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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마 Sep 13. 2019

가담항설

소년만화의 문법과 변화

 예술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다. 모든 서사는 선과 악에 대해 모종의 판단을 내린다. 그리고 그 판단에 바탕해 삶을 재현함에 있어 자신만의 확대경을 들고 어떤 굴곡은 크게, 어떤 어그러짐은 작게 그려낸다. 탈정치성을 표방하는 예술일수록 더 정치적이다.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예술은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고 강화한다.

 소년만화가 대표적인 예다. 소년만화는 정의로운 소년이 성장하여 성공하는 이야기다. 따라서 소년만화는 정의가 무엇인지,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지, 그리고 성공이 무엇인지에 대해 대답해야 한다. 소년만화는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해 일관적으로 대답해왔다. 소년만화의 전성기를 이끈 잡지 <소년점프>의 슬로건은 그 대답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우정, 승리, 노력.’ 소년은 고난을 노력으로 극복하면서 자신의 정의로움을 증명한다. 우정을 나눈 친구와 협동하며 성장하고 그 성장을 바탕으로 악과의 대결에서 승리한다.

 1980~1990년대에 주로 생산, 소비된 소년만화는 당시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한 미덕을 정확하게 대변한다. ‘나’ 뿐만이 아닌 ‘우리’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에 대한 찬양은 공동체주의와 신자유주의를 교묘하게 결합시킨 한국의 조직문화를 반영한다. 자신보다 회사를 위해 자발적으로 초과근무를 하는 근면성실한 직장인이 타의 모범이 되듯이 자신의 팀을 승리시키기 위해 잠을 자지 않고 수련에 몰두하는 소년은 만화의 주인공으로 추앙받는다.

옛날만큼 압도적이지는 않지만, 소년만화는 아직도 만화 시장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현재 네이버에 연재되고 있는 <가담항설> 또한 소년만화이자 왕도물로, 주인공과 몇 명의 주변인물로 구성된 원정대가 악의 무리와 싸우며 성장하고 결국 성공하는 스토리라인을 따른다. 그러나 정의, 성장, 성공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소년만화와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가담항설>의 새로운 대답은 현 시대 대한민국의 담론이 40년 전에 비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지도다. 또한 <가담항설>은 이전의 소년만화와 달리 자신의 정치성을 명백하게 드러내며 앞으로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정의, 약자와 섬세한 거인

일반적으로 소년만화의 주인공은 영웅 서사의 규칙을 따른다. 비범한 출생의 비밀을 가지고 있지만 고난에 부딪히고, 이를 헤쳐나감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다. 소년만화에서 이러한 서사의 클리셰는 주인공의 정의로움을 논리적 이유 없이 보증한다.

가담항설은 정의로운 인물들과 이들의 원정을 방해하는 부정의한 인물들이 뚜렷하게 구분된다는 점에서 소년만화의 문법을 따른다. 그러나 가담항설에서 정의로운 인물들은 비범한 출생의 비밀을 갖고 있지 않다. 또한 정의로운 인물 뿐 아니라 부정의한 인물들도 모두 고난을 겪는다. 노예인 복아는 천한 신분 때문에 채찍질을 당한 채로 뒷산에 거꾸로 묶인다. 그 흉터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트라우마로 복아를 계속 따라다닌다. 백정인 정기 또한 신분 때문에 동생이 죽고 스스로도 본인의 문맹을 부끄러워하며 산다. 홍화는 ‘여자’ 장사여서 사당패에 팔아넘겨지고 학대당한다. 명영은 여성이라 학식을 쌓았는데도 불구하고 과거를 보지 못한다. 부정의한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갑연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여동생이 팔려가야 하는 상황에서 무력감을 느낀다. 백매는 가난하게 태어나 기생으로 팔려가고 손가락질을 받는다. 암주는 서자로 태어나 장사임을 들키면 살해당할 위험 속에 살아간다. 가족 내에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동생을 해부하면서까지 의술에 매달리지만 결국 가족에게 버림받는다.

