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조선 연구』
모순(矛盾)이란 말이나 행동의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과 무엇이든 막을 수 있는 방패를 함께 팔 수 없듯이, 동시에 참이거나 거짓인 명제는 성립할 수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추상적인 논리학이 아닌 현실의 영역에선 창과 방패가 서로를 완전히 뚫거나 막지 못하고 어정쩡히 엉겨버린 경우도 왕왕 존재한다.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이 그런 관계였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가 아닌 내지의 연장이라 공언했으면서도, 제국이 패망할 때까지 조선을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동화되어야 하지만 영원히 자신과는 같아질 수 없는 타자, 일본에게 조선은 그런 존재였다. 그 점에서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관계는 모순이라기보다 아포리아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정준영의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조선 연구』는 제국 일본이 조선이라는 아포리아를 어떻게 돌파해내고자 했는지, 그리고 그 야심찬 도전이 어떻게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파고드는 역작이다. 역사사회학과 지식사회학을 연구하는 지은이의 관심사는 ‘경성제대의 니혼징’들이 착수한 ‘조선 연구’다. 조선의 혼과 얼을 짓밟은, 소위 ‘식민사학’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지은이는 일본인 연구자들이 꽤나 엄밀하고 실증적으로 조선을 연구했을 뿐 아니라, 나름의 선의 역시 갖고 있었다고 선뜻 인정한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이들의 조선 연구는 문제적일 수밖에 없다. ‘근대’와 ‘식민’의 복잡한 뒤엉킴, 그 속에서 ‘조선학’이 맞닥뜨린 난관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1915년,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의 통사를 쓰겠다는 목표아래 의욕적으로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에 착수한다. 이들이 보기에 조선의 문제는 역사의 결여가 아니라 과잉에 있었다. 기록이랄 게 거의 없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와 달리 조선은 독서와 문장이 문명인에 뒤지지 않으며 고래의 사서와 신서도 많지만 그 중 태반이 망설이요, 낭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 과잉의 민족’인 조선을 다스리기 위해선 진짜와 가짜를 엄밀히 따져가며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통사를 쓸 필요가 있다는 게 총독부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야심차게 출발한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으니, 무엇보다 통사라는 형식이 갖는 ‘불온함’ 때문이었다. 통사란 먼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도도하게 이어져온 주체(그것이 민족이든 국가든)를 상정한 내러티브다. 식민지의 역사를 잘게 조각냄으로써 언제까지고 타자의 자리에 묶어두려는 제국의 기획과는 근본적으로 상충한다. 지은이가 지적하듯 식민지 독자들이 억압받고 저항하는 민족의 이야기로 통사를 ‘오독’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통사 편찬을 포기하자니, 조선인에게 조선의 역사를 완전히 넘겨버리는 꼴이었다.
이처럼 오도가도 못하던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의 구원투수로 나선 게 오다 쇼고(小田省吾. 1871~1953)였다. 오다는 1908년 대한제국 학부 서기관을 시작으로 1924년 경성제대 교수에 임명되기 전까진 조선총독부에서 쭉 편집과장을 맡아왔던, 교과서 편찬에 잔뼈가 굵은 테크노크라트이자 학자와 관료의 경계에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오다가 1910년대 후반부터 겸직의 형태로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책을 담당하게 되며,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은 미묘하지만 분명하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통사라는 계륵을 포기하는 대신 사료 색인집 편찬이나 훈련받은 인재 양성, 학술지 창간 등 제도화를 위한 물적 기반을 마련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1922년 오다의 주도로 결성한 조선사학회와 학회가 발행한 『조선사강좌』는 그 결실이라 할 수 있다.
