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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Feb 08. 2022

김성수는 보수의 “오래된 미래”가 될 수 있을까?

『근대 시민의 형성과 대한민국』

 이른바 “국부 논쟁”은 한국사회의 뜨거운 감자다. 공화국은 본래 고아여야 할 터이지만, 다들 상상의 아버지를 찾아 자신이 바람직하게 여기는 가치를 투사하려 든다. 인사청문회에서 대한민국의 국부는 이승만이 아닌 김구 주석이 되었어야 했다고 이야기한 이인영 통일부장관이 대표적이다. 비단 김구뿐 아니라 이승만, 여운형, 김규식, 조봉암 등 해방정국의 여러 지도자 중 누가 나라를 이끌었어야 했느냐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는 “프로듀스 국부”는 현재진행형이다.

     

“프로듀스 국부”는 현재진행형이다


 이승렬의 『근대 시민의 형성과 대한민국』(이하 『형성』)은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살짝 비켜서있다. 지은이는 한국 의회주의의 “오래된 미래”로 인촌 김성수를 내세우지만, 결코 그를 국부의 자리에 올려놓지 않는다. 명시적으로 언급하진 않아도 이승렬은 영웅의 결단과 지도력으로 나라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역사관에 부정적이다. 그런 만큼 김성수는 좌든 우든 비범한 개인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는 한국인의 심성을 거스르는 안티테제에 가깝다. 국부에 맞서는 국부, 국부 아닌 국부인 셈이다.

      

이승렬의 『근대 시민의 형성과 대한민국』


 『형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이승렬의 전작 『제국과 상인』(이하 『상인』)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상인』에서 이승렬은 조선왕조부터 시작해 대한제국을 거쳐 일제시대까지 이어지는 한국사회의 장기지속이 어떻게 한국 부르주아지만의 역사적 특수성을 형성했는가를 촘촘하게 재구성한다. 책에 따르면, 한국 부르주아지를 특징짓는 성격은 무엇보다 정치권력에 대한 강한 의존이다. 조선시대 주요 상업도시는 연안의 항구가 아니라 중국으로 가는 내륙의 사행로를 따라 형성되었다. 개성의 송상과 한성의 경강상인 등 유력한 상인집단은 서구와 달리 (물론 이런 ‘고전적인’ 설명도 문제가 있지만)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이지 않았다. 그들의 부는 조세운반이나 사행비 마련처럼 어디까지나 관의 업무를 대행하는 에이전트/거간꾼으로 불린 것이었다.

     

이승렬의 『제국과 상인』


 한국 부르주아지의 정치권력 의존성은 대한제국기에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1899년 설립한 대한천일은행이다. 한성과 개성, 인천 상인들의 자본금과 정부 국고금으로 설립한 일종의 반관반민 은행인 대한천일은행은 당시 경기도 인근에서만 쓰이던 백동화의 유통범위 확대에 노력하는 등, 철저히 대한제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주 고객이 황실이었던 만큼 대한천일은행의 흥망은 대한제국의 흥망과 직결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국권이 일본에 넘어가며 은행 역시 1년 간 휴업하게 된다. 이후 일본 자본의 지원으로 다시 문을 열고 1911년엔 조선상업은행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은행의 주도권은 일본인에게 넘어간 뒤였다. 조선인 경영진은 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 참의를 맡는 등 실권 없는 명예직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천일은행의 흥망은 대한제국의 흥망과 직결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920년대에 접어들며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타성에 젖은 1세대 부르주아지를 대체할 2세대 부르주아지가 등장한 것이다. 『형성』은 김성수로 대표되는 이들 2세대 부르주아지에 주목한다. 개항 이후 미곡무역을 통해 성장한 2세대 부르주아지는 개성 같은 “사행로 도시”가 아닌 서남해안의 항구도시를 거점으로 삼았고, 일본 유학을 통해 견문을 넓혔다는 점에서 1세대 부르주아지와 달랐다.