이처럼 선악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인물이 고난을 겪는다. 그들의 고난들은 ‘노력’으로 극복될 수 없는 구조의 산물이다.  때문에 가담항설에서 고난은 정의를 증명하지 않는다. 대신에 가담항설은 개인적 불행이 아닌 사회적 억압으로 인한 고난을 인물들에게 제시하면서 사회적 권력관계로 이야기를 확장한다. 리고 고난 대신 그 권력관계에 대응하는 방식을 통해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구분한다.

이는 주인공의 고난을 개인적인 문제로 국한시키는 대부분의 소년만화와는 다른 행보다. <은하철도 999>의 철이가 부모를 여읜 것, 그리고 <하이큐>의 히나타 쇼요가 토비오와의 농구 경기에서 참패를 겪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것은 <가담항설>의 인물들이 자신의 성별, 신분, 그리고 가난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것과 서사에서 다른 목적을 수행한다. <은하철도 999>와 <하이큐>의 고난은 오로지 주인공의 승리를 더 빛나게 하기 위해 등장하지만 <가담항설>은 인물들의 고난을 통해 우리 사회의 억압과 폭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히 현실에도 존재하는 억압의 문제(경제적 계층, 성별)를 그대로 다루면서 가담항설은 자신의 정치성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부정의의 편에 선 인물들은 이러한 소수자성을 바탕으로 기득권에 대항하는 뚜렷한 전선을 형성한다. 암주는 비단옷 입은 복아를 ‘팔자 좋게 글공부나 하던 샌님’이라고 칭하며 “살면서 옳은 일만 선택할 수 있는게 특권이라고 생각해본 적 한 번도 없지?”라고 비난한다. 백매 또한 양심을 지키라고 촉구하는 하난에게 ‘좁은 시야’를 가졌다고 비난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슬이 든 상자에 쇳조각을 넣고 흔들면 구슬엔 상처가 잔뜩 나고 어떤 구슬은 깨져버리기도 하는데, 가끔씩은 이렇게, 제법 매끈한 구슬이 나올 때가 있죠. 저는 이것을 운이 좋았다고 부르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훌륭한 것이라고 부르더군요. 이 구슬 안이 깨져있는지 어떤지는 알지도 못하면서. 물론 이 구슬은 아주 귀한 것입니다. 깨진 구슬을 이것과 비교하며 조롱할 때 얼마나 유용합니까.

백매는 상자 안의 구슬이며 하난은 상자 밖의 구슬이다. 백매는 하난이 주장하는 옳고 그름은 사실 근원적인 ‘그름,’ 즉 상자 안의 구슬들을 억압하는 상자에 대해 눈을 감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주장은 기득권이 가진 특권들이 부당함을 비판하고 소수자들이 겪는 억압이 억울함을 호소한다. 권력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질서 내에서 약자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는 강자가 될 수 없다.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약자가 옳게 사는 것은 강자가 옳게 사는 것보다 어렵다. 결국 권력은 도덕적 우월성으로 연결되어 권력과 억압을 정당화시킨다. 억압은 처벌이 되어 그 본질이 은폐된다.

이런 비난을 직면했을 때 정의로운 인물들은 기득권이 주장하는 ‘옳음’이 왜곡되어 있다는 주장을 부정하는 대신 자신 또한 소수자라는 사실을 보이는 쪽을 택한다. 복아는 암주의 ‘옳은 일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특권’이라는 주장에 반박하는 대신, 자신도 노예라는 사실을 보임으로써 자신 또한 옳은 것만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니지 못했다고 항변한다. 이로써 정의로운 인물들과 부정의한 인물들은 하나의 주장에 동의한다. 구조는 불평등하며, 약자들에게 폭력을 가한다. 부당한 구조 안에서 약자들이 옳은 행동만을 하기란 어려운 일이며, 약자들의 악행을 강자들의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합의는 현 시대의 청년층이 바라보는 세상을 반영한다. “너희들의 나부랭이 같은 바스켓 상식은 내겐 통하지 않아! 너흰 풋내기니까!”라며 상대방의 무능을 조롱하던 강백호의 비난은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현 청년층은 기회의 불평등을 뼈저리게 겪은 세대다. 기회의 불평등이 능력의 불평등으로 충분히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청년층은 ‘흙수저’와 ‘다이아수저’의 출발선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대부분 자신을 ‘흙수저’에 이입하며, ‘다이아수저’와의 거리를 노력으로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체념한다. 그런 이들에게 무능에 대한 조롱은 이제 통쾌하기보다는 불편하다.

