해야겠어.


생존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은 생사를 오가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는 '삶'에 대한 열망에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죽음'을 회피하기 위해서만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루하루를 버티며 목숨줄을 끌고 가는 것 외에는 아무런 목표가 없다.


그러나 '생존'이라는 목표를 끝까지 이룬 사람이 결국 얻게 되는 것은, 애석하게도 필연적인 '죽음'뿐이리라. 그는 한번도 자신의 삶을 살아보지도 못한 채 안전하고 억울하게 죽게 될 것이다.


어쩌면 나는 이 조직의 거의 모든 의사결정이 '생존 패러다임'에 기반해서 내려진다는 걸 알아채면서부터 섬뜩함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 같았다업무 경험이 쌓이면서 성장의 기쁨을 알아갈수록, 기민하고 역동적인 일처리로 인한 희열을 알아갈수록, 이곳의 둔탁한 패배주의와 비효율적인 의사 결정 방식은 무거운 족쇄처럼 나를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 회사는 과거의 나 자신을 상징하기도 했다


이 죽음의 직장에서 당장 떠나야겠다는 충동으로 꽥꽥 소리를 지르는 심장을 잠시간 달래서 잠재워 두고, 나는 차분히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 회사는 내 인생에 왜 나타났나."


멍청한 질문에 나는 벙찔 수밖에 없었다. 왜 이 회사가 내 인생에 나타났냐니, 당연히 간절한 마음으로 원서를 넣고 최선을 다해서 면접에 임해서 합격했으니까 나타났지 않겠는가? 누가? 바로 내가.


그러니까 여기는 내가 원해서 들어온 곳이었다. 도대체 나는 왜 하필 이런 회사에 들어오기를 바랐던가?


나는 의식을 과거로 돌렸다. 2018년, 최종합격 전화를 받고 너무나 기뻤던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방방 뛰던 내가 보였다.


    '이제 평생 굶어죽을 일 없겠다!'


환호성을 지르는 20대의 나는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랬다. 당시의 나는 '생존 패러다임'의 화신이었다. 그때까지 나의 인생은 평생 동안 '무사한 생존'을 위한 선택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더 많은 배움의 기회가 주어질 서울 소재 대학 진학에 도전하기보다는 고향에 있는 그럭저럭 괜찮은 대학교로 안전하게 진학하기를 택하고,

▲가슴이 설레지만 먹고살 길이 막막한 학과보다는 그나마 취업길이 보이는 학과를 선택하고,

▲마음이 끌리는 과목보다 성적을 잘 받기에 유리한 과목을 수강하고,

▲어릴 때부터 동경했던 언어를 배우는 대신 높은 영어 점수를 만드는 데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그런 나의 생존 전략은 아주 적중했다. 우리 회사는 마침 ▲지역 대학 졸업자를 선호했고, ▲특정 학과 전공자를 구하고 있었으며, ▲높은 대학 평점과 ▲영어 점수를 몹시 중시했기 때문이다. 모두 내게 꼭 맞는 조건이었다. 마치 나를 위해 이 회사가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말하자면 이 회사에 취직한 것은 내가 학생 시절부터 쌓아 왔던 모든 노력과 선택이 이룬 결실이나 다름없었다. 성장과 배움이 아닌 생존과 안정을 택해 온 나의 삶의 궁극적 결정체가 바로 이 회사였다. 이 회사는 그때까지의 내 선택들이 그대로 내 삶에 반영돼서 나타난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헌신짝 버리듯 돌변해서, "왜 너는 생존과 안정밖에 주지 못하냐, 왜 나에게 성장과 배움의 기쁨을 주지 못하냐"며 마냥 이곳을 미워하고 저주하며 떠나 버린다면, 그것은 나의 과거의 모든 삶과 노력에 대해서도 같은 비난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과거의 자신을 놓아주었다. 바이바이!


내가 이 회사가 잘못되었다고 거세게 공격하는 동안, 과거의 나 자신도 함께 모욕당하고 상처 받고 있었음을 나는 알아차렸다. 이를 느끼자, 나는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다. 과거의 나의 선택들을 끌어안고 존중해 주고 싶었다. 과거의 나는 제딴에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 왔을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스스로가 느낄 현재의 기쁨과 행복에 헌신한 적이 별로 없었다. 오로지 '미래의 자신', 즉 '지금의 나'를 위해서 위험 요소를 삶에서 최대한 제거하려고 치열하게 노력했고, 그 결정체로서 이 회사를 지금의 나에게 마련해 준 것이었다.


그러나 입사 후 6년이 가까운 세월을 겪으며 나는 너무 많이 변해 버렸다. 나는 생존과 안정에서 더 이상 기쁨을 느끼지 않았고, 성장과 도전과 배움에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고리타분한 이곳을 견딜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과거의 자신이 최선을 다해 준비해 준 선물이 더 이상 기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면 변절하고 배신(?)을 한 것은 지금의 나였다. 과거의 내가 비난을 받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지금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패러다임을 가지고 열심히 사는, 나와 다른 사람일 뿐이었다.


과거의 나를 용서하고 놓아주기로 결심한 후, 나는 예를 갖추어 그에게 마음 속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만 26살 멋고야, 취직하느라 수고했어. 열심히 살아줘서 고마워. 네 덕분에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게 되었어. 그런데 어쩜 좋니? 너랑 나는 이제 아예 다른 사람이 돼 버렸어. 여기가 너에겐 최고의 회사였을지 몰라도, 지금의 나에게는 아닌 것 같아.