통사 편찬에서 제도화로의 ‘방향전환’은, 그러나 한계가 뚜렷한 것이었다. 일단 조선사학회에 실린 글들의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았던 데다, 그마저도 집필을 맡을 강사를 구하는데 애를 먹었다. 식민지 조선의 역사를 독점한다는 원대한 목표와는 달리, 학회가 발행한 글들은 보통문관시험을 준비하는 본토의 일본인들이 수험용으로 많이 찾았다. 애당초 본토 학계의 정비가 이미 완료되어 식민지 학계를 이끌어준 게 아니라, 본토 학계와 식민지 학계가 함께 제도화되는 과정에 있었던 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결국 식민지에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는 동시에, 통사 얘기가 쏙 들어갈 정도로 획기적인 조선사 연구의 새 패러다임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1926년, 저명한 동양학자인 핫토리 우노키치(服部宇之吉, 1867~1939)가 경성제국대학 초대 총장으로 취임한다. 실제로 재임한 기간보다도 내정자로 있었던 기간이 더 길었던 그가 조선총독부와의 갈등마저 불사하며 지켜내고자 했던 기치는 식민지 최초의 제국대학이 “동양 문화의 권위”로 거듭나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의 동양학계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1910년대 고등교육기관이 활발하게 설립되는 가운데서도 동양학 관련 학과는 설치되지 않아 졸업생들이 마땅히 생계를 이어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1920년대 초반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기점으로 일본 학계의 서구 쏠림이 가속화돼 동양학과의 인기는 그야말로 바닥을 치고 있었다. 관심을 불러일으킬 새로운 자료가 좀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도 동양학의 침체를 부채질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에 설립되는 새로운 제국대학은 일본 동양학계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갈 곳 없는 수많은 고학력 백수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영향을 동시에 받은 조선을 자료의 보고로 이용할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손가락만 빨고 있는 후배와 제자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생각해서라도 핫토리로서는 경성제대의 성공에 남은 인생을 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핫토리는 신생 제국대학을 철저히 식민통치의 싱크탱크로만 여기던 조선총독부, 그리고 재정 축소의 압박과 싸워가며 경성제대를 본토의 여느 제국대학 못지않게 만드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비록 1년 남짓한 기간이었지만, 핫토리는 총장으로 재임하며 강좌 수를 확보하고 똘똘한 후배와 제자들을 교수로 데려오는 등 자신의 의도를 거의 관철해냈다.
핫토리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그가 불러 모은 경성제대 교수진의 면면은 실로 화려했다. 일본 대외관계사 전공자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 1897~1945)나 수·당대 불교사 전공의 오타니 가쓰마(大谷勝眞, 1885~1941), 발해사와 금사 전공자인 도리야마 기이치(島山喜一, 1887~1959) 등 일국사가 아닌 전 동양을 아우르는 관계사나 분야사 연구자들이 각 강좌에 포진했다.
백미는 핫토리의 ‘본령’인 지나(중국)철학 강좌였다. 지나철학 강좌의 초대 교수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 1879~1948)는 『논어』 연구에서 시작해 청대 고증학의 일본 수용에 관심을 둔 인물로, 경성제대 교수로 부임한 이후 한중 지식인의 문예교류에 주목했다. 자신의 연구대상이자 ‘선배’이기도 한 청과 조선의 고증학자들을 연상케 하는 고된 작업을 거쳐, 그는 일본 본토 동양학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보적인 연구 분야를 개척했다. 홍대용에서 시작해 박제가를 거쳐 김정희에서 정점을 찍는 한중 문예교류의 계보는, 후지쓰카에게 자부심과 부러움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특히 김정희는 그가 발굴해낸 자랑스런 연구 성과이자 존경과 흠모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선배이기도 했다. 청조 고증학의 중심에 우뚝 선 조선인을 재조명한 일본인 연구자. 조선을 매개로 중국과 일본이 이어지는, 실로 모범적인 동양학 연구였다.