가담항설의 인물들이 주장하는 특권에 대한 추궁은 훨씬 받아들이기 쉽다. 현 사회에서 ‘특권’이라는 단어는 ‘부당한 권리’와도 일맥상통한다. 특권은 박탈당해야 마땅하다. ‘나도 소수자야’라는 정의로운 이들의 주장 또한 친근하다. 다양한 소수자담론이 등장하면서 대중은 세상에 다양한 권력의 층위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성애자 여성은 성지향의 층위에서는 기득권이지만 젠더의 층위에서는 소수자다. 더불어 소수자들이 누리지 못하는 권리가 복권되어야 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안티 페미니즘 담론의 입장이 여성들의 권리 복권을 직접적으로 반대하기보다는 남성들의 소수자성을 주장하거나 여성들이 소수자가 아니라고 반대한다는 사실은 이를 입증한다. ‘나도 소수자’라는 항변은 특권에 대한 추궁에 대해 할 수 있는 답변 중 우리 사회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는 반론이다.   

그렇다면 가담항설의 정의로운 자들과 부정의한 자들은 어떻게 다른가. 정의로운 인물들은 부당한 사회 구조를 바꾸려고 노력한다. 반면 부정의한 인물들은 구조를 유지한 채 개인의 이익을 추구한다. 가담항설은 새로운 성장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왜 이들의 반응이 이처럼 갈라지는지를 설명한다.

성장, 욕망의 발견

가담항설의 성장은 일견 전통적인 소년만화와 비슷해 보인다. 소년만화가 성장의 비결로 ‘우정’을 말하듯 가담항설은 ‘연대’를 말한다. 그러나 가담항설은 연대를 하기 위한 방법론을 제시하면서 개인을 긍정하는 실천철학을 제시한다.

소년만화에서 정신적 성장은 배틀에서 강해지는 모습으로 가시화된다. 따라서 강함은 성장의 징표다. 소년만화에서는 보통 동료와의 협력을 통해 배틀에서 승리하거나 동료 및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책임감을 자각하고 능력을 각성하는 방식으로 우정을 통한 성장을 그려낸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싸워봤자 정말로 강해질 수는 없는거야. 사람은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에 정말로 강해질 수 있는거야 - 나루토) 이러한 서사는 공동체주의적 가치를 옹호한다. 개인은 개인으로 있을 때보다 집단의 일부일 때 더 좋은 결과물을 낼 수 있다는 주장이다.

반면 가담항설은 연대가 집단에 대한 충성심이 아닌 개인의 욕망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만화 내에서 ‘말’은 특별한 지위를 지닌다. 말은 사람의 의지와 욕망을 담아 힘을 행사한다. 기도는 인간이 아닌 것을 인간으로 바꾸고, 잘 쓰여진 시는 사람을 치유하기도 하고 물건을 고치기도 한다. 글자, 즉 자신의 의지를 명확하게 이해하면 각인을 새길 수 있다. 각인은 강력한 전투 수단이 되어 배틀의 성패를 가른다.

그래서 가담항설은 ‘자신을 잘 들여다볼 때’ 강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홍화는 글을 쓸 줄 알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책을 읽고 풍부한 단어를 알게 된다는 건, 슬픔의 저 끝에서부터, 기쁨의 저 끝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감정들의 결을 하나하나 구분해내는 거예요.
정확히 그만큼의 감정을 정확히 그만큼의 단어로 집어내서 자신의 마음을 선명하게 들여다보는 거죠. 내가 얼마큼 슬픈지, 얼마큼 기쁜지. 내가 무엇에 행복하고, 무엇에 불행한지. 자신의 마음이 자신을 위한 목적을 결정하도록.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타인에게 정확히 전달하도록. 같은 단어를 알고 있다면 감정의 의미를 공유할 수 있고 같은 문장을 이해할 수 있다면, 감정의 흐름을 공유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건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만들죠. - 홍화