나는 이제 '생존'에는 관심이 없어. 아무리 열심히 살아남아 봤자, 결국 죽을 뿐이라는 걸 알았거든. 그래서 그냥 매 순간순간 '살아 있는 느낌'으로 살면 어떨지가 궁금해졌어.

이 회사에서는 안정적인 생존 말고는 더 이상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나는 이곳의 업무가 더 이상 설레지도 궁금하지도 않아. 상사들은 매번 트집만 잡고 불평불만만 해서 엮일 때마다 맥이 빠질 뿐이고. 여기 있으면 매일매일 숨이 막히는 것 같아.

그래서 아무래도, 조만간 네가 준 선물인 이 회사를 버리게 될 것 같아. 여기 들어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겁대가리를 상실한 인간이 되어 버려서 미안해."


과거의 나에게 진심 어린 감사와 지금의 솔직한 마음을 보내자, 나는 과거에서 풀려나는 기분을 느꼈다. 굶어죽는 것이 두려워 나를 지켜줄 회사를 필사적으로 찾아 헤매던 나는 이제 사라졌다.


근근이 살아가기보다는 차라리 멸망하는 게 나은, 순전한 망나니 영혼을 가진 지금의 나만이 남았다.




죽음도 나름대로 좋은 점이 있지, 내가 찾기로 마음 먹는다면


과거의 자신과 화해했다면 이제는 죽음을 재평가할 차례다. 나는 지금껏 이 회사를 죽음과 동일시했다. 그래서 회사를 생각할 때마다 온 머리털이 삐죽삐죽 설 정도로 싫고 무서워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생각해 보자. 죽음이 꼭 나쁜 것인가? 꼭 피해야만 할 두려운 것인가? 죽음의 '좋은 점'이란 아무것도 없는가?


내가 만 31년을 살면서 얻은 깨달음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세상만물 모두에는 아무런 내재된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 말인즉슨, '그 어떤 대상이든 내가 입맛대로 해석해서 의미를 갖다 붙일 자유가 있다'는 뜻이고, '죽음'이라는 무서운 개념에도 사랑스러운 존재 이유를 내가 자의적으로 만들어다 붙이면 손쉽게 이미지 세탁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여기까지 왔으면 다음은 식은 죽 먹기였다.


다음 중 '죽음'이 존재하는 이유로 알맞은 것을 고르시오.

① 아무리 발버둥쳐 봤자 어차피 죽을 거라는 사실을 비관하고 슬퍼하기 위해서
② 필사적으로 죽음에서 도망침으로써 생존을 일구기 위해서
③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봄으로써 삶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신나게 살기 위해서
④ 그딴 거 생각할 시간에 닭꼬치나 한 개 더 사 먹기 위해서


거듭 말하지만 이 문제에 정답은 없고, 개인마다 자유롭게 답하면 될 일이다. 그리고 대가리 꽃밭인 나는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③번,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봄으로써 삶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신나게 살기 위해서"라는 선택지를 고를 것이다. 죽음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때, 인간은 삶을 진정으로 만끽하며 살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회사가 죽음이라면, 나는 이곳을 통해서 나의 삶을 알아냈다.


이 회사가 나에게 지긋지긋하고 지리멸렬하며 변화라고는 없는 구질구질한 인생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매 순간 생생하게 살아 있기를 원한다는 것을, 매 순간 성장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다이내믹하고 예상되지 않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는 것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회사를 미워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 회사는 내가 누구인지 알려준 고마운 은인이 되었는데 말이다.


    "고마워, 회사야."


나는 회사에게도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마음에서 꽉 쥐고 있던 죽음에 대한 공포, 생존에 대한 불안도 함께 훌훌 떠나보냈다. 나는 점점 자유로워져 가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1


참고로 서두에 언급한 X시스템은 그 이후 개선안이 재차 몇 가지가 제기되었지만, 역시나 또다시 '여러 가지 이유'로 '현행 유지' 결정이 났다. 그러나 우습고 다행스럽게도, 그 결정 역시 순식간에 다시 번복되어서, 개선을 영구적으로 포기하고 그냥 시스템을 폐기해 버리자는 의견이 최종 채택되었다.


결국 X시스템과 그것과 관련된 서비스 역시 영원히 역사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나는 그것이 <X시스템 개선 프로젝트> 무한 윤회의 고리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의 불꽃이 일으킨 화형식이었다고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2


이번 글은 소재가 무거워서인지 유독 쓰기가 어려웠다. ㅠㅠ 아무렴, 인간사의 가장 끝판왕 보스인 '죽음'이니까 말이다. 몇 번을 고치다 엎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다 결국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고, 그러다 보니 어느덧 지난 편을 발행한 이후 한 달이나 되는 시간이 지나고 말았다... 나 역시 지긋지긋하고도 끝없는 글쓰기와 퇴고의 무한 윤회의 고리에 갇혀 버린 셈이었다.


결국 한 달의 고뇌 끝에 나의 역량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그냥 글을 발행해 버리기로 했다. 글이 정신 사납고 산만하더라도 널리 이해하고 어여삐 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부족한 글 구독해 주시는 분들께 너무너무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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