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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녜 Nov 19. 2022

도착도 전에 이럴 순 없어

2015년 6월 23일

적어도 첫날만큼은 무사히 시작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다 알아서 할 것이며 무사할 것이며 별일 없이 돌아올 것을, 그리고 자주 연락할 것을 다짐하고 약속하고 떠나왔던 길이었는데 말이다. 


나의 첫 도착지는 멕시코시티, 쌈짓돈을 아껴가며 떠나오는 여행이니만큼 직행은 무슨 몇 시간이 더 들더라도 저렴한 비행기표가 우선이었다. 

그리하여 올라타게 된 나의 항공편은 유나이티드, 인천에서 도쿄, 도쿄에서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멕시코시티로 들어가는 일정이었다. 

내게 가진 전자기기라곤 고작 갤럭시 하나뿐. 이걸로 온갖 연락과, 길 찾기와, 사진을 담당해야 했다. 그러던 중 사달이 나버린 것이었다. 남반구 공기를 마셔보기도 전에, 액정을 깨뜨려버렸다. 


일이 난 건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였다. 벌써 한번 환승을 하고, 총 열 시간인가 열두 시간인가를 날아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 대기실 안으로 들어가는 데에도 짐 검사를 했다. 바로 다음 환승 편이 있어서였을까. 가방과 주머니에서 짐을 꺼내고, 핸드폰을 꺼내 선반에 올려놓다 툭 하고 떨어졌다. 바닥엔 카펫이 깔려있었지만 그 충격에 배터리가 분리되어 핸드폰이 꺼졌다. 그렇구나, 하고 핸드폰을 주워 얼른 짐 검사를 마쳤다. 이제 마지막 비행만 하면, 몇 시간만 더 가면 남미에 정말 도착하는 거였다. 


배터리를 다시 끼웠다. 하지만 전원 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화면에 아무것도 표시되지 않았다. 그새 전원이 나간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핸드폰이 켜지지 않는 건지, 혹은 핸드폰은 켜졌지만 액정이 나간 건지도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척추를 따라 한기가 흘렀다. 어깨가 묵직해졌다. 이어폰을 꽂고 음량 버튼을 마구 눌러봤다. 어렴풋하게 소리가 들렸다. 핸드폰이 켜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액정이 나간 거였다. 


어쩌지. 어쩌지. 엄마한테 샌프란시스코 도착한 걸 알리고 멕시코 시티에서도 이어서 연락을 해야 하는데. 멕시코시티로 떠나는 비행기는 한 시간인가 두 시간 정도 여유가 남아있었다. 하지만 도착해서는 저녁시간이었고, 예약해둔 호스텔에 찾아가려면 어느 버스를 타야 하는지,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 그리고 그다음엔 어떤 골목으로 들어가야 하는지가 모두 핸드폰 안에 캡처 화면으로 저장되어있었다.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멕시코시티 공항에서 정말 미아가 될 수는 없으니까. 일단은 엄마에게 상황을 알려야 했다. 국제전화카드와 폰부스가 눈에 띄었다. 한국이 몇 시인지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엄마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연결되는 동안 안 받으면 어떻게 할지 시나리오를 짜려고 노력했지만 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시간을 벌지 못해 불행인지, 다른 시나리오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인지,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핸드폰 액정이 나갔다고 설명했다. 엄마는 지금 한국이 몇 신지 아냐고 지금 네시라며 어떻게 할 거냐며 숨이 가쁘게 말했다. 일단 도착하자마자 거기 있는 컴퓨터로 연락을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핸드폰 고칠 방도를 찾아보겠다고 했다. 멕시코시티에도 삼성 서비스센터는 있을 테니까, 최대한 빨리 알아보겠다고. 그리고 호스텔에 도착하면 컴퓨터든 거기에 있는 전화기로든 연락을 하겠다고 했다. 


엄마에게도 하는 수가 없었다. 한숨만 푹푹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전화를 길게 해 봤자 상황은 해결되지 않았고 내게는 곧 타야 할 항공편이 남아있었다. 전화를 끊었다. 


일단 예약해둔 게스트하우스까지 잘 도착하는 것이 나의 첫 번째 목표였다. 가는 길을 알아둬야 했다. 

공항을 바지런히 걷다 보니 지금의 프리즈비 같은 전자기기 파는 곳이 나왔다. 핸드폰이 고장 나서 그러는데 잠깐 패드를 써도 되겠냐는 구구절절한 TMI와 함께 허락을 구하고, 가지고 있던 수첩에 주소와 어디서 몇 번 버스를 타야 하는지와 어느 골목에서 어떤 간판을 보고 좌회전을 해야 하는지 우회전을 해야 하는지를 적었다. 

혹시 내가 나의 글씨를 못 알아보는 수가 생길까 봐, 평소보다 꾹꾹, 천천히, 최대한 바른 글자로 적었다. 


노트라도 있어 망정이지, 펜이라도 있어 망정이지.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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