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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마 Oct 22. 2018

행복해지고 싶다고 인정해요


어릴 때부터 감정을 과장해서 적는다는 지적을 많이 들었다. 초등학생 때 일기에다 ‘오늘 급식에 계란말이가 나오지 않아 서러웠다’고 쓴 적이 있다. 엄마는 ‘서러웠다’ 위에 두 줄을 직직 긋고는 위에 ‘아쉬웠다’라고 적었다. 서러움은 계란말이가 급식에 나오지 않은 일과는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라고 했다.


 그 후로도 나는 내 단어들을 고치며 살았다. ‘서럽다’를 ‘아쉽다’로, ‘숨이 막혔다’를 ‘슬펐다’로. 단어를 고친다는 건 내가 느끼는 감정들이 진실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일이기도 했다. 내가 느끼는 서러움은 사실 자기애와 자기연민으로 포장되고 부풀려진 아쉬움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그 거품을 걷어내고 나면 거의 다 쓴 비누처럼 작고 얄팍한 감정만 남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사라질 거라고, 모든 사람들은 그런 분리를 해내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자꾸 서러웠고, 자꾸 절망스러웠다. 사소한 엇나감이 나에게만은 거대한 비극으로 다가왔다. 그것을 자기연민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잡을수록 스스로가 창피했다. 내 몸보다도 큰 자기애를 끌어안고 사는 것 같았다. 그 자의식 과잉이 치 떨리게 부끄럽고 흉물스러웠다. 그래서 자기애와 자기연민을 증명하는 예민함도, 내 절망들도 창피했다.


 그러나 혐오스러운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을 오롯이 혐오하기에는 예민함이 너무 내 본질에 가까웠다. 인간은 자신을 혐오만 하고는 살아가지 못하는 법이다. 나는 한편으로 예민함을 내 특별함으로 받아들였고, 자기숭배와 자기혐오를 넘나들었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내가 얼마나 예민한지를 열심히 떠들기도 했다. '날 특별하게 봐줘', 라는 마음과 '난 이렇게 바닥이니까 떠날거면 지금 떠나'라는 마음이 뒤엉켜 어떤 날은 한없이 이야기를 과장했고 어떤 날은 아예 입을 다물었다. 자존감이 한없이 흐릿해져 갔다.


 자존감이 취약하니 나와 다른 성향의 사람과 친해지기 어려웠다. 나와 다른 것이 어여쁘고 가치 있다고 인정하는 순간 나는 추하고 가치없는 것으로 전락한다고 느꼈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다. 비슷한 감정의 등락을 가진 사람들과 슬픔에 대한 예민함이 가지는 가치를 연구하고 또 구성했다. 우리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일이었으나, 그렇다고 그 이야기들이 거짓말인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예민함과 빈번한 우울은 감정의 결을 어루만질 줄 아는 사람을 길러낸다. 타인의 우울을 더 잘 이해하게끔 만들어주기도 하고, 위로하는 법을 더 잘 알게 되기도 한다. 우리는 그러한 이해를 나누면서 서로를 도닥였다.


 이렇듯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들은 나름의 정확함과 따뜻함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저 함께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었고, 사실 바다 밑에도 바다 위에는 없는 어여쁜 것들이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바다 밑에도 바다 위에는 없는 예쁜 것들이 있다’는 말은 ‘내가 바다 아래에 있고 싶다’는 이야기와 사실 아무런 관련이 없다. 바다 위에도 바다 밑에는 없는 어여쁜 것들이 있고, 어쩌면 나는 그것들이 더 보고 싶을지도 모른다. 사실이 그랬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행복한 것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했고, 그러는 데 거의 성공했다. 어떤 겨울날까지는. 그날 이후로 나는 행복해져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 뒤로 포기와 결심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나를 그 수렁에서 끌어내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니까, 행복하겠다고, 행복해지겠다고 결심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안다. 행복이 너무나 요원해 보이고 매번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면서도 기대하길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용기있는 사람들인지 안다. 그리고 더불어 차마 행복해지겠다고 결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꼬여서', '중2병이어서' 그런 것이 아님을 안다. 그런 결심도 힘들 만큼 짓눌리는 삶이 있음을,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해지겠다는 결심 없이 행복해지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내가 '행복해지고 싶다'는 욕망을 여러 포기와 체념 속에서 캐내는 데도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금 더 빨리, 스스로가 행복해지고 싶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끝내, 기어이는, 행복해지기를 진심으로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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