      

 무엇보다 이들은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였다. 이승렬은 미야지마 히로시의 “전북형(全北型) 지주”와 “경기형(京畿型) 지주”라는 틀을 빌려와 김성수를 이전 세대의 부르주아지와 차별화한다. 경기형 지주가 조선왕조 관료제의 일원으로 정치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지대추구에 만족했다면, 전북형 지주는 관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성장했을 뿐 아니라 근대적인 계약서를 작성하고 선진농법을 도입하는 등 진취적인 경영자의 성격이 강했다는 것이다. 물론 김성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관직을 사긴 했으나 이승렬은 착취를 위해 관직을 사는 것과 착취를 피하기 위해 관직을 사는 것은 다르고, 김성수 집안은 후자였다고 이야기한다.   


김성수는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부르주아지였다


 김성수는 비단 진취적 지주, 경영형 지주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경성방직을 대기업으로 키워냄으로써 농업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의 도약에 성공했고, 《동아일보》를 운영하는 등 경제계를 넘어 사회, 문화계로의 영역 확대를 시도했다. 드디어 한국에도 서구적 의미의 부르주아지, 제3신분이 탄생한 것이다. 김성수가 1915년 양반사족의 공간인 경성 계동(북촌)에 근대적 교육기관인 중앙학교를 신설하고, 1917년 기호지방의 관료적 지주인 윤치소로부터 경성직뉴를 인수한 것은 부르주아지의 세대교체를 웅변하는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김성수와 같은 2세대 부르주아지의 이주로 경성은 중세적인 관료의 도시에서 근대적인 시민의 도시로 탈바꿈하기 시작한다.

     

중앙학교 설립은 한국 부르주아지의 세대교체를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처럼 1910년대를 거치며 싹을 틔운 시민의 씨앗은 1919년의 3.1운동을 기점으로 쑥쑥 뻗어나가 꽃을 피우고, 전 조선에 홀씨를 흩뿌린다. 이승렬은 3.1운동을 계기로 김성수를 위시한 2세대 부르주아지와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천도교 세력이 뭉쳐 “시민적 네트워크”를 형성했다고 이야기한다. 관료에서 시민의 도시가 된 경성을 중심으로 뻗어나간 근대적인 철도망, 기독교와 천도교의 탄탄한 조직력이 이를 뒷받침했다. 민중 역시 고종의 장례식이라는 상징적 사건을 통해 온건하면서도 평화롭게 구체제와 이별했고, 비로소 백성에서 시민으로 거듭났다.

      

 이후 김성수는 《동아일보》를 창간하며 식민지 공론장의 형성에 이바지했고, 자치론을 주도하거나 합법적 민족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등 시종일관 온건개혁의 길을 걸었다. 해방이 이뤄진 뒤에도 김성수는 지주라는 출신계급을 배반하면서까지 농지개혁을 지지했고, 의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았으며, 이승만 독재에 맞서 저항세력의 통합을 촉구했다고 지은이는 이야기한다. 김성수로 대표되는 상층 지주, 부르주아지의 온건주의와 점진주의야말로 대한민국이 동아시아 4국(북조선까지 포함) 중 유일하게 의회민주주의를 꽃피울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는 게 이 책의 주장이다.


김성수는 시종일관 온건개혁의 길을 걸었다


 『형성』의 문제점을 찾아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편집이란 걸 아예 거치지 않은 듯 보이는 난삽한 구성은 가독성을 심각하게 떨어뜨린다. 포메란츠의 대분기처럼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는 내용을 뺀다면 분량을 절반 이상으로 확 줄여버릴 수 있을 것 같다. 전작 『상인』같은 쫀쫀한 역사서라기보다는 벙벙한 역사사회학서인 만큼, 김두얼이 송호근의 『탄생』 3부작에 했던 비판은 이 책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된다. 가령 이승렬이 3.1운동 이후 형성되었다 주장하는 “시민적 네트워크”는 송호근이 같은 사건으로부터 추출해낸 “환상형 공화 네트워크”만큼이나 공허해 보인다.

