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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단녀' 이야기

우리의 단절은 똑같지가 않다. 우리의 삶이 그렇듯이

"오늘 결국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어. 앞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걸어가는 것 같아"


오랜 경력단절을 끝내고 겨우 2월말에 '그래도 계약만료 걱정은 안해도 되는' 자리를 얻어낸 친구는 3월 1일 첫 출근 이후 연차도 없이 지각과 조퇴와 결근을 반복하다가 결국 사직서를 냈다고 한다. 


아이는 이제 막 13개월을 넘겼고, 남편의 홀어머니는 본인 생계 때문에 일을 그만둘 수 없다. 아이는 아토피가 너무 심해서 먹는 것 입는 것을 잘 가려야 하는데, 가정어린이집에 특수한 돌봄을 요구하기는 벅차다(게다가 대기인원에서도 후순위다). 친정부모님은 너무 먼 지방소도시에 사신다. KTX나 오가는 교통편도 여의치가 않은 요즘에는, 봐주러 오신다는 나이든 부모님을 오히려 말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남편은 '아빠육아휴직'은 커녕 코로나 시국에 매출이 줄어가는 것을 신경쓰면서 자리를 보전할 수 있을까 마음 졸이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누구도 나쁘지 않고, 누구도 이기적이지 않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겨우 잡은 '내 자리 같은 내 자리'를 포기해야 한다.

아이를 엄마손으로 키울 수 있는 행운,을 선택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비용이라고 행복하게 여기라고 누군가가 위로 같은 막말을 했다고 한다. 남의 손에 애를 맡기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 취급하는 주변의 무례함도 마주해야 한다고 했다, A가 사는 지방소도시는 특히 그런 무례함이 입밖으로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코로나19 사태로 돌봄공백이 '발생'했다고 많이들 이야기한다. 그런데 코로나19 이전의 세상은 누군가의 경력단절, 공부와, 즐거움과, 욕망과, 삶의 단절이 그나마 떠받치고 있던 아슬아슬한 돌봄의 위주화/ 돌봄의 떠넘김이 아니었을까. 


아슬아슬한 젠가 더미처럼, 젠가 조각 하나를 조심스레 꺼내듯이 겨우 경력단절에서 '복귀'하려던 A라는 한명의 '경단녀'는 다시 돌봄의 자리로 돌아간다. 어쩌면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어도, A에게 돌봄공백이 메워지는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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