후지쓰카의 뒤를 이어 1941년 지나철학 강좌를 계승한 아베 요시오(阿部吉雄, 1905~1978)도 전임자와 같은 길을 걸었다. 그는 일본의 정주학자 야마자키 안사이의 뿌리로서 조선의 퇴계 이황에 주목했다. 퇴계로부터 시작된 도학의 흐름을 야마자키 안사이가 계승했고, 이는 막말기 요코이 쇼난과 모토다 나가자네를 거쳐 마침내 천황이 발포한 「교육칙어」로 완결되었다는 것이다. 주자-퇴계-안사이-황도철학으로 뻗어나가는 계보를 설정함으로써 아베는 중국과 일본을 연결했고, 그 가운데 조선을 위치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후지쓰카와 아베는 지극히 예외적인 사례였다. 조선이라는 매개는 자주 흔들렸고, ‘국사’와 ‘동양사’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한 채 붕 떠있을 때가 많았다. 실제로 1930년대에 이르면 조선사편수회-청구학회-경성제대사학회를 꼭짓점 삼는 ‘식민사학의 트라이앵글’이 안착하며 조선학 연구가 만개했지만, 제국 전체를 놓고 보면 조선학의 비중은 결코 높지 않았다. 조선사가 국사를 비집고 들어오는 것도, 동양사로 완전히 넘어가버리는 것도 원치 않았던 일본 본토 학계가 조선사를 방기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본토의 냉대에 경성제대의 조선사 연구자들이라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1930년대 중반 경성제대 제4대 총장 야마다 사부로(山田三郎, 1869~1965)는 조선총독부에 역사교과서 조사위원회를 설치해달라고 요구했다. 경성제대의 조선사 연구 성과를 조선, 나아가 일본 본토의 교과서에도 반영하고자 했던 야심만만한 시도였다. 일부 국사학자와 조선사학자들은 조선사를 제국 일본의 지방사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자기’이자 ‘타자’인 조선의 애매모호함을 최대한 살리는 쪽으로 가보려고도 했다. 물론 본토 학계는 식민지로부터의 목소리에 철저히 무시로 일관했다. 그 점에서 1930년대 이후 조선 연구에서 식민지가 본토를 압도하게 된 것은, 오히려 조선사가 철저히 ‘식민지용’으로 전락했음을 보여줄 따름이었다.
비록 실패했지만, 후지쓰카나 아베는 그래도 조선에 매개라는 역할을 부여했다는 점에선 나름의 의의가 있었다. 조선을 아예 지워버리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경성제대 조선사학 제1강좌의 초대 교수 이마니시 류(今西龍, 1875~1932)가 그랬다. 앞서 살펴본 조선사학 제2강좌의 오다 쇼고가 학자-관료의 길을 걸어온 테크노크라트였다면, 이마니시는 평생 아카데미즘 바깥으로 벗어나지 않았던 천생 학자였다. 또한 그는 경성제대에 부임한 이후에야 조선사로 눈을 돌린 다른 교수들과는 달리 일찍이 이를 자신의 전공으로 삼은, 일본 관학 아카데미즘 최초의 조선사가이기도 했다. 요컨대, 이마니시야말로 오다가 제도화한 조선사학의 구체적인 내용을 채워줄 적임자였던 것이다.
그런 이마니시가 평생에 걸쳐 천착한 주제가 바로 조선 고대사였다. 특히 1910년대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평양 일대의 고고학적 발굴에 참여하며 본래 신라사에 머물러있던 그의 관심사는 한사군과 고구려, 부여 등 고대사 전반으로 확장되었다. 당시 평양 일대에서 출토된 방대한 한대(漢代) 유물들은 양과 질에서 중국 본토보다 오히려 앞서 있었는데, 이는 일본 역사학계로 하여금 국사와 동양사, 조선사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길을 열어주었다. 중국보다도 중국 문화를 잘 보전한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일본은 낙랑군을 통해 조선이라는 매개자를 거치지 않고 선진문물을 직수입해올 수 있다. 나아가 현재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이므로 ‘조선 속 지나’인 낙랑군을 연결고리삼아 중국사를 넓은 의미의 국사로 간주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일본과 중국이 직통되며 동양사를 국사의 확장으로 간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서술에서 조선사는 자연히 조선인이라는 민족의 역사가 아닌, 조선반도라는 공간의 역사로 전락했다. 실제로 이마니시는 “조선인이 전체 반도에 걸쳐 홀로 존재한 것”은 “겨우 500년 남짓 되었을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역사적으로 “조선반도에는 오늘날 조선 민족의 본간을 이루는 한종족(韓種族)뿐 아니라 예맥족, 일본족, 그리고 중국 민족도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마니시는 예맥족을 한종족과 구분함으로써 부여와 고구려를 조선사로부터 ‘구출’해냈다. 시대를 앞서간(?) 조선사의 ‘트랜스내셔널’한 재구성이었다.