     

 무엇보다 아쉬운 건 비교의 문제다. 동아시아 4국을 아우른다곤 하지만 『형성』이 주된 비교대상으로 삼는 나라는 일본과 영국이다. 영국의 경우 의회주의의 성립에 상층 지주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이념형”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형성』은 사실상 한국과 일본 두 나라를 비교한 셈이다. 조슈번의 지원으로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를 자비로(=관에 의존하지 않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김성수, 송진우와 대조하는 등, 『형성』은 일본에 “관 주도”라는 이미지를 덧씌움으로써 한국에 “민간 주도”라는 이미지를 부여하는데 적잖은 공을 들인다.

     

김성수, 송진우와 조슈 파이브


 문제는 한국과 일본의 대조작업이 선택적으로, 그러니까 지은이의 틀에 부합하는 사례만을 추려내는 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앞서 지적한 『형성』의 방대하고 난삽한 구성 역시 두 나라의 차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일 수 있다. 이승렬은 전전 일본의 자유주의와 입헌주의의 흐름이 어떻게 농민의 지지를 받는 군부에 의해 압살되었는가를 다소 지루할 정도로 길게 서술하면서, 전후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 군국주의의 후예들이 일본 정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설명으로 갈음한다. 한국의 경우엔 상층 지주와 부르주아지가 주도한 1920~30년대 자치운동과 1950년대 반 이승만 운동만을 부각하고, 1940년대 일제에 협력한 역사는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넘어간다. 군사독재 시절의 정경유착은 아예 다루지 않는다.

      

 요컨대 이승렬은 자신의 가설을 지지하는 사례에 대해선 너무 많이 말하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례에 대해선 침묵한다. 비단 한국과 일본을 비교할 때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가령 다소 뜬금없이, 장황하게 서술된 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정세의 변화는 자치론을 내세운 상층 지주의 선구안을 부각한다. 반면 어쩌면 이들이 토지개혁에 ‘내몰렸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해방 이후의 혁명적인 사회 분위기에 대한 언급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독서를 주저하기엔 『형성』은 너무나 아까운 책이다. 지금껏 찾아보기 어려웠던, 아주 흥미롭고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형성』은 대한제국의 근대화 프로젝트가 좌절된 것이 길게 보면 축복일 수 있다는, 굉장히 ‘위험한’ 주장을 한다. 전작 『상인』에서 상세히 조명했듯 정치권력이 상업자본을 리드하는 방식의 근대화가 성공했더라면 부르주아지의 독립은 요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주도의 근대화 프로젝트인 메이지유신이 성공한 ‘탓에’ 오늘날까지 미쓰이 그룹을 비롯한 재벌이 정치권력에 종속된 일본의 현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반면 한국은 광무개혁이 실패한 ‘덕에’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김성수와 같은 부르주아지가 등장할 수 있었다는 게 이승렬의 설명이다. 이들의 존재가 한국 의회정치의 단단한 버팀목이 되었음은 앞서 설명한 대로다.

      

메이지 덴노와 고종 황제


 이승렬의 주장에 대한 반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해방 이후 한국의 부르주아지가 과연 얼마만큼 국가로부터 독립적이었는지, 오늘날 일본이 과연 정치권력 우위의 나라인지 등, 반박할 거리는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야기가 흥미로운 이유는, 20세기 한국의 “사회”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북돋아주기 때문이다.

      

 그간 사회에 대한 국가의 압도적 우위는 식민지 조선과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역사적 특질로 이해되어 왔다. 조선총독부와 그 뒤를 이은 한국의 군사정부는 전형적인 “강한 국가”로, 사회의 전 영역을 계획하고, 간섭하고, 동원하고, 단속해왔다는 설명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요새 나는 조선총독부와 군사정부가 과연 그렇게까지 전능한 존재였을지, 솔직히 조금 의심스럽다. 조선총독부와 군사정부 모두 정치적 정당성이 심각하게 결여된 상태였는데, 그런 상황에서 과연 사회를 강하게 통제할 수 있을까? 오히려 국가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라도 사회 역시 ‘강하게’ 거듭나지 않을까? 요컨대, “강한 국가”는 “강한 사회”를 요청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강한 국가"는 "강한 사회"를 요청한다


 ‘정상적인’ 근대사회는 늘 국가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식민지 사회”나 “식민지 공론장”이 일종의 ‘결여’로 여겨진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국가가 없거나, 존재하더라도 정당성이 의심받는 상황에서 사회는 통념과 달리 훨씬 많은 일을 자율적으로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제 시대의 천도교나 군사독재 시절의 기독교가 그랬듯이 말이다. 국가의 부재가 역설적으로 부르주아지의 성장에 도움이 되었다는 이승렬의 도발적인 주장은 20세기 한국의 사회가 무엇을 할 수 있었는가를 다시 질문하게 만든다.

