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발치"라는 단어의 느낌이 좋다. "먼 발치"의 뜻은 '조금 멀리 떨어진 곳'이다. 조금 떨어진 곳도 아니고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니다. "먼-"이 주는 느낌은 아슬하게 시야가 닿는 저 끝의 어딘가를 가리키는 것 같고, "발치"가 주는 느낌은 코 앞을 가리키는 것 같다. 두 단어가 나란히 모여 '조금 먼'이라는 애매한 뜻을 만들었다.
"개체거리(individual distance)"라는 것이 있다. 기존에 특별한 관계가 없는 다른 개체의 접근을 허용하는 최소한의 거리를 말한다. 인간의 경우엔 "개인거리(personal distance)"라 부르고 그 거리가 약 1m 정도라 한다. 모르는 사람이 팔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 안으로 불쑥 다가올 때의 당혹감을 생각하니 일리 있는 말 같다.
사람이 가득한 엘레베이터에 탈 수 있는 좁은 공간이 있다 하여도 엘레베이터를 보낸다. 시간을 들여서라도 다음 엘레베이터를 타거나 계단을 이용한다. 오랫동안 기다린 버스라 하여도 사람이 가득하다면 다음 버스를 기다린다. 촉박한 시간에 어쩔 수 없이 몸을 밀어 넣으며 가까스로 버스카드를 태그하는 날은 게을렀던 아침을 반성한다. 나의 부지런함(부산스러움)의 대부분은 개인거리를 지키기 위한 이유가 크다. 조금 빠른 출근 시간, 주말의 이른 기상시간 목표도 돌이켜 보면 개인거리를 지키기 위함이다.
그러나 한적한 거리를 걷고 싶다는 생각은 하여도 사람이 없는 거리를 걷고 싶다는 생각은 보통 하지 않는다. 적당한 수의 사람들이 거니는 한가한 거리를 떠올리면 마음이 포근해지나 사람 하나 없는 거리는 을씨년스럽게 느껴진다. 우리는 너무 가까이, 혹은 너무 멀리 서로 떨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고 다만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온 힘으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힘으로 마음 편한 거리까지 서로를 미는 것 같다.
문득 사람들이 모여 그리는 풍경이 은하의 행성 같다는 생각을 한다. 너무 가까우면 서로의 중력 때문에 부딪혀 깨어지고, 너무 멀면 팽창하는 우주의 어디론가로 멀어져 이윽고 검은 점이 되는 행성 같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에 성공하여 어떤 행성이 어떤 행성을 중심으로 돌고, 그 행성은 또 다른 행성의 중심으로 돌며 은하를 구성하는 것처럼 사람들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우리의 삶을 이뤄간다는 생각을 한다. 그 거리를 간단한 단어로 "먼 발치"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조금 멀리 떨어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