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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tacura Jan 28. 2023

(3) 대학원에 합격했다

휴학 - 복학 - 휴학

1년 재수 끝에 대학원에 들어갔지만 졸업까진 순탄치 않았다.

휴학에 휴학을 거듭하며 졸업이 불투명해졌을 땐 남편도 원망스럽고, 많이 서러웠다.




직장을 그만둔 지 10년 째다. 그럼에도 난 스스로를 한 번도 전업주부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임시의 상태일 뿐, 스스로에게 난 '곧 사회로 다시 나갈 경단녀'였다. 10년 전 직장을 그만둘 때 평소 말수도 적고, 무심해 보이기까지 했던 팀장님이 안타까운 듯 물으셨다.   


"지금 그만두면 현실적으로 이 정도 직장 다시 구하기 힘들 텐데 정말 괜찮겠어?"


결혼한 여자에게, 정확히는 곧 아이 엄마가 될 여자에게 사회가 얼마나 냉정하고 각박한지 모르는 바도 아니니, 걱정해 주시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땐 젊었는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자신감이 있었다. 난 사회로 꼭 돌아가겠다고, 또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직장을 그만둔 건 남편의 해외주재 발령 때문이었다. 4년을 떨어져 사는 것 말고는 직장을 유지할 방법이 없는 가혹한 이유였다. 나에겐 치명적인 휴식이 되겠지만, 남편에게 너무 좋은 기회였기 때문에 다른 선택은 생각할 수 없었다.

다만, 과장 진급을 서너 달 앞두고 있던 터라 귀국 후 재취업을 위해 진급은 해두고 싶었다. 재취업을 생각하면 대리보다는 과장이 나을 것 같아 남편을 먼저 보낸 후 혼자 남아 1년쯤 회사를 더 다녔다.  

 

3년간의 해외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한국에서 뭘 할 수 있을지 몰라, 쉬면서 독학으로 통역대학원 입시준비를 했고, 귀국 직후 목표했던 대학원 필기시험을 치르고 1차에 합격했다. 재취업이 1차 목표였으므로 토익시험도 봤다. 회사든 대학원이든 어디든 골라서 갈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결과는 달랐다. 대학원은 최종불합격했고, 재취업은 성공했으나, 임신이 되어서 출근도 하기 전에 포기해야 했다. 결혼 후 만 4년 만에 생긴 아이였으므로 아쉽지만 당연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생긴 후에도 사회로 돌아가려는 노력은 그만두지 않았다. 그 당시 내겐 요즘 같은 시대에 아이가 있다고 사회생활을 포기하는 건 의지가 약하거나, 능력이 없는 사람이나 하는 선택이었다.

 

1년 뒤 나는 대학원에 입학했다. 아이는 임신 초기 유산되었다. 의사는 아이가 약해서 그런 것이니 내 탓이 아니라고 했지만, 대체 언제 유산이 된 것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넘어진 적도 없었는데, 뭘 잘못 먹은 것도 없었는데, 피곤한 일도 없었는데…

 

대학원 생활은 순조로웠다. 나이가 너무 많아 걱정했는데, 다행히 나보다 언니도 있었고, 몇 살 차이 안나는 직딩 출신 동기도 있어서 십여 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공부도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쉬운 과정은 아니지만, 졸업시험도 자신 있었다. 그렇게 부푼 마음으로 두 어 달쯤 다니던 중 남편이 다시 해외 파견을 발령받았다. 말로는 꼭 나가고 싶은 건 아니라고 했지만, 더 큰 나라로의 파견에 내심 기대도 되고, 흥분도 되는 모양이었다. 일을 그만둔 지 5년이 넘은 나로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젠 또 다른 기회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나보다는 확실한 기회를 잡은 남편이 우선인 게 이성적인 선택이 되어 버렸다.


마지못해 대학원 휴학을 하고 해외로 떠나면서도

졸업을 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해두고 싶은 생각에 이번에도 남편을 먼저 보내고 6개월쯤 혼자 남아 대학원 1학년 과정을 마치고 해외로 떠났다.


다시 4년 간의 해외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결혼 후 7년 만에 얻은 쌍둥이 아이들과 함께였다. 복학할 생각에 대학원 근처에 전셋집을 얻고 아이들 어린이집도 부지런히 알아봤다. 아이들이 아직 어려 쉽진 않겠지만, 아이들 어린이집에 맡기고 나만 좀 부지런을 떨면 1년 정도 더 공부하고 졸업하는 건 충분히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공부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더 크게 보면 아이들에게 좋을 거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기도 했다.


귀국했을 때부터 슬슬 뉴스에 등장하기 시작한 코로나로 결국 3월 어린이집 등원도 미뤄졌다. 메르스처럼 길어야 한 두 달만 참으면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고 대학원 복학을 강행했다. 다행히 당분간 온라인 수업으로 진행되어 어린이집에 등원하지 않아도 수업에 참석할 수는 있었다.   


다소 무리가 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아이들과 함께하는 대학원 수업은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수업 특성상 하루 6시간 수업도 있고, 많은 날은 9시간 수업도 있는데, 그 시간 동안 아이들이 그대로 방치되어야 하는 점이었다. 2~3시간까진 동영상으로 자리에 잡아둘 수 있었는데, 6시간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잠깐 쉬는 시간에 가서 챙기고, 밥을 차려 가져다주면서 꼭꼭 씹어 먹고 있어야 한다고 당부를 해도 그때뿐이었다. 말도 제대로 못 하는 30개월짜리 아이들이었다. 밥도 안 먹고 장난만 치던 아이들은 이내 지루해져서 칭얼대거나, 싸워서 울거나, 지쳐 잠이 들었다.  


그렇게 한 달을 종일 아이들을 보면서 꾸역꾸역 온라인 수업을 듣던 어느 날, 차려준 밥도 채 먹지 못하고, 거실 바닥에 엎드려 잠이 든 아이들을 보고 눈물이 났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러고 있는 것일까. 이 나이에 통번역대학원을 나와서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어렵게 얻은 아이들을 저렇게 방치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엄마로서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일까. 괴로운 마음으로 며칠을 고민한 끝에 다시 휴학계를 냈다. 이젠 정말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 슬펐다.  대학원도, 사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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