      

 이런 식의 포스트모던한 해석까지 갈 것도 없이, 이승렬의 주장은 보수주의의 맥락에서도 충분히 전용할 수 있다. 근대 보수주의의 창시자인 에드먼드 버크는 이성을 내세워 모든 것을 개조해버리려는 계몽주의의 마수에 맞서 사회의 자율성을 옹호하지 않았던가. 박정희 이래 한국의 보수주의가 강한 국가를 내세워 무언가를 ‘하게 하는’ 힘이었다면, 이제는 무언가를 ‘내버려두는’ 힘으로 전환해도 좋을 듯하다. 특히 박원순 시정 10년을 거치며 지방정부와 너무 밀착한 나머지 활력을 잃어버린 서울시의 시민단체들을 생각한다면 (그렇다고 오세훈이 잘한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국가와 시민사회의 적절한 거리를 강조하고 그 상징으로 김성수를 내세우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근대 보수주의의 창시자 에드먼드 버크


 『형성』의 주목할 만한 특징 또 하나는 귀족정에 대한 옹호다. 왕/대통령과 사대부/귀족/의회, 백성/민중/농민이라는 세 세력의 협력과 길항으로 정치를 이해하는 건 한국사회의 오랜 습성이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개혁군주” 정조에, 보수 정당이 장악한 국회가 노론에 비유되곤 했다는 건 이를 잘 보여준다. 이와는 반대로 세조를 전두환에 빗대거나 조선의 붕당을 근대적 정당에 견주기도 하지만, 어느 쪽을 옹호하든 왕과 사대부의 대립이란 도식은 아직까지 꽤나 사랑받고 있는 셈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종종 "개혁군주" 정조와 비교되곤 한다


 난 예전엔 이런 비유가 비역사적이라고 여겼지만, 최근엔 생각이 바뀌었다. “조선시대 공론정치는 역시 훌륭해!”보다는 “근대 의회정치가 그렇게까지 대단해?” 정도의 마음이랄까? 버나드 마넹의 『선거는 민주적인가』에 따르면, 근대 이전까지 서구에서 선거를 통한 대표 선출은 민주정보다는 과두정이나 귀족정과 친화성이 있다고 받아들여졌다. 역사적으로만 그랬던 게 아니다. 선거제는 본질적으로 귀족주의적일 수밖에 없다. 공직을 맡을 가능성이 평등하게 분배되지 못하고, 후보의 구조적, 선천적 탁월성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마넹은 중국의 과거제는 똑같이 공직을 불평등하게 분배할지언정 최소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기준은 존재했다는 점에서 선거제와 다르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최근 능력주의와 공정담론에 가해지는 날카로운 비판이나 경화거족의 신분세습 수단으로 전락했던 조선후기 과거제의 변질에서 알 수 있듯, 과거제는 선거제만큼이나 귀족주의적이다. 즉 선거제와 과거제는 ‘기능적으로’ 그리 다르지 않으며, 사대부와 국회의원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귀족의 성격을 갖고 있다.