나아가 이마니시는 중국과 고구려라는 양대 제국의 패권주의에 신음하던 한반도 남부의 소국들이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건 일본의 도움 덕분이었다며 자신이 구축한 ‘트랜스내셔널 고대사’로부터 호혜와 연대의 가능성을 이끌어낸다. 특히 백제가 무너질 당시 일본이 명백한 군사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지원군을 파견했던 사건은 ‘패도(霸道)’가 만연한 20세기엔 찾아볼 수 없는 ‘왕도(王道)’의 실현이었다. 식민사학자라는 오명과 달리, 이마니시는 자신의 조국이 과거를 등불삼아 정의로운 제국으로 나아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물론 아무리 선의에서 우러나왔을지언정 왕도의 체현자는 일본이요, 조선은 이를 투사하는 무대에 불과했다. 일본이 바란 건 어디까지나 조선인들 없는 조선이었다는 윤치호의 이죽거림처럼, 이마니시도 조선사에서 조선을 지워버린 것이다.
이마니시가 염원했던, ‘왕도의 체현자로서 제국 일본’이 불가능한 기획이었음을 보여주는 인물이 식민정책학자 이즈미 아키라(泉哲, 1873~1943)다. 그는 이 책에서 소개한 조선학자들과 비교했을 때 여러모로 ‘튀는’ 인물이었다. 국제법이라는 독특한 전공도 그렇거니와, 도쿄제대 경성출장소나 다름없던 경성제대에서 삿포로농학교 출신에 미국 유학파인 비주류였기 때문이다. 미국의 메사추세츠 농과대학을 모델로 설립된 삿포로농학교는 리버럴한 학풍과 기독교적 분위기로 유명한, 관립이지만 반쯤은 사립 취급받던 학교였다. 그나마도 이즈미는 삿포로농학교에서 배움을 마치지 못한 채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이즈미가 유학하던 당시 미국에선 폴 라인쉬(Paul Reinsch, 1869~1923)가 주창한, ‘국민제국주의(national imperialism)’가 국제정치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영토 확장보다는 경제적 팽창을, 주권절대론과 무력충돌보다는 다자주의와 국제협조를 중시한 라인쉬의 주장은 일본에서도 거의 즉각적으로 소개되었으며, 큰 호응을 얻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얻게 된 전리품인 요동반도를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삼국간섭으로 빼앗긴 ‘아픈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제협조의 쓴맛을 본 일본으로선 자국의 ‘제국질서’와 세계적 추세인 ‘국제질서’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이 질문에 가장 적극적으로 응답한 이가 이즈미였다.
이즈미는 빈 땅에 사람을 ‘심어’ 국내의 일부로 편입하는, 문자 그대로의 식민(植民)만을 인정하던 삿포로농학교 1세대 선배들과 달리 주권을 보유한 외국을 식민지로 삼는 ‘주권식민지’에 주목했다. 식민정책학의 지평을 농정학에서 국제정치학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러한 지평 위에서 이즈미는 일본의 식민통치방침인 동화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식민통치란 통치의 대상으로서 이질적인 타자를 전제하는 만큼 언제나 비동화주의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비동화주의에 입각한 식민통치의 끝은 영연방처럼 의회를 통해 스스로 법률을 제정하는 자치식민지가 될 터였다. 동화주의와 비동화주의의 이항대립을 넘어 식민통치의 필연적 귀결을 전망했다는 점에서, 그는 비동화주의자라기보다는 포스트 동화주의자에 가까웠다.