작가는 홍화의 입을 빌려 왜 ‘글’에 능할수록 강한 사람이 되는지 설명한다. 글에 능한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욕망을 잘 이해하고 이를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타인과 연대할 수 있다. 그래서 가담항설의 성장은, 스스로의 욕망을 깨달을 때 일어난다. 홍화는 두류산의 사계절을 다 보고 싶다는 욕망을 자각했을 때 결계를 깰 수 있었고, 백정은 홍화의 옆에 있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면서 의술을 깨친다. (그동안 저는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어떤 감정은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알았어요. 저한테 의술을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 백정)

결국 가담항설은 개인의 중요성과 연대의 필요성을 함께 이야기해낸다. 우리는 연대할 때 성장하지만, 연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욕망과 감정에 충실해야 한다. 개인보다 공동체가 중시되는 연대는 진정한 연대일 수 없다. 가담항설과 전통적 소년만화의 대비는 기성세대의 공동체주의가 해체되고 청년층의 개인주의가 성립되는 모습을 반영한다. 가담항설은 여기에 개인주의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연대하고 운동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작가는 성장의 조건을 욕망의 자각으로 달아 정의로운 인물과 정의롭지 않은 인물이 왜 사회에 대해 어떻게 다른 입장을 취하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먼저 정의로운 인물은 스스로의 욕망을 깨달아가며 성장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알기 때문에 이를 타인과 나눌 수 있다. 그 나눔에서 연대가 발생하고, 타인의 욕망이 나의 욕망이 된다. 결국 정의로운 이들은 자신 뿐 아니라 자신과 연대하는 타인의 삶 또한 바꿀 수 있기를 욕망하게 된다.

나의 약점은, 나의 불행은, 나와 같은 고통을 겪는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너의 불행이 나의 불행이 되게 만들지. 그리고 그건 날 강하게 만들어. 네가 소중하니까. 너를 위한 강한 내가 되는 거야. - 명영

연대하는 타인으로 확장된 욕망은 곧 세상에 대한 욕망으로 번진다. 결국 정의로운 인물들은 정의롭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사회의 구조를 바꾸고자 한다.

나는, 네가 지금 내 눈 앞에 안보이더라도 네가 행복하길 바래. 나는, 너와 내가 아무것도 아니었더라도, 네가 행복했기를 바래. (중략) 복아야. 너는 날 강하게 만들어. 계속해서 나아가게 만들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네게 주고 싶게 만들어. - 명영

반면 정의롭지 못한 인물들은 자신이 소수자로서 겪어야 했던 폭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소극적 욕망만을 가진다. 이들은 ‘진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결핍되어 있고 타인과 연대하지 못한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소극적, 단기적 욕망에만 매몰된다.

백매는 자신의 욕망이 ‘제한받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욕망이 제한받았던 과거를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다. 이에 하난이 신룡의 권력을 업은 그녀에게 ‘원하는 것을 다 이루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백매는 여기에 “오빠를 원망하고 부모를 죽이고 싶어 했던 나의 마음은 어떻게 채워집니까. 제가 팔았던 웃음은, 젊음은, 자존심은, 명예는 어떻게 돌려받습니까.”라고 하며 자신의 욕망은 과거에 있다고 답한다. 그래서 백매는 결핍된 자로 남는다. 그녀의 욕망은 더 이상 현재와 미래를 향하지 않는다. 그녀의 욕망을 대리욕망하는 신룡 또한 자신의 진짜 욕망을 찾지 못한다.

갑연 또한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자 할 뿐, 스스로의 욕망을 맨 앞에 두지 못하는 인물이다. 갑연은 ‘쓸모 있는 사람’을 옆에 두기 위해, 그리고 백매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행동한다. 그는 ‘쓸모’라는 말에 강박증적으로 집착하며 ‘쓸모 없는 사람’을 경멸한다. 이는 누이가 팔려가는 현실 앞에 무력했던 자신에 대한 혐오 때문이다. 그는 과거 백매가 쓸모 없다며 팔아버린 부모 앞에서 ‘누가 봐도 쓸모없는 건 나잖아. 나야말로 쓸모없는 반푼이라고!’라고 비명을 지르다가 결국 부모를 살해한다. 또한 그는 백매를 증오하는 동시에 그녀에 대한 깊은 죄책감을 간직한다. 그는 백매를 팔아넘긴 돈으로 산 닭죽을 먹은 과거에 대한 트라우마로 현재까지도 닭죽을 먹으면 구토를 한다. 그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할 때, 백매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천동지를 훔친 것은 스스로의 부귀를 유지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백매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다. 결국 그의 욕망은 현재의 의미를 만들어나가기보다 과거의 의미를 충족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들이 적극적 욕망을 갖지 못하게 된 것은 기대와 실망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백매는 자신을 도망치게 해주겠다는 오빠의 진심을 믿었고, 저를 사랑한다는 왕의 진심을 믿었다. 그러나 진심은 변했다. 상황이 진심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백매는 소수자로서 진심이 살아남지 못하는 상황 속에 살았다. 구조는 백매에게 욕망할 수 있는 힘을 빼앗았다.