      

버나드 마넹의 『선거는 민주적인가』


 아시아의 몇 안 되는 공화국이자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요, 아직도 평등주의적 정서가 강한 한국인들 입장에선 이런 주장이 마뜩찮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때의 귀족이란 비교적 넓은 의미로, 사람들이 흔히 귀족하면 떠올리는 그런 이미지가 아니라 비공식적 경로를 통해 부와 명예를 대물림하는 엘리트에 가깝다. (써놓고 나니 조 모 전 법무장관이 떠오르지만 어쨌든...) 그리고 능력과 덕성, 품위를 갖춘 귀족의 존재는 ‘순수한(=대표라는 “불순한 매개”를 거치지 않는)’ 민주주의의 폐해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지금 꽤나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이승렬은 이를 정확히 알고 있다. 2세대 부르주아지, 상층 지주, 시민 등 때에 따라 표현이 달라지긴 하지만, 그는 일관되게 김성수를 (넓은 의미의) 귀족으로 정의한다. 다만 이승렬은 “조선왕조에서는 ‘독립적인 귀족’이 존재하기 어려웠다”(p.629.)고 이야기하며 김성수를 이전까지 찾아볼 수 없었던 특수한 존재로 자리매김하는데, 조선시대 양반이 귀족이냐 아니냐에 대한 논쟁이 노비가 노예냐 아니냐에 대한 논쟁만큼이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지은이가 조선말~대한제국기 정치세력을 “농업관료제”로 퉁치지 말고 좀 더 섬세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형성』은 굉장히 의도적으로, 그리고 명시적으로 귀족의 존재를 부각한다. 심지어 이승렬은 왕과 농민을 “거대한 보수적 반동적 흐름의 두 축”(p.627.)이라고까지 표현하며 귀족의 역사적 의의를 옹호한다. 이는 단순히 김성수와 의회정치에 대한 옹호뿐 아니라 민족주의 사학과 뉴라이트에 대한 비판과 극복의 의미 역시 담고 있다.

      

민족주의 사학의 거두 강만길과 뉴라이트의 거두 이영훈


 가령 이승렬은 한국 역사학계의 거인 강만길이 국민주권에 대해 이중 잣대를 취한다고 지적한다. 똑같이 왕권강화를 목표로 했음에도 대한제국기는 주권이 황제에게 있었다는 이유로 근대로 규정하지 않는 반면, 조선 정조 대는 왕권과 민중이 어느 때보다 가까이 있었다며 한국의 중세에서 가장 근대 지향적이었던 시기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강만길의 학문적 불철저함에 대한 비판을 넘어, 민족주의 사학 혹은 민중사학이 마주한 보다 근본적인 곤경을 겨냥한다.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내세우면서도 그들의 “일반의지”를 실현할 주체로서 왕이나 대통령 같은 최고지도자의 역할을 완전히 부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뉴라이트에 대한 이승렬의 비판은 상대적으로 소략하다. 다만 그가 뉴라이트 진영이 국부로 내세우는 이승만을 일관되게 독재자로 규정하고, 김성수를 그에 맞선 의회주의자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은 퍽 의미심장하다. 나는 사실 이영훈도 일종의 “우파 민중사학자”라 생각하고, 이승만에 대한 그의 숭배에 가까운 태도 역시 귀족을 배제한 왕과 백성의 연대를 강조하는 전통적인 입장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여긴다. 이승렬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귀족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강조가 민족주의 사학과 뉴라이트가 공유해온 “국부 숭배”의 대안으로 기획되었다는 점은 틀림없어 보인다. 사실상 『형성』의 핵심 주장인 만큼 배링턴 무어에만 의존하지 말고 좀 더 탄탄하게 이론적 근거를 갖췄다면 좋았으리라는 아쉬움이 든다.

     

김성수와 이승만


 머리말에서 이승렬은 이 책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뤄냈음에도 분열과 대립은 오히려 더욱 심해진 오늘날 한국사회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즉 『형성』은 명백히 정치적 의도를 가진 책이고, 이승렬은 우리에게 김성수라는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정치권력에 의존하지 않은 자율적 부르주아지이자 왕/대통령과 백성/민중 사이에서 인류 보편의 가치를 옹호한 귀족/의회주의자로 새롭게 그려진다. 김성수가 한국 보수의 “오래된 미래”가 될 수 있을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다만 진보성향의 《한겨레》가 『형성』에 주목한 둘 뿐인 신문사라는 사실은 퍽 고무적이다. 보수 진영의 말 걸기에 진보 진영이 응답한 것이다. 이 문제적인 책을 계기삼아 진보와 보수가 합리적 소통의 공간을 넓혀가기를 바라는 건,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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