영연방을 모델로 한 자치식민지야말로 문명화, 민주주의, 민족자결이라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한다고 여겼던 이즈미의 주장은 당시로선 매우 급진적이고 이상적인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3.1운동의 원인이 4000년 이상 특수한 문화를 일궈온 인구 1,500만의 민족을 단숨에 동화시키려던 일본의 무모함에 있다며 일본의 식민통치를 강하게 비판했다. 문제는 그의 주장이 매우 이상적이었던 만큼 일반론이나 당위론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던 반면, 정작 현실권력은 이를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일 여지가 컸다는 점이었다.
충돌은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경성제대 법문학부에 부임한지 1년이 지난 1928년, 이즈미는 조선인 본위의 자치식민지 건설이 필요하다는 글을 『외교시보』에 두 차례에 걸쳐 실었다. 알맹이 없는 원론적인 글이었지만, 조선총독부의 대응은 즉각적이고 단호했다. 이즈미의 글을 실은 『외교시보』의 발행 금지 처분을 내리고, 그의 사상이 불온하다며 경성제대 측에 교수 해임을 강하게 요구하기까지 했다. 다행히 당시 경성제대 총장 마쓰우라 시게지로(松浦鎮次郎, 1872~1945)의 비호로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지만, 이후 이즈미는 철저한 침묵의 길을 택했다. 이마니시가 조선을 지웠다면, 이즈미는 자신을 지워버린 것이다.
이즈미의 침묵은 식민지 아카데미즘의 앞날을 예고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1920년대 잠시나마 열렸던 자율의 공간은, 1930년대로 접어들며 급속히 닫혀갔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조선은 ‘지나’와 분리된 ‘대륙’, 곧 ‘만몽(滿蒙)’ 진출의 교두보로 새로이 각광받았고, 그런 만큼 중국과 일본을 이어 동양을 만드는 매개로서의 역할은 퇴색할 수밖에 없었다. 경성제대 역시 “동양 문화의 권위”보다는 만몽 개발을 위한 국책연구기관으로 역할이 바뀌었다. 만몽문화연구회와 대륙문화연구회 등 초학제적 산학협력단은 만몽 문화, 대륙 문화를 개발하는 도구로 조선 연구를 규정하고 동원했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식민지란 공간에서 국책과 학리(學理), 군기(軍旗)와 과학의 깃발은 구별되지 않았다.
식민지 아카데미즘의 비극적인 말로를 보노라면, 역시 식민사학은 나쁜 것이라는 ‘안전한’ 결론을 이끌어내고 싶어진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지은이가 근대와 식민을 무 자르듯 나눌 수 없다는 암시를 곳곳에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가령 정준영은 경성제대 법문학부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노장 학자들만 다뤘다는 점을 이 책의 한계라 자인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다분히 의도된 선택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식민사학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순수한’ 형태의 조선 연구를 통해 근대와 식민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1867년생인 핫토리 우노키치, 1871년생인 오다 쇼고, 1873년생인 이즈미 아키라, 1875년생인 이마니시 류와 1879년생인 후지쓰카 지카시에게 경성제대란 연구인생의 출발점이라기보다는 도달점이나 전환점에 가까웠다. 그런 만큼 오히려 아랫세대 연구자들보다 권력의 눈치를 덜 보고 원숙기에 접어든 자신의 학문세계를 자유로이 펼쳐 보일 수 있었다. 그랬던 이들조차 조선 연구라는 아포리아를 돌파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것이 식민사학의 문제라기보다는 근대 역사학, 구체적으로 조선/한국학이라는 범주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의문을 던진다.