그렇게 <가담항설>은 구조의 억압과 폭력이 얼마나 개인을 무참히 망가뜨릴 수 있는지를 그려낸다. 정의롭지 못함이 결코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려질 수 없음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정의로운 개인들이 아니고서는 구조가 결코 바뀔 수 없음을 말한다.

성공, 어둠 속으로 발을 내밀기 

그리하여 가담항설의 성공은 사회의 변혁이다. 작품에서 신룡은 권력의 정점이자 구조적 억압을 상징하며, 주인공 한설의 천명은 ‘도련님이 임금님께 배우고 익힌 걸 말하러 갈 수 있게 해달라’는 복아의 기원을 받아 왕 앞에 나아가 자신이 배운 것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설은 여성도 임금에게 배우고 익힌 걸 말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해, 소수자에 대한 억압이 철폐된 세상에 대해 왕에게 이야기할 것이다.

소년만화에서 대개 성공은 서사의 꽃이다. 성공은 성장의 증명이며, 노력의 증명이기 때문에 동시에 주인공의 정의로움의 증빙이다. 그러나 가담항설은 성공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나의 신념은 그런 세상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니야. 그 길을 향해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내가 되는 것. 그게 나의 신념이야. - 명영

개인의 힘으로 사회를 바꾼다는 건 요원하고 불가능한 일이다. 작중 희망을 상징하는 명영은 이를 인정한다. 별은 하늘에 있고, 우리의 발은 땅에 있기에 별을 향에 아무리 걸어도 별에 닿을 수는 없다. 하지만 명영은 그 길을 향해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것이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고 말한다. 그래서 명영은 항상 성장을 기대하며, 성장하지 않을지라도 제 몸보다 큰 옷을 입고 다닌다. 그리고 그걸 ‘미련’이 아닌 ‘희망’이라 부른다. 가담항설에서 성공은 정의를 담보하지도, 성장을 증명하지도 않는다. 성장과 정의는 성공과 무관하게 가치를 지닌다.

결국 가담항설은 여정에 대한 글이다. ‘나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것에서 출발해 그것을 언어로 적어내고, 그걸로 사람들과 연대하고, 그 연대로 사회 구조를 바꾸어 나가는 일련의 실천이다. 목적지, 즉 사회구조 변혁까지 닿지 않더라도 여정을 걸어나가야 한다고 가담항설은 이야기한다. 그래서 모든 이야기의 핵심은 감정에 있다. 인물들이 삶의 순간순간에서 느끼는 욕망과 감정들이야말로 사회의 기반이다.

인간은 욕망이 있어서 실망하고 감정이 있어서 절망한다. 감정은 인간을 취약하게 만든다. 세상에 정의가 필요한 것은 우리가 취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른 것이 그르고, 옳은 것은 옳은 것은 상처 때문이다. 우리가 사회를 이루고 함께 살아가는 것도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담항설>에서 눈물은 항상 희미하게 빛난다. 눈물만큼 진실되게 정의를 촉구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 어떤 은폐에도, 옳고 그름에 대한 논리를 빈틈없이 정리한 구조 속에서도 고통과 눈물은 드러난다. 가담항설은 그 튀어나온 눈물에 대한 이야기, 진실에 대한 이야기다. 사회는 그 진실들을 존중하고 호응해야 한다.

가수 트로이 시반은 성소수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노래 ‘Heaven'에서 ‘Truth runs wild like a tear down a cheek’이라고 노래한다. 진실은 기어코는 튀어나오고 만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그러하듯.

우리 사회에는 어떤 눈물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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