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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마 Nov 05. 2018

예쁘지는 않아도 사랑스러워

앤의 편지 #1 브라이트 리버 역

안녕하세요! 브라이트 리버 역에 온 것을 정말 환영해요. 이건 에이번리에 처음 오신 분에게 쓰는 편지들이에요. 에이번리를 사랑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만한 장소들에 편지를 숨겨 놓았어요. 편지를 따라 오다 보면 당신도 언젠가 에이번리를 사랑하고 있을 거예요.


오, 에이번리는 얼마나 사랑스러운 곳인지! 저는 사랑스럽다는 말이 정말 좋아요. 예쁘지 않은 것들도 사랑스러울 수 있거든요. 그래서 예쁘다는 말을 들을 때보다 사랑스럽다는 말을 들을 때 더 꼭 끌어안긴 기분이 들어요. 만약 루비 길리스가 저보고 예쁘다고 하면 그건 제 ‘예쁜 부분’들을 칭찬하는 말일 거예요. 코라든지 -자만하고 싶지는 않지만 저는 코가 조금 예쁘답니다- 창백한 피부가 예쁘다는 이야기겠지요. 하지만 그건 제 새빨간 머리나 주근깨가 예쁘다는 말은 아닐 거예요. 하지만 다이애나가 저보고 ‘사랑스럽다’고 말하면, 그건 저라는 사람 자체가 사랑스럽다는 말일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에이번리가 정말 사랑스러운 곳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에이번리의 예쁜 부분이 아니라 마을의 모든 것을 사랑하거든요.      


아, 전 앤이라고 해요. 저도 에이번리에 처음 온 날에 당신이 이 편지를 발견한 바로 그 벤치 위에 앉아 있었어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요. 면모 교직물로 만들어진 누르스름한 옷, 빛바랜 갈색 세일러 모자, 그리고 발치에 놓인 낡은 여행가방. 고아원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은 다 낡고 흉한 것들밖에 없어요. 어여쁜 것을 쥐여 줄만큼 고아들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이란 세상에 잘 없는 법이니까요. 전날 최선을 다해 풀을 먹이고 다림질을 했지만 그래도 보면 볼수록 초라했어요. 그게 제가 여태까지 받아온 취급을 너무나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서 부끄러웠어요.     


그래서 그 자리에 앉아 저를 데리러 올 생애 첫 가족을 기다리면서 온갖 생각을 다 했어요. 매슈 아저씨한테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어떻게 하면 덜 ‘고아’스러워 보일까 싶어서 원피스 자락을 펴기도 하고, 양말도 끝까지 올렸다가 다리를 한쪽으로 다소곳하게 뉘어 보기도 한 걸요. 하지만 일평생 고아였던 사람이 어떻게 ‘고아’스럽지 않을 수 있겠어요! 자기가 한 번도 되어보지 않은 것이 되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에요.


매슈 아저씨가 오기 10분 전까지도 작아서 구겨 신은 신발을 내려다보면서 가죽에 진하게 난 주름을 어떻게 가릴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발치에 놓인 여행 가방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거의 저랑 나이가 비슷한 가방이었어요. 손잡이가 헐거워서 잘못 잡으면 휙 빠져버리는 반쯤 고장난 가방이에요.    

  

저는 그 가방을 10년 가까이 들고 다녔어요. 그래서 누구보다도 가방을 정확하게 들 줄 알았어요. 멋있는 말이지 않아요? 정확하게 들어야 하는 가방이라니! 거창해 보이지만 너무너무 사실인 말이에요. 저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그 가방을 잘 알아요. 어떻게 들어야 한 쪽으로 쏠리지 않는지 알고 손잡이가 빠졌을 때 나사를 어떻게 만져야 다시 끼워지는지 알아요. 겉보기에는 엉망진창이어도 햇살 좋은 날 그 가방 위에 엎드리면 기분 좋은 냄새가 난다는 것도 알고, 손잡이를 소금하고 식초로 닦아주면 즐겁다는 듯이 반짝반짝 빛이 난다는 것도 알아요.


그걸 생각하고 나니까 기분이 좀 괜찮아졌어요. 팔꿈치가 헤진 원피스도, 실밥이 튿어진 모자도 제가 가장 잘 아는 것들이었거든요. 원피스와 모자와 가방을 제가 그렇게 잘 알게 된 건 그것들을 아꼈기 때문이에요. 헤진 팔꿈치에는 제가 가진 가장 예쁜 자색 원단을 덧댔고, 모자는 실밥 터진 것이 보이지 않게 그 위에 꽃을 꽂았어요. 그러니까 저만큼은 저를 아무렇게나 취급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많은 게 초라해도 그 안에서 스스로를 아끼려고, 그리고 행복해지려고 노력해왔다는 증거들이 거기 있었어요. 제 삶에는 예쁘지 않은 것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그걸 사랑하려고 노력해왔는걸요.      


그러한 노력을 해 온 고아라면, 예쁘지는 않아도 사랑스러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오, 삶을 사랑한다는 건 정말로 좋은 일이에요.      


그래서 매슈 아저씨가 저에게 ‘가방을 들어줄까’하고 물었을 때 전 당당하게 제가 들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제 가방은 제가 가장 잘 드니까요. 그 생각을 하니까 제 못생긴 옷가지에도 불구하고 주눅 들지 않을 수 있었어요.


당신도 지금 어떤 옷과 어떤 과거를 입고 이 자리에 앉아있든, 그럴 수 있기를 바라요. 행복하려고 노력해 왔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사랑스러워요. 에이번리의 사람들은 그런 당신의 사랑스러움을 한눈에 알아볼 거예요.


당신을 위해 선물을 하나 준비했어요. 벤치 옆 매슈 아저씨를 닮은 바위 뒤를 살펴보면 분홍색 꾸러미가 하나 보일 거예요. 카모디에서 새로 배운 뜨개질법으로 만든 컵 받침이에요. 그냥 물을 먹더라도 스스로를 아껴주고 싶을 때 사용해 보세요. 언젠가 자신이 보잘것없어 보일 때 그 순간들이 당신에게 힘을 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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