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녜 Mar 29. 2022

내 인생 네 번째 직무, PM

우연히 다가온 Connecting the dots moment

좋은 데이터 분석가란 어떤 것인지를 한참을 고민하던 시기, 내가 원하는 답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공부를 더 해야 하나 하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나를 제외한 우리 회사의 모든 DA라는 직무를 달고 있는 사람들은 파이썬을 할 줄 알거나, 통계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건 사실 나만의 생각이고 한 번도 검증해본 바 없다)

미니멈 하드 스킬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 다른 어떤 소프트 스킬을 장착해도 예선에도 참여할 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정말 공부는 하고 싶지가 않았다. 일과 병행하기에는 퇴근 후의 나는 온갖 사적인 모임들로 바빴고 (핑계 맞다), 일을 그만두고 공부에 전념하기엔 다달이 나오는 월급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 모아둔 돈으로 하면 되지 않느냐고? 내 통장의 잔고가 줄어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 마음도 한몫했다.


그래서 궁리를 시작했다. 만약 시니어 데이터 애널리스트가 되기 위해 장착해야 할 하드 스킬을 쌓는데 시간을 쓰고 싶지 않다면, 지금의 내 스킬을 최대한 레버리지 해서 넥스트 스텝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스킬뿐만 아니라 나의 업무 만족도까지 채워주려면 무슨 일을 하면 좋을까.


내가 데이터 분석가로 업무 하면서 즐거움을 느꼈던 건 아는 척을 할 수 있었던 포인트가 컸다. 숫자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 내 말에 좀 더 힘이 실리는 기분이었다. 뭔가를 주장하더라도 자신감이 생겼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데이터로 업무 하면서 즐거움을 느꼈던 건 분석 그 자체나 인사이트를 발견해낸 순간보다도 그 발굴해낸 결과를 기반으로 누군가를 설득하는 순간들이었다. 우리 회사에서 ‘설득’ 이 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PM이었다. 이 피처를 왜 만들어야 하고 왜 하지 않아야 하는지. 왜 이런 식으로 디테일이 구현되어야 하는지. 이 메트릭을 살펴보는 게 왜 중요하고 데이터 적재할 때 빠지지 않아야 하는 값은 무엇이 있는지 등. PM 마다 프런트 UI에 집중하기도, 혹은 백엔드 구조에 집중하기도 하는 등 각자만의 스타일은 있었지만 결국 골자는 설득이었다. 단순히 설득하는 것뿐만 아니라, 논의를 통해 설득당하기도 하면서 더 좋은 프로덕트를 만들어나가는 일.


뭔가에 홀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PM 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PM 경험이 없는 내게 “PM이 되는 법” 같은걸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데이터 분석가로 해야 하는 일이 뻔히 있는데 갑자기 누가 나에게 PM 일을 해보라고 맡길 리도 만무했다. 회사에서도 반기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일단은 친한 동료들에게 소문을 내고 다니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냥 해보라고 했다. 사람들에게 소문을 내고 나니 창피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뭐라도 해봐야겠다 싶었다.

일단 팀장님께 얘기를 해봤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혹은 항상 그래 왔는데 내가 몰랐던 건지, PM 손이 모자란 상황이었다. 팀장님은 그럼 저 피처를 한번 맡아서 해보라고 했다. 이전에도 비슷한 피처가 들어간 적 있고, 관련된 분석도 내가 했었고, 데이터 구조가 중요할 수 있는 프로젝트이니 데이터를 아는 사람이 하는 게 좋을 수도 있겠다고 했다.


그렇게 내 첫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어떤 것이 제대로 동작하지 않으면 이걸 서버팀에 물어봐야 하는지 클라이언트팀에 물어봐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대뜸 하겠다고 해놓고 벌벌 떨고 있는 내가 부끄러웠다. 그래도 일은 되게 해야 했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사람들을 한 명씩 찾아다니며 사소한 질문들을 해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친절했다. 작은 것을 알고 나니 중간 사이즈의 질문도 할 수 있게 됐다. 큰 질문도 몇 개 늘어났다.

그 질문들 덕분에 테크 스펙을 작성하고 QA 때 확인해야 하는 항목들을 리스트업 했다. 미리 데이터 실과 적재해야 하는 데이터를 구체화했고, 배포 이후에도 디테일을 점검하며 빠진 부분과 잘 못 구현된 부분을 발견해냈다.


그래, 사실 과정은 이것보다 훨씬 지저분했다. 나는 질문 폭격기를 자처하며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제1 목적은 달성했으나 부수적으로 따라온 데이터 누락 이슈들은 끝끝내 왜 발생하는지 알아내지 못한 것도 있다.


하지만 나의 첫 프로젝트를 통해 질문과 논의, 그리고 설득을 통해 일을 되게 하는 것이 즐겁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과정에서 데이터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것이 어떻게 도움을 주는지도 체감했다. 의도하고 골라온 직무는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이전의 점들이 선으로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나는, PM 으로 일하고 있다. 여전히 서툴고 모자랄지라도.

매거진의 이전글 좋은 데이터 분석가란 어떤 걸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