아닌 게 아니라 한국사의 연구동향에 밝은 독자라면 이들의 연구에서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이마니시 류의 ‘트랜스내셔널’ 고대사는 민족주의로부터 한국 고대사를 구출하려는 최근의 여러 시도들을 떠올리게 한다. “한편으론 중국과의 관계,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과의 관계를 가지고 여러 방면에서 폭넓게 조선을 연구해서 동양 문화의 권위가 되는 것이 본학(本學)의 사명이라” 역설하던 핫토리 우노치키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 한국을 두고 보면, 중일 간의 비교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을 깨닫는 일이 종종 있”다고 이야기하는 미야지마 히로시와 어딘가 모르게 닮아 있다.(미야지마 히로시, 『한중일 비교 통사』, 너머북스, 2020, p.6.) 민족주의를 극복한다더니, 결국 ‘돌고 돌아 식민사학’인 것일까.
이런 섣부른 결론은 아마도 미야지마에 대한 모욕일 것이다. 박훈의 말마따나 그는 “사실과 논리를 넘는 어떤 정념(情念)이 선행하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자국에 비판적인 역사가이니 말이다. (박훈, 「‘진짜 동아시아사’가 나왔다」, 서울리뷰오브북스 편집부 『서울리뷰오북스 5호』, 서울리뷰오북스, 2022, p.124.) 그보다는 핫토리 역시 미야지마만큼이나 ‘선의’를 갖고, 조선을 매개로 동양이라는 보편을 창출하고자 노력했다고 보는 쪽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렇기에 핫토리의 실패는 단순히 식민사학의 실패가 아닌, 동양/동아시아를 통해 민족주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조선/한국을 새로이 긍정하려는 시도의 실패를 의미한다.
가령 한국 전통사회의 특질을 중국과 일본의 중간형으로 정의한 미야지마에 대해 “일본적 특질과 중국적 특질을 아무런 논리적 매개도 없이 편의적인 설명으로 절충하였을 뿐이”라고(이영훈, 「한국사회의 역사적 특질」, 이영훈 편, 『한국형 시장경제체제』,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4, p.375.) 일갈한 이영훈의 비판은 한국에게 부여된 매개라는 지위가 지극히 사후적임을 드러낸다. 한국이 있어 중국과 일본이 연결되는 게 아니라, 먼저 중국과 일본을 양 끝에 놓은 뒤에 한국을 그 가운데에 놓음으로써 매개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심지어 이렇게 사후적으로 부여된 매개라는 지위는 지극히 불안하기까지 한데, 18세기 고증학의 유행이나(후마 스스무, 『연행사와 통신사』, 신서원, 2008.) 16세기 은의 유통에서(조영헌, 「『동아시아사』 교과서의 ‘은 유통과 교역망’」, 『동북아역사논총』 39, 2013.) 조선만 동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은 ‘동아시아적’ 시각이 오히려 조선/한국의 낙후성을 부각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안타깝게도, 조선/한국과 동양/동아시아는 서로를 구원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조선/한국학은 결국 20세기의 민족주의 역사학으로 회귀하게 되는 것일까? 확실히 민족주의 역사학은 힘이 세다. 비단 고대와 근세뿐 아니라 고려시대를 몽골제국사로, 근대를 일본제국사로, 현대를 냉전사로 ‘트랜스내셔널’하게 바라보려는 게 최근 한국사학계의 최신 트렌드라 할 수 있지만, 이 중 어느 것도 아직까진 민족주의 역사학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민족주의 역사학으로 돌아가기엔 우리는 그것이 너무나도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 점에서 국사와 동양사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경성제대의 조선학 연구자들은 오늘날의 한국학 연구자들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국사만 일본사에서 한국사로 교체했을 뿐, 조선/한국학이라는 아포리아를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준영이 겨냥하는 지점이 정확히 이곳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경성제대의 조선학 연구자들과 오늘날의 한국학 연구자들 모두 학문적 사명감과 순수한 열정, 엄정한 실증적 태도로 작업에 임했음에도 어째서 조선/한국학이라는 아포리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그것은 근대 역사학 일반의 문제인가, 아니면 조선/한국학만의 문제인가? 만약 후자라면 우리는 조선/한국학을 어떻게 재구성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