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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tacura Feb 02. 2023

(5) 에이전시와 계약하다

번역 개척기 1

그간 미루어왔던 번역 에이전시를 몇 군데 늘려 볼 요량으로 졸업을 앞둔 12월부터 부지런히 이력서를 넣었다. 학기도 끝났고, 아이들도 유치원에 완전히 적응했으므로 학업이나 육아를 핑계로 전업 번역을 미룰 수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번역을 전업으로 삼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실력이겠지만, 일단은 통번역 대학원을 무사히 졸업한 것으로 기본적인 실력은 갖추었다고 위안을 삼는다면, 그다음 문제, 사실은 가장 두렵고 답답한 문제가 수입이다. 

그동안 에이전시를 한 두 군데 정도 더 늘리는 건 마음만 먹으면 할 수도 있었는데, 선뜻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에이전시를 몇 군 데씩 두고 작업을 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슬프고도 서러운 수입을 기록한다면 이 공부를 계속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2015년에 휴학을 하면서 대단히 의욕적으로 번역 에이전시 세 군데(운이 좋게도 모두 규모가 꽤 큰 회사였다)와 계약을 맺고, 본격적으로 번역을 시작했었는데, 번역을 하면 할수록 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자괴감에 시달리면서 두 군데는 스스로 정리해 버렸다. 

대학원이라는 게 들어간 사람에게나 대단한 것이지, 의사 자격증이나 사법 고시 패스 같은 직업을 보장하는 자격증도 아니고, 전문 번역에 있어선 관련 분야 재직 경험만도 못한 그냥 학위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휴학생 신분으로 제시받은 번역료가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요율은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실망스러웠던 이유는, 분야별로 샘플테스트를 했음에도 분야나 난이도에 상관없이 모두 같은 기본 요율을 적용하는 것이 악의적으로 느껴졌고, 그 기본 요율이라는 게 내가 한 시간에 1,000자를 번역을 해도 시급이 15,000원이 안되니 고약한 노동착취라고 생각되었다. 게다가 한 시간에 1,000자 번역은 대학원을 졸업한 지금도 어려운 일이다. 한 업체는 슬금슬금 번역료를 미루기 시작하더니 전화를 해서 독촉을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두 군데를 정리하고 한 업체와만 취미 삼아, '나는 노는 사람은 아니다'라고 생각할 정도만, '중국어를 잊어먹지는 않겠다' 할 정도만 작업을 해왔고, 월수입 같은 건 아예 계산도 하지 않았다. 우리 집의 주 수입원이 따로 있으므로 경제적 여유를 부리느라 수입을 신경 쓰지 않았다기보다는, 무서운 현실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찌 됐든 (공부엔 끝이 없으나) 졸업은 했고, 이제 그 무서운 현실을 더는 피할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그래서 눈 질끈 감고 (나 혼자) 번역 전업을 선언했다. 12월부터 약 두 달간 진행한 구직활동의 결과는 계약이 완료되어 작업까지 시작한 업체가 국내 에이전시 한 군데이고, 계약 완료/대기이나 작업을 개시하지 못한 곳이 국내와 해외 각각 한 군데씩이다. 콘텐츠 번역 업체와도 계약서를 쓰긴 했지만, 계약서를 먼저 작성하는 곳이 있고, 샘플 테스트를 먼저 하고 작품 들어갈 때 계약서를 작성하는 곳이 있는 것 같아 계약서를 작성한 것이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진 않다. 

어떤 에이전시는 한중/중한 샘플 테스트를 모두 하고 나서 두 달째 중한 번역 사업이 아직 미정이라 결정되면 나중에 한꺼번에 연락을 주겠다고 하는데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출판 번역 쪽으로는 꽤 이름 있는 업체인데... 일처리 방식이......). 특허사무소와 게임업체는 제시하는 요율이 일반 번역 에이전시 보다 높아서  경험을 쌓으면서 전문 분야로 발전시켜 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에이전시 개척기를 길게 쓰고 있는 이유는 전부터 관심이 있었고, 까다로운 테스트 절차만큼 왠지 번역사를 더 존중해 주고 배려해 줄 것만 같은 에이전시와 계약을 하게 되어서 인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고 했던가(영화를 보지 않아서 이렇게 쓰일 수도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역시 '번역사를 위한 번역 에이전시는 없다'는 뻔한 사실을 깨달아서이다. 난 있지도 않은 걸 혼자 믿고 있었다.  

해당 에이전시에서 주장하는 매우 엄격한 테스트를 거쳐 감사하게도 전속 번역사로 인정받은 내가 제시받은 요율은 2015년에 계약한 업체가 초짜 번역사였던 내게 제시해서 그대로 수용한 요율에서 딱 1원 높았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리고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랬구나. 그런 것이었구나. 

오히려 번역료가 낮은데 괜찮으시겠냐고 물어봐주던 다른 신생 에이전시의 요율이 훨씬 높았다(아주 많이는 아니고...). 이 정도의 요율이라면 하루 8시간씩 매일 일을 해도 월수입 200만 원이 나올까 말까이다. 물론 일감이 얌전히 줄을 서서 순서대로 타이밍 맞춰 하나하나 나와줬을 때 말이다. 결국 안 될 거라는 말이다.

직장에 다닐 때도 이직하면서 제대로 된 연봉협상 한 번 안 해봤던 위인이 공급이 넘쳐나는 이 시장에서 배짱 좋게 요율 협상을 할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니 더 나은 희망을 가지기도 어렵다. 그래서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어려운 공부에 대한 의욕이 꺾여 버릴까 봐...

그래서 다시 해외 사이트로 눈을 돌리게 된다. Proz를 통해서 직접 연락을 해 온 중국 업체는 내가 제시한 자당 USD0.05는 수용해 주지 않았지만, USD0.04는 가능하다고 했다. 한국의 에이전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요율이다.  당장 현지 번역회사 리스트를 서치 하고, 영문레터를 썼다. 영문 이력서가 아직 없어서 국문과 중문 이력서를 첨부하며 간단한 이력을 영어로 소개했다. 쓰다 보니 영문 이력서와 분야별 포트폴리오를 작성해 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 없을 때 부지런히